Homily/★ 빠다킹 신부님과 새벽을..

다른 사람에 대해서 조금 더 이해하려고 노력해봅시다.

ohjulia 2006. 11. 13. 06:25
2006년 11월 13일 연중 제32주간 월요일

제1독서
티토서 1,1-9
1 나 바오로는 하느님의 종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입니다. 내가 이렇게 부르심을 받은 것은 하느님께 선택된 이들의 믿음을 돕고 신앙에 따른 진리를 깨우쳐 주기 위한 것으로, 2 영원한 생명의 희망에 근거합니다. 이 영원한 생명은 거짓이 없으신 하느님께서 창조 이전에 약속하신 것입니다.
3 사실 하느님께서는 제때에 복음 선포를 통하여 당신의 말씀을 드러내셨습니다. 나는 우리 구원자이신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 이 선포의 임무를 맡았습니다.
4 이러한 나 바오로가 같은 믿음에 따라 나의 착실한 아들이 된 티토에게 인사합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우리 구원자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내리기를 빕니다.
5 그대를 크레타에 남겨 둔 까닭은, 내가 그대에게 지시한 대로 남은 일들을 정리하고 고을마다 원로들을 임명하라는 것이었습니다. 6 원로는 흠잡을 데가 없어야 하고 한 아내의 충실한 남편이어야 하며, 자녀들도 신자이어야 하고 방탕하다는 비난을 받지 않아야 하며 순종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7 사실 감독은 하느님의 관리인으로서 흠잡을 데가 없어야 합니다. 또한 거만하지 않고 쉽사리 화내지 않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술꾼이나 난폭한 사람이나 탐욕스러운 사람이 아니라, 8 손님을 잘 대접하고 선을 사랑해야 하며, 신중하고 의롭고 거룩하고 자제력이 있으며, 9 가르침을 받은 대로 진정한 말씀을 굳게 지키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건전한 가르침으로 남을 격려할 수도 있고 반대자들을 꾸짖을 수도 있습니다.


복음 루카 17,1-6
그때에 1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그러한 일을 저지르는 자! 2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것보다,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내던져지는 편이 낫다.
3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라.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4 그가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
5 사도들이 주님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6 그러자 주님께서 이르셨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




이런 이야기가 생각나네요. 이 이야기를 묵상 글에 써도 되는 지 잘 모르겠지만 그냥 한번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아주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남녀가 차를 타고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주 인적 없는 곳에 차가 멈추는 것이었어요. 그리고 남자가 여자의 손을 잡고 숲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러고 여자의 옷을 하나하나 벗기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이 여자도 아주 순순히 옷을 벗는데 응합니다. 이제 여자는 팬티를 벗었고, 치마까지 걷어 올렸습니다.

잠시 후, 여자가 남자에게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아빠, 나 쉬 다했어.”

아마 저의 이 글을 보면서, 이상한 상상을 하신 분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그렇게 이상한 상상을 이끌만한 사건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분명히 우리들이 쉽게 볼 수 있는 아빠와 어린 딸의 모습인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엉뚱한 상상을 불러 일으킬만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삶 안에서 이러한 오해를 일으켰던 적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조금만 더 주의를 기울였다면 그리고 조금만 더 자세히 보려고 노력했다면, 그러한 오해를 더 많이 줄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섣부른 판단과 행동으로 인해서 나의 이웃들에게 얼마나 많은 아픔과 상처를 주었을까요? 그런데 이 아픔과 상처는 이웃들에게서 멈추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믿고 따른다는 주님한테도 끊임없이 향하고 있습니다.

제가 신학생 때 이러한 체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글쎄 본당의 수녀님과 약간 서먹서먹한 관계가 된 것입니다. 물론 저한테도 잘못은 있었지만, 저에게 그렇게 행동하시는 수녀님을 좀처럼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미사 때였습니다. 수녀님께서 성체분배를 하시는데 그 줄에 서서 수녀님으로부터 성체를 받아 모시기가 너무나 싫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줄로 옮겨가서 성체를 받아 모셨지요. 그리고 자리로 돌아와서 묵상을 하는데, 저에 대해서 깊은 반성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제가 감히 수녀님의 손으로 통해 저에게 오실 주님을 거부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남을 미워한다는 것은 이렇게 주님을 거부하는 행동으로까지 나아갈 수가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라는 사도들의 청에 예수님께서는 두터운 믿음이 있어야 함을 겨자씨의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주님께 대한 강한 믿음이 있다면, 감히 남을 미워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행동은 바로 주님을 거부하는 행동이 되기 때문이지요.

결국 믿음을 통해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간직할 수가 있는 것이며, 이 믿음을 통해서 내가 주고 있는 이웃들에 대한 아픔과 상처도 줄여 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들의 부족한 믿음을 주님께 청해야겠습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원하시고 우리에게 강조하셨던 그 사랑의 삶을 살아갈 수가 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 조금 더 이해하려고 노력해봅시다.



고통은 기쁨의 한 부분이다('좋은 글' 중에서)


금붕어는 어항 안에서는 3천 개 정도의 알을 낳지만
자연 상태에서는 1만개 정도를 낳는다.

열대어는 어항 속에 자기들끼리 두면 비실비실하다 죽어버리지만
천적과 같이 두면 힘차게 잘 살아간다.

호도와 밤은 서로 부딪혀야 풍성한 열매를 맺고,
보리는 겨울을 지나지 않으면 잎만 무성할 뿐 알곡이 들어차지 않는다.

태풍이 지나가야 바다에 영양분이 풍부하고,
천둥이 치고 비가 쏟아져야 대기가 깨끗해진다.

평탄하고 기름진 땅보다 절벽이나 척박한 땅에서 피어난 꽃이 더 향기롭고,
늘 따뜻한 곳에서 자란 나무보다 모진 추위를 견딘 나무가 더 푸르다.

고통은 기쁨의 한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