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녀 엘리사벳(St.Elizabeth of Hungary) 왕비
성인의 활동지역 : 헝가리(Hungary)
성인의 활동연도 : 1207-1231년
성인과 같은이름 : 엘리자베스, 엘리자벳
헝가리의 프레스부르크(Pressburg)에서 국왕 앤드레 2세(Endre II)와 왕비
제르트루다(Gertruda)의 딸로 태어난 성녀 엘리사벳(Elisabeth)은 14세 되던
해에 튀링겐(Thuringen) 영주 헤르만 1세(Hermann I)의 둘째 아들인 루트비히
4세와 결혼하였다.
비록 이 결혼이 정치적 이유로 이루어졌지만 화목하고 평화스러웠다고 하며
6년 동안을 서로 만족스럽게 살았다.
그들의 집은 아이제나흐(Eisenach) 근교의 바르트부르크(Wartburg) 성에
있었고 자녀는 세 명을 두었다.
그러나 1227년에 루트비히 4세가 풀리아(Puglia)로 출정하는 십자군에
가담하였다가 9월 11일 이탈리아 남동부 오트란토(Otranto)에서 전염병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그 후 그녀는 온갖 슬픔을 극복하고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하여 몸부림치다가
자선활동에 전념하기 위하여 집안의 많은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었다고
한다.
이런 저런 이유 때문에 그녀는 자녀들을 위하여 대비책을 마련한 뒤에 작은
형제회 3회원이 되어 세속을 떠났다.
이때부터 그녀는 헤센(Hessen)의 마르부르크(Marburg) 성에 살면서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돌보는데 헌신하였다.
엘리사벳은 마르부르크의 콘라트(Conrad)로부터 영적 지도를 받았는데,
그녀의 영적 생활은 날이 갈수록 풍요롭게 변화되었다.
누구나 놀랄 정도로 가난하고 겸손한 삶을 살았으며 깊은 사랑으로 모든 이들을
감쌌던 것이다.
그녀는 운명하기 4년 전에 자신을 쫓아냈던 시동생으로부터 마르부르크 성으로
돌아올 허가를 받았고 또 그녀의 아들에게 백작을 승계시킬 수 있었다.
여왕이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위하여 직접 음식을 날라주고 옷을 지어 준 것은
전대미문의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그녀는 독일인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성녀가 되었다.
그녀는 불과 24년밖에 살지 못하고 마르부르크에서 운명하였지만 오늘날에는
작은 형제회 재속 3회의 수호성인으로 높은 공경과 사랑을 받고 있다.
그녀는 1235년 5월 28일 성령 강림 대축일에 이탈리아 페루자(Perugia)에서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Gregorius IX)에 의하여 시성되었다.
14세기 이후 엘리사벳의 성화는 망토에 장미꽃을 담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졌는데,
이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려고 몰래 빵을 감추고 나가다가 남편에게 들키자
그 빵이 장미꽃으로 변했다는 전설에 따른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빵 제조업자 및 빵 집의 수호성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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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사벳이라는 이름의 성녀는 여러 명인데 그 중에도 성후 엘리사벳은 가장 유명한
분이다.
그녀는 그녀 고국의 이름을 따서 헝가리의 엘리사벳이라고도 불리며, 박애의 여왕으로
널리 알려져 존경을 받는다.
엘리사벳은 1207년 헝가리의 왕 안드레아 2세의 공주로 태어났고,
불과 네 살 때에 정치적 이유로 중부 독일 투린지아의 영주의 영식 루도비코와
약혼했으며,왈크부르크 성에서 일곱 살 위인 그와 함께 성장했다.
둘은 서로 신앙이 두텁게 열심한 남매와 같은 좋은 사이로 자라났으며,
결혼 후에도 그 정이 변치 않았다 한다.
왈트부르크 성은 12,3세기경 문무의 경기장으로 유명했으며,
문인 기사들이 모여 가끔 호화스러운 연회가 베풀어졌으므로 자연히 신심생활에는
지장이 많은 곳이었다.
그러나 하느님의 특별한 보호를 받은 엘리사벳인지라
조금도 그 영향을 받지 않았으며 오히려 어린 마음에도 신앙심이 깊어 노는 장소도
꼭 성당 근처를 택했다.
놀 때에 내기에서 지는 사람은 성당에 가서 주님 기도 열 두 번을 외우도록 되어
있었는데, 그것 때문에 일부러 지는 정도였다.
일곱 살 때에 어머니가 암살 당했다는 흉보를 듣고 어린 마음에 심한 충격을
받았으나, 차츰 그것이 하느님의 섭리임을 깨닫자 세상의 허무함을 통감하기에
이르렀다.
엘리사벳은 매 주일마다 수양 어머니인 성주의 부인 소피아의 인솔로 루도비코의
동생과 같이 아이세나하에 대려가 그곳 성당에서 미사에 참여했다.
신분상 그녀는 머리에 화려한 황금관을 쓰고 갔었다.
어느 날 예수께서 못박히신 성상 앞에서 기도하다가 문득 쳐다보니 그 머리에
가시관이 씌워있음을 알고는 즉시 자기 머리에서 금관을 벗어놓았다.
소피아가 이를 나무라니 "어머니, 예수님께서는 가시관을 쓰고 계시는데 제가 어찌
금관을 쓰고 그 앞에 있겠습니까?”했다.
1206년 그녀는 시아버지인 헬만 후작이 별세하고 루도비코가 어린 몸으로 투린지아의
성주가 되자, 결국 엘리사벳과의 결혼 문제가 말썽이 되었다.
부하들 중에는 엘리사벳이 지나치게 신앙에만 열중하여 성주의 부인으로서는 적당치
않다는 이유로 배척하는 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래 마음이 착한 루도비코는 엘리사벳의 심중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단호히
거절하고 곧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다.
그때 엘리사벳은 겨우 15세였다.
결혼 초기에는 매우 원만했다. 루도비코는 진심으로 아내를 사랑하고 남편을 알뜰히
섬겼으며, 서로 국민을 사랑하고 선정을 베푸는데 노력했다.
특히 타고난 그녀의 자애심은 빈민 구제를 염두에 두고 그들을 위해 많은 보조금과
식량을 책정하도록 하고, 때로는 손수 빈민을 탐방해 구제해 주기도 했다.
또한 왈트부르크 성 밑에 병원을 건설하고 가련한 환자를 수용해 치료하도록 하며,
환자들의 상처를 씻어주기도 했다.
1225년에 루도비코는 독일 황제의 수행원으로 로마에 가게 되었으므로 남편을 대신해
엘리사벳이 나라를 잘 다스리고 있었는데, 때마침 전국에 큰 흉년이 들어 빈민들의
참상은 차마 볼 수 없는 상태였다.
그녀는 성의 창고문을 열어 이재민에게 식량을 모두 분배해 주고, 심지어는 자기
의복이며 장식품을 팔아서까지 양식을 장만하여, 그들의 곤궁을 풀어주었다.
그러자 백성들은 진심으로 그녀를 구호의 은인으로 존경을 했으나, 한편 신하 중에는
그 적극적인 구제 사업에 불만을 품고 성주가 돌아옴을 기다려 그 일들을 일러바쳤다.
그러나 루도비코는 백성들의 만족한 모습을 보고 크게 기뻐하며 오히려 엘리사벳이
한 일을 칭찬하고 책망하지 않았다.
세상에서는 빈민에게 주기 위해 가져온 빵이 장미꽃으로 변했다는 등, 혹은 성에서
쉬게한 나병환자가 루도비코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로 보였다는 등의 기적담이
퍼지고 있는 것을 보아도 그녀의 자선 사업이 얼마나 일반 사람들의 격찬을 샀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루도비코는 물론 아내의 영향도 받았을 것이고, 자신 역시 신앙이 두터운지라,
당시 성지 팔레스티나를 회교도들의 손에서 탈환하기 위해 십자군 전쟁에 참가해
많은 부하를 거느리고 성지로 향했다.
루도비코는 원정 도중 불행히도 병사하고 말았다.
이런 비보에 눈물이 마를 사이도 없이 엘리사벡에게는 설상가상으로 다른 괴로움과
슬픔이 겹쳐왔다.
즉 그녀는 새로 영주가 된 헨리코 라스페의 학대에 못 이겨 두 아이를 데리고
오랫동안 정든 성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인정은 조석지변인지라, 과거에 그렇게 많은 혜택을 받은 아이제나하 시민들도
새 영주의 눈이 두려워 누구하나 그녀를 맞아주는 이가 없었다.
보통 사람 같으면 그런 곤궁 중에 하느님을 원망할 것이나 엘리사벳은 모든 불행을
하느님의 뜻으로 달갑게 참아 받았다.
그리고 현세에 환멸을 느끼고 더욱 하느님과의 일치를 갈망하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 루도비코의 부하들이 전쟁에서 돌아와 이구동성으로 헨리코의 무례함을
간책하자, 그도 잘못을 뉘우치며 다시 엘리사벳을 성안으로 맞아들이려 했다.
엘리사벳은 이를 정중히 거절하고 전부터 열망하던 수도 생활을 실천하려고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회 제 3회에 입회하고, 마트부르그시 부근에 작은 초막을 마련하고,
겨우 피어나기 시작한 21세의 청춘으로 자선과 기도 생활에만 몰두했으니,
이 얼마나 갸륵한 일인가!
1231년 11월 17일, 이미 선종 준비에 만전을 다한 엘리사벳은 풍부한 하느님의 상금을
받기 위해 천국으로 불려갔다.
전 교회가 깊이 애석히 여겼음은 두말할 것도 없으며, 그녀의 시성은 사후 불과
4년만에 실현되었다.
그때 유해는 이전 묘에서 화려한 성당으로 이송되었고, 독일 황제 프레드릭에 의해
그녀의 머리에 금관이 씌워졌다.
후일 이곳에는 그녀의 성덕을 추앙하기 위한 장려한 대성전이 건축되었으며,
그녀를 공경하는 열이 날로 높아지고, 오늘날에 있어서는 전 교회에서 자선 사업의
주보로 섬기며 프란치스코회 제3회의 수호 성녀로 공경한다.
(대구대교구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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