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ily/★ 빠다킹 신부님과 새벽을..

다른 사람들 웃기기.

ohjulia 2006. 11. 23. 06:05
2006년 11월 23일 연중 제33주간 목요일

제1독서
요한묵시록 5,1-10
1 나 요한은 어좌에 앉아 계신 분의 오른손에, 안팎으로 글이 적힌 두루마리 하나가 들려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두루마리는 일곱 번 봉인된 것이었습니다.
2 나는 또 큰 능력을 지닌 천사 하나가 큰 소리로, “이 봉인을 뜯고 두루마리를 펴기에 합당한 자 누구인가?” 하고 외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3 그러나 하늘에도 땅 위에도 땅 아래에도 두루마리를 펴거나 그것을 들여다볼 수 있는 이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4 두루마리를 펴거나 그것을 들여다보기에 합당하다고 인정된 이가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나는 슬피 울었습니다.
5 그런데 원로 가운데 하나가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울지 마라. 보라, 유다 지파에서 난 사자, 곧 다윗의 뿌리가 승리하여 일곱 봉인을 뜯고 두루마리를 펼 수 있게 되었다.”6 나는 또 어좌와 네 생물과 원로들 사이에, 살해된 것처럼 보이는 어린양이 서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 어린양은 뿔이 일곱이고 눈이 일곱이셨습니다. 그 일곱 눈은 온 땅에 파견된 하느님의 일곱 영이십니다.
7 그 어린양이 나오시어, 어좌에 앉아 계신 분의 오른손에서 두루마리를 받으셨습니다. 8 어린양이 두루마리를 받으시자, 네 생물과 스물네 원로가 그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들은 저마다 수금과, 또 향이 가득 담긴 금 대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향이 가득 담긴 금 대접들은 성도들의 기도입니다. 9 그들이 새 노래를 불렀습니다. “주님께서는 두루마리를 받아 봉인을 뜯기에 합당하십니다. 주님께서 살해되시고, 또 주님의 피로 모든 종족과 언어와 백성과 민족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속량하시어 하느님께 바치셨기 때문입니다. 10 주님께서는 그들이 우리 하느님을 위하여 한 나라를 이루고 사제들이 되게 하셨으니, 그들이 땅을 다스릴 것입니다.”


복음 루카 19,41-44
그때에 41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시어 그 도성을 보고 우시며 42 말씀하셨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
43 그때가 너에게 닥쳐올 것이다. 그러면 너의 원수들이 네 둘레에 공격 축대를 쌓은 다음, 너를 에워싸고 사방에서 조여들 것이다. 44 그리하여 너와 네 안에 있는 자녀들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네 안에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게 만들어 버릴 것이다.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숲속 오솔길에서 만난 너구리와 원숭이가 탐스럽게 잘 익은 산머루 한 그루를 발견했습니다. 너구리가 산머루 나무를 캐내어 자기 집에 심으려 하자, 원숭이도 제 집으로 가져가겠다고 해 시비가 벌어졌지요. 결국 원숭이가 제안을 합니다.

“우리 싸우지 말고 공평하게 반으로 잘라 나누어 갖자.”

괜찮은 제안인 것 같아서 너구리는 동의를 했지요. 그러자 약삭빠른 원숭이는 산머루 나무의 허리를 잘라 머루가 달려 있는 위쪽을 가져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분명히 반이었고 자신도 동의를 한 사실이었기 때문에 비록 뿌리만 남아있는 아랫부분이지만 할 수 없이 이 부분을 차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너구리는 곧바로 자신의 집 앞에 뿌리부분을 심었습니다.

이제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원숭이는 첫 해에만 산머루를 혼자서 풍성하게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너구리는 첫 해에는 아무 것도 먹을 수 없었지만, 해마다 산머루를 따먹을 수가 있게 되었지요.

어쩌면 우리도 이 원숭이와 같은 모습을 취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눈앞에 놓여 있는 것에만 집착을 하고, 근본적인 것에는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않는 어리석은 원숭이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바로 이렇게 눈앞의 일만을 바라보고 있는 어리석은 인간들의 모습을 보시면서 주님께서는 슬퍼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십니다. 왜 우실까요? 바로 어리석은 인간들의 모습을 보고 우시는 것이 아닐까요? 당신을 통한 하느님의 구원을 알리고자 그토록 많은 기적을 행하셨고 비유라는 방법까지 동원하면서 쉽게 설명을 해주셨지만, 사람들은 주님을 알아 뵙지 못하지요. 구원의 열쇠를 들고 계신 분인데 오히려 예수님의 말씀에 트집을 잡고, 결국 십자가의 죽음으로 이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어리석은 인간의 모습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어떻게 슬프지 않을 수 있을까요? 마치 잘못된 길로 가는 자녀를 보면서 슬피 우는 부모의 심정으로 예수님께서는 눈물을 흘리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눈물을 떠올리면서, 우리 신앙인들은 어떤 태도로 살아야 할까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여전히 눈앞에 놓여 있는 세속의 탐욕에만 집중하면서 가장 근본적인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할까요? 그런데 바로 이 모습이 이천년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큰소리로 외치던 사람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모습을 또다시 보시는 예수님께서는 더 큰 슬픔을 간직하실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지금의 나를 보시고 어떠실까요? 웃으실까요? 우실까요?

주님께 슬픔보다는 웃음을 전달할 수 있는 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다른 사람들 웃기기.



공자의 후회('원정연의 여씨춘추(呂氏春秋) 인터넷' 중에서)


공자가 제자들과 채(蔡)나라로 갈 때의 이야기이다.

도중에 양식이 다하여 채소만 먹으며 일주일을 버텼다. 그들은 모두 기진맥진한 상태가 되었다. 공자도 힘이 없어 잠시 잠이 들었다.

공자가 아끼는 제자 중에 안회(顔回)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어디선가 쌀을 조금 얻어왔다. 그는 빨리 밥을 지어 선생님께 드리고 싶었다. 밥이 익어갔다. 그때 공자도 잠을 깼는데 마침 밥냄새가 코끝에 스쳤다. 공자는 웬일인가 하여 부엌을 들여다 보았다.

마침 안회는 솥뚜껑을 열고 있다가 밥을 한 움큼 꺼내어 자기 입에 넣는 중이었다. 공자는 생각했다.

‘안회는 평시에 내가 밥을 다 먹은 후에야 자기도 먹었고 내가 먹지 않은 음식이면 수저도 대지 않았는데 이것이 웬일일까? 평시의 모습이 거짓이었을까? 다시 가르쳐야 되겠구나.’

그때 안회가 밥상을 차려 공자에게 가지고 왔다. 공자가 어떻게 안회를 가르칠까 생각하다가 기지를 발휘하여 이렇게 말했다.

“안회야, 내가 방금 꿈속에서 선친을 뵈었는데 밥이 되거든 먼저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라고 하시더구나.”

공자는, 제사 음식이야말로 깨끗해야하며 누구도 미리 손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안회도 알기 때문에 그가 먼저 먹은 것을 뉘우치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안회의 대답은 달랐다.

“선생님, 이 밥으로는 제사를 지낼 수 없습니다.”

공자가 놀라서 물었다. “왜 그런가?”

“이 밥은 깨끗하지 않습니다. 제가 조금 전 뚜껑을 열었을 때 천장의 먼지가 내려앉았습니다. 선생님께 드리자니 어렵고 그렇다고 밥을 버리자니 너무 아까워서 제가 그 부분을 덜어 내어 먹었습니다.”

공자는 이 말을 듣고 안회를 의심한 것이 부끄러웠다. 공자는 곧 제자들을 모아놓고 말했다.

“예전에 나는 나의 눈을 믿었다. 그러나 나의 눈도 완전히 믿을 것이 못 되는구나. 예전에 나는 나의 머리를 믿었다. 그러나 나의 머리도 완전히 믿을 것이 못 되는구나. 너희들은 알아두거라. 한 사람을 진정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사람의 눈과 머리는 너무 믿을 것이 못된다. 그러므로 이에 따라 함부로 다른 사람을 단정해서는 안 된다. 사람을 판단하는 일에 관한 한 성인 공자도 자기의 눈과 머리를 믿지 않았다.

독선과 오해는 자신의 눈과 머리를 너무 믿는 데서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