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Lord/† 聖人들의 삶을 통해서

성 펠릭스 (5월 18일) 수도자

ohjulia 2007. 5. 18. 08:30
성 펠릭스
 

    성 펠릭스 (St. FELIX of Cantalice) 수도자

    성인의 활동지역 : 칸탈리체(Cantalice) 성인의 활동연도 : +1587년 성인과 같은이름 : 뻴릭스 펠릭스(1513 - 1587)는 이탈리아 칸탈리체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비천한 목동으로 생활하였다. 28 세가 되던 해 황소 떼가 도망치는 사건을 겪고 난 후 뜻한 바가 있어서 카푸친회에 평형제로서 입회하였다. 그는 깊은 신앙심과 하느님 뜻에 순명하는 데에 뛰어났다. 그는 가끔 복되신 성모님 품 안에서 어린 구세주를 받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또한 그의 입술에서는 항상 "하느님께 감사(DEO GRATIAS)!" 라는 말이 떨어질 줄을 모르므로 "데오 그라씨아스 형제" 라고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42 년 동안 로마에 있는 수도원에서 애긍 생활을 하였다. 그 덕분에 성 필립보 네리와 성 가를로 보로메오와 막역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많은 고위 성직자들과 귀족들이 그에게 영적인 문제로 조언을 구하기도 하였다. 그가 하느님을 섬기는 방법은 바로 기쁨으로 가득찬 생활을 하는 것이었다. 1587년 로마에서 선종하였고 1712년 시성되었다. (작은형제회홈에서) 그는 아뿔리아의 치따 두칼레 교외인 깐딸리체에서 태어났고, 양친은 신심깊은 농부였다. 그는 어릴적부터 소몰이를 하는 등, 농사 일을 거들었으나, 항상 기도하는 열심한 소년이었다. 성장한 뒤에도 펠릭스는 일하면서 기도하는 등, 매우 높은 차원의 관상 기도를 하였는데, 상당히 오랜 시간을 하느님과 대화하면서 지낼 정도였다. 그리하여 그는 치따 두칼레의 카프친 수도원으로 들어갔는데, 수련기부터 이미 가난과 겸손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그는 수련장에게 간청하여 보속과 금욕을 배로 늘렸다. 그리고 동료 수도자들 뿐만 아니라 깐딸리테의 어린이들도 그를 일컬어 "성인"이라고 불렀다. 30세에 성대서원을 발하였고, 4년 후부터 죽을 때까지 로마에 살면서, 음식을 구걸하는 일을 비롯하여 수도원의 허드레 일을 하면서 생활하였다. 성 필립보 네리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른 이의 고통을 대속하는" 사람이라며 늘 그를 존경하고 사랑하였다. 펠릭스는 무슨 일을 하든지 항상 "천주께 감사"를 연발하고 또 실제로 감사하는 생활을 하였다. 그는 72세의 일기로 운명하였는데, 그날 성모님의 환시를 보았다고 한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16세기는 모든 사람이 다 아는 대로 루터 등이 소위 종교 개혁의 미명하에 여러 가지의 이단설을 주창하고 유럽의 종교계를 수습하기 어려운 혼돈속으로 빠뜨린 비참한 시대였지만, 그 반면에 신대륙 아메리카에는 전교의 개척이 이루어지고, 또한 동양에도 전교가 활발해지는 한편 수많은 성인이 배출되는 등 좋은 현상도 적지 않았다. 성 펠릭스는 그 시대의 성인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1515년 이탈리아의 움부리아 주의 칸탈리체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불행하게도 가정이 어려웠으므로 통학할 수도 없었고, 소년 시절에는 목동으로서 아버지의 가축을 지키며 지내고, 청년이 되어서는 어느 대 농가의 일꾼으로 살게 되었다. 그러한 관계로 교리같은 것도 별로 연구한 적이 없었으나 신앙심이 유난히 깊었고 아름다운 대자연을 연상하고서는 그 창조주이신 하느님을 진심으로 숭배 찬미하고, 또한 큰 나무 기둥에 십자가의 모상을 파고 그 앞에서 혹은 묵상하고 혹은 주님의 기도, 성모송, 사도신경 등 외울 수 있는 기도는 모두 바치고 있었으나, 그 중에도 특별히 좋아한 것은 예수 수난에 대한 묵상이었다. 그런데 그는 어느 날, 은수자의 전기를 읽고 매우 감동하여 자신도 그들처럼 깊은 산속에 들어가서 속세를 떠나 고행을 하려고 생각하고 어느 동료에게 이를 말했다. 그랬더니 그 동료가 말하기를 "아니다. 마음만 있으면 특별히 산속에 들어가지 않아도 된다. 치타 두칼레에 있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시작한 카푸친 수도원에 들어가기만 해도 충분히 네 목적을 달성할 수가 있을 것이다":하고 가르쳐 주었으므로 그는 즉시 그 말을 따라 그 수도원을 방문하고 원장에게 받아줄 것을 간청했다. 그래도 원장은 펠릭스에게 과연 하느님의 성소가 있는가 없는 가를 세밀히 관찰하고 맨 나중에 유혈이 낭자한 그리스도 십자가상을 보이면서 "수도자가 되면 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지 않으면 안 되는데, 당신에게 그만한 결심이 있습니까?"하고 물어보자, 그는 "제가 고행 이외에 아무것도 원치 않는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잘 아실 것입니다"하고 대답했다. 그때 그의 얼굴에는 극히 열성적인 기색이 보였으므로 원장도 드디어 그를 수련자 중의 하나로 받아 주었다. 펠릭스는 30세로서 수련을 마치고 곧 로마에 파견되어 구걸하러 다니는 임무를 맡았다. 그리고 이것은 그가 죽을 때까지 계속한 일이었다. 그는 영원한 도시라고 불리는 로마의 네거리나 가로를 매일같이 돌아다니며 사람들의 온정에 호소하면서 수도원의 일용품을 거두고 은인을 위해서는 진심으로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그가 길을 걸을때에는 손에 묵주를 굴리며 눈은 경건하게 밑으로 뜨고 마음은 높이 하늘로 올라가 있었다. 그리고 자선의 표시를 받았을 때는 반드시 "하느님께 감사합니다"라는 말로 감사의 뜻을 표시하는 것이 상례였다. 그는 은인에 대해서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었다. 때로는 "게으름뱅이!" 혹은 "거지!"라는 등 저주를 하는 사람이 있을 때도 그는 온순히 "하느님께 감사합니다"하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중에는 시민들에게 "하느님께 감사합니다"라는 별명으로 유명해졌다. 아이들은 곧잘 재미로 그의 뒤를 졸졸 따르면서 소리를 맞추어 "하느님께 감사합니다. 하느님께 감사합니다!" 하고 놀려댔다. 그러나 펠릭스는 조금도 언짢게 생각지 않고 오히려 웃으면서 그들과 하나되어 "하느님께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거듭하곤 했다. 그는 어떤 때에 장상으로부터 자선 받은 것의 일부를 빈민에게 희사해도 좋다는 허가를 들으면, 매일같이 드라스데베르의 빈민굴을 찾아가 금품을 주며 가난한 이를 돕기도 하고, 사랑의 말로써 고민하는 이를 위로하기도 했다. 그 뿐 아니라 틈만 있으면 병자를 방문하여 친절히 간호도 해 주고 때로는 선종의 준비도 시켜주고, 밤에는 종종 수도원의 성당에 가서 감실앞에 무릎꿇고 불쌍한 죄인들을 위해 열심히 주님의 은총과 자비하심을 청했다. 펠릭스의 성덕은 차츰 로마 시민들 사이에 퍼졌고, 그가 가는 곳마다 환영을 받게 되었지만 조금도 교만한 기색이 없이 늘 자신을 ’카푸친 수도원의 당나귀’라는 천한 말로 불렀다. 그는 세속 학문에 대해서는 그리 중요시하지 않았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로써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어느 날 변호사를 방문하여 그의 호화로운 도서실을 구경하게 된 펠릭스는 "선생은 대단히 많은 책을 가지고 있으나 무엇보다도 십자가라는 책을 읽지 않으면 도리어 영혼에게 해로운 것을 배울 수밖에 없을지도 몰라요"하고 충고하고는 "내가 배운 글자는 붉은 자 다섯 자, 흰 자 하나, 도합 여섯 자밖에 없어요"하고 말했다고 한다. 여기에서 다섯 붉은 자란 것은 주님의 수난의 상징인 오상을 의미하고 하나의 흰자란 것은 순결한 동정 성마리아에 대한 신심을 말하는 것이다. 실제로 그의 성모께 대한 신심은 대단해 그의 임종이 다가왔을 때 성모께서 성사를 안고 마중나오셨다는 전설까지 남아있다. 즉 임종할 시기가 가까워오자 그는 희열에 충만된 얼굴을 벽 쪽으로 향하고 미소를 띄우면서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곁의 사람이 이상하게 생각하고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하고 물어보니까, 그는 "나는 당신들이 아직 볼 수 없는 것을 보고 있지요"하고 대단히 기뻐하면서 대답한 뒤 곧 고요히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그는 1587년 5월 18일, 그의 나이 73세에 이 세상을 떠났다. (대구대교구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