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Lord/† 聖人들의 삶을 통해서

선교의 수호자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대축일 (10월 1일)

ohjulia 2007. 10. 1. 06:43


** 선교의 수호자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대축일
(Therese of the Child Jesus, the Little Flower,
the Little Flower of Jesus )**

고향으로
      
    성인의 활동지역  리지외(Lisieux)  
    성인의 활동연도  1873-1897년  
    성인과 같은이름  테레사, 테레시아  
    ’작은 여왕’, ’소화데레사’라는 애칭으로 널리 불리우는 데레사 성녀는  
    프랑스의 알랑송에서 시계 제조업을 하던 루이 마르탱과 젤리 궤렝의 딸로 
    태어났으며 그녀의 원래 이름은 마리 프랑스와 테레즈(1873-1897년)였다.
    1888년 아직 어린 데레사는 노르망디의 리지외에 있는 가르멜 수도원에 
    들어가 평범한 생활을 하였다. 
    이미 이곳에는 그녀의 두 언니도 수녀로 있었다.
    9년 동안의 가르멜 생활은 다른 자매들과 견주어 볼 때 독특한 면은 거의 없고, 
    그저 평범한 생활이었다. 
    일상적인 기도와 일, 자만심에서 기인한 과오, 극복해야 했던 고집스런 성격 및 
    내외적인 갖가지 시련을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그리고 그 사랑을 위해서 
    ’작은 길’을 용감하게 개척하며 전진해갔던 것이다.
    데레사는 겸손과 복음적 단순성과 하느님에 대한 굳은 신뢰심을 익히고,
    말과 행동으로 모범을 보이며 이 같은 덕행을 수련자들에게 가르쳤다.
    데레사 성녀는 죽기까지 영혼들을 구원하고,
    교회를 새롭게 하고, 선교 지역에서 신앙을 전파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데에 온 힘을 다하였다
    그녀는 24세의 일기로 많은 고통을 당한 후 선종하였다. 
    1895년 초, 데레사 수녀는 자신의 어린시절을 회상한 글을 쓰도록 
    지시를 받았고, 그후에 또 다른 생활 기록을 첨가하였는데, 
    이것이 저 유명한 "한 영혼의 이야기"이다.
    ’한 영혼의 이야기’는 데레사가 비범한 한 거인이었음을 증명하였다.
    사실은 이 책이 리지외의 데레사 공경이 급속도로 퍼져나가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성녀는 1925년에 시성되었으며, 봉쇄구역 안에서 영혼들의 구원과 
    교회의 쇄신 그리고 선교지역을 위한 놀라운 기도로 지낸 생애를 
    기리기 위해 교회는 그녀를 포교 사업의 수호자로 모시고 특별한 공경을 
    드리고 있다.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24년의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겸손하고 
    온유하였으며 꿋꿋하고 위대한 영혼을 지녔다.
    그는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사랑에 자신을 오롯이 바쳤고,
    그를 온통 휘감았던 어둠 가운데서도 순명 정신으로 주님께 충실하였다.
    그러기에 그는 처음 각혈을 하였을 때, 주님과 만날 때가 다가왔다는 
    예고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리고 믿음과 희망의 절정에 이르렀다.
    그는 1897년 9월 30일 숨을 거두면서 말하였다.
    "오, 저의 하느님, 사랑합니다.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저의 소명, 마침내 저는 그것을 찾았습니다.
    제 소명은 바로 사랑입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교회의 품 안에서 제자리를 
    찾았습니다.
    저의 어머니이신 교회의 심장 안에서 저는 ’사랑’이 될 것입니다."
    그는 이 사랑 때문에 그토록 열렬한 선교 정신을 갖게 된 것이다.
    그가 태어나 자란 알랑송 시절부터 가족들과 함께하였던 리지외 시절과
    15세(1888년)에 가르멜 수녀회에 입회하기까지 줄곧 따른 "작은 길"은 
    참된 복을 향한 참으로 힘겨운 발걸음이었다. 
    겉으로는 맥없어 보일 수 있는 데레사의 삶에서,우리는 아주 강한, 
    그러면서도 성령의 활동에 온전히 자신을 맡기고 예수님의 사랑으로 
    불타며 하느님 아버지를 발견하고 황홀해하는 한 영혼을 발견한다.
    데레사에게 하느님께서는 "자신의 날개를 펴 깃 뿌리에 어린 새끼들을 
    태워 데려가는"(신명 32,11) 독수리와 같은 분이시다. 
    데레사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작은 길"을 따르라고 가르친다. 
    그리고 어머니 팔에 안겨 있는 어린아이처럼 자신의 작음을 깨닫고, 
    믿음을 가지고 하느님께서 끊임없이 베푸시는 자비에 자신을 내맡기라고 
    오늘도 우리에게 웃음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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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 북서부 바스노르망디(Basse-Normandie)의 알랑송(Alencon)에서 
    시계 제조업을 하던 루이 마르탱(Louis Martin)과 젤리 게랭(Zelie Guerin)의 
    아홉 자녀 중 막내딸로 태어난 성녀 테레사(Teresia, 또는 데레사)의 원래 이름은 
    마리 프랑스와즈 테레즈 마르탱(Marie Francoise Therese Martin)이며, 
    소화(小花) 테레사라고도 부른다. 
    그녀는 4살이 채 못 되어 어머니를 여의었고, 아버지와 함께 오빠가 사는 
    리지외로 이사를 하였다. 
    성녀는 어릴 적부터 특히 성모 마리아 신심에 출중했다. 
    7살 때부터 고해성사를 즐겨 받았고, 10살 때인 1883년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3 달 동안 심하게 알았는데, 때로는 경련과 환각을 일으키기도 하였으며 
    의식을 잃기도 하였다. 
    그녀는 ‘미소의 성모상’ 앞에서 기도하던 중 성모님께서 미소 지으면서 이 병이 
    기적적으로 치유되었다고 한다. 
    테레사는 1884년에는 첫영성체를 하고 그 얼마 후에는 견진성사를 받았다. 
       1886년 성탄 전야 미사 직후 ‘완전한 회심’을 체험한 그녀는 자신의 영혼 안에 
    애덕이 넘쳐 드는 것을 체험하였고, 또한 이웃을 위해 자신을 온전히 잊어야 할 
    필요를 깨달았다고 한다. 
    며칠 후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그린 상본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영혼 속에서 불타오르는 열망, 즉 다른 영혼들을 돕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혔다고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에 머무르며 필요한 영혼에게 그리스도의 
    구원의 성혈을 전해 주기로 결심하였다. 
    성탄절에 회심의 은총을 체험한 그녀는 예수 그리스도와 사람들에 대한 
    사랑의 삶을 자신의 소명으로 깨달았다. 
       하느님을 위해 고통당하고 죄인의 회개를 위해 헌신하고 싶은 열망을 지닌 
    테레사는 14세에 리지외의 맨발의 카르멜 수녀원에 입회하기를 청하였다. 
    이 카르멜 수녀원에는 이미 테레사의 두 언니, 마리(Marie)와 폴린느(Pauline)가 
    입회해 있었다. 
    그러나 그 수녀원에서는 테레사에게 21세가 될 때까지 기다리라고 통보하였다. 
    테레사와 그녀의 아버지는 교구의 주교에게 입회를 청하기도 하였고, 
    또 아버지와 언니 셀린느(Celine)와 함께 로마를 순례하면서 교황 레오 13세
    (Leo XIII)에게 개인적으로 수녀원에 입회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청하기도 
    하였다. 
    이때 교황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면 입회하겠지” 하고 대답하였는데, 
    그녀가 1888년 4월 9일 리지외의 카르멜 수녀원에 입회한 것은 
    나이 15세 때였다. 
       그 후 24세의 나이로 죽기까지 9년 반 동안 테레사의 수도원 생활은 
    지극히 평범하였다. 
    다른 수녀들과 마찬가지로 그녀는 성격이 까다롭고 질투심 많은 곤자가의 
    마리아(Marie Gonzague) 원장수녀에 의해서 생긴 공동체의 내부 분열로 
    고통을 당하였다. 
    테레사는 수도원 내부에서 벌어지는 여러 갈등들을 멀리하고, 
    자신의 기도생활에 열중하였다. 
    수도원 규칙에 충실하고 자신에게 부여된 작은 직무들을 충실히 이행하였다. 
    그녀가 이룬 하느님과의 친밀감과 충실성은 그녀의 자서전이 출판되기 전에는 
    그 어느 수녀의 눈에도 띄지 않았다. 
       1893년 테레사는 수련장 서리로 임명되어 4년 간 직무를 수행하였다. 
    이 시기에 그녀는 ‘작은 길’이라는 자신의 고유한 영성을 갖고 살았다. 
    그녀의 ‘작은 길’에는 새로운 것은 없다. 
    오히려 이것은 가장 기본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의 이상으로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따라 
    걸어야 하는 길인 것이다. 
    그것은 어떤 삶의 방법이 아니라 영혼이 하느님 앞에 서서 지니는 
    가장 순수한 태도를 의미한다. 
       죽기 18개월 전에 처음으로 결핵의 증세가 나타났지만, 죽기 얼마 전 
    병상에 눕기까지 테레사는 수녀원의 기본 의무들을 충실히 지켰다.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신앙의 시련을 겪었으며, 
    1897년 9월 30일 “나의 하느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저의 소명, 마침내 저는 그것을 찾았습니다. 제 소명은 바로 사랑입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교회의 품 안에서 제 자리를 찾았습니다. 
    저의 어머니이신 교회의 심장 안에서 저는 ‘사랑’이 될 것입니다.” 하며 
    숨을 거두었다. 
       그녀가 죽은 일 년 후 카르멜 수녀회의 통상 관습대로 그녀의 자서전이 
    비공식적으로 출판되어 여러 카르멜 수녀원에서 읽혀졌고, 이 자서전을 
    요구하는 부수가 점차 늘어나자 공식적으로 이를 출판하였다. 
    그 후 15년 동안 여러 나라 언어로 번역되었고, 세계 여러 나라에 수백만 권이 
    넘게 보급되었다. 
    세계 여러 곳에서 일어난 테레사에 대한 반응은 놀라운 것이었다. 
    교황 비오 11세(Pius XI)는 이 반응을 ‘폭풍과 같은 열광’이라 불렀다. 
    그래서 시성을 위해서는 적어도 사후 50년을 기다려야 하는 교회 관례를 
    무릅쓰고, 교황 비오 11세는 테레사가 죽은 지 28년이 지난 1925년 5월 17일 
    ‘아기 예수의 성녀 테레사’로 선포하였다. 
       테레사는 로마를 순례한 것 외에는 고향인 알랑송을 떠난 적이 없다. 
    그러나 일평생 다른 영혼을 위해 보속하는 삶을 살았기에, 교황 비오 12세는 
    그녀를 성 프란치스코 사베리우스(Frianciscus Xaverius)와 더불어 ‘선교 사업의 
    수호자’로 선포하였다. 
    또한 1944년 5월 3일에는 성녀 잔 다르크에 이어 프랑스의 제2의 수호자로 
    선포하였다. 
    그녀가 남긴 저서로는 “성녀 소화 테레사 자서전”, “성녀 소화 테레사의 
    마지막 남긴 말씀”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