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istianity/† 생활 속의 교리들

“믿을까? 말까?” - 믿음과 신뢰의 양면성

ohjulia 2010. 4. 20. 16:25

세상 속 신앙 읽기 3

 

“믿을까? 말까?” - 믿음과 신뢰의 양면성

 

‘선택’과 ‘결단’. 둘은 비슷한 말인 것 같지만 실상 다른 말이다.

우리가 하루에도 수 없이 갈등하는 “이걸 할까? 저걸 할까?”식의 망설임은

주로 양자택일의 ‘선택’의 기로에 선 우리들의 일상적인 태도이다.

이 경우 선택은 어차피 어느 쪽을 선택하던 자신의 결정이

운명까지 뒤바꿔 놓을 그런 결과를 가져오진 않는 것들이다.

하지만 그렇게 선택한 일들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거나 잘못된 선택이라고 판단되면

우리는 흔히 선택하지 않았던 다른 것에 대해 단순한 후회를 갖거나,

아니면 이내 다른 선택을 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결단’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결단은 선택한 일에 대한 신뢰를 필요로 한다.

결단하는 일 속에 신뢰가 동반되지 않으면 그것은 후회로 끝나지 않을

중대한 삶의 상처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결혼이나 독신은 할 것인가 말 것인가라는 선택의 자유로 정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선택은 일에 대한 가치가 우선이라면, 결단은 선택할 일에 대한 신뢰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내가 결혼을 하면서 나의 인생의 반쪽인 배우자에게 전적인 신뢰를 약속하지 않고

그저 많은 사람들 중에 적당한 한 사람을 선택한 것이라면

그것은 언젠가 결혼 자체에 대한 회의를 동반할 것이다.

만일 내가 독신을 선택하면서 그것이 내 종교적 신념과 확신에 근거하지 않고,

나의 삶의 편의와 취향으로 이루어진 일이라면,

혹은 결혼에 대한 도피처로 선택된 결정이라면 후회보다

더 큰 상처를 입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 결정 뒤에는 대게 보상심리가 작용하기 마련이다.

신뢰 없이 이루어진 나의 선택에 대한 미성숙한 보상심리와

그에 따른 책임 없는 삶의 도피와 같은 것 말이다.

 

신앙은 하나의 결단이다.

그냥 “믿을까 말까?”식의 선택의 논리로 받아들일 성격의 것이 아니다.

신앙은 ‘믿음’이란 인격적 행위에 뿌리를 둔 신뢰에 찬 결단의 태도이다.

누군가를 믿는다는 것, 신뢰한다는 것은 상대방이 내게 신뢰할 만한

객관적인 근거를 주기 이전에 믿는 내가 상대방에게 먼저

신뢰를 보여주겠다는 결단을 해야 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인간은 신뢰를 선사하는 데 늘 인색하다.

속고 속이는 세상 속에서 불완전한 인간을 믿어야 하는

때로 어처구니 없는 모순을 받아들이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교적 신앙은 이런 불완전한 인간의 모순적 태도에 대한 새로운 길이다.

나의 신뢰가 결코 헛되지 않으리라는 희망, 나의 선택이 결코

후회를 낳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져다주는 것이 바로 종교적 신앙이다.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다고 말할 때, 이 말 속에는 “하느님이 계신다”라거나,

“하느님이 믿는 우리에게 구원과 영생을 약속해주신다”라는 식의

진술이 옳다는 것을 믿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만일 그렇다면 누군가가 이러한 우리들의 확신에 혼란을 줄 수 있는

다른 논리와 이야기들로 미혹할 때 우리는 이내 흔들리고 말 것이다.

근래 그리스도교 신앙을 신화처럼 왜곡하는 이야기들,

가령 ‘다빈치코드’나 다큐멘터리 ‘시대정신’ 등은 기초 없이 자라난

대다수의 가톨릭 신자들이 믿어온 교리적 확신의 체계들을 흔들어 놓을 수도 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하느님께 대한 신앙은 하느님을 인격적 신뢰에 찬 결단 속에서

‘당신’으로 믿는 것이다.

비록 지금은 희미하게 볼 뿐이지만 언젠가 “얼굴을 맞대고” 볼 “사랑하는 당신”으로 만나는 것이다.

“하느님이 어떤 분이시더라”는 식으로 듣고 머리로 이해한 사람들은

결코 하느님과의 신비적 만남을 체험할 수 없다.

이해는 인간 이성의 합리적 논리를 자극하고 지적인 복종을 요구할 수는 있지만,

지적인 이해로만 받아들여진 하느님은 나를 변화시키고,

새로운 빛의 체험으로 이끄시는 분이 될 수 없다.

그래서 이해는 체험을 필요로 한다.

삶의 현장에서 뼈저리게 느끼고 공감하고, 곱씹어낸 체험은

하느님의 말씀을 이해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영원하신 당신’으로 체험한다.

그래서 하느님을 체험한 이들은 하느님을 때로 편한 친구처럼,

때로는 사랑 넘친 어머니처럼, 때로는 인자하고 공평하신 아버지처럼 만난다.

 

그러나 이런 믿음과 신뢰에는 또 다른 측면이 숨어 있다.

절대적 확신 속에서 하느님을 섬기고,

그 분께 모든 희망을 거는 신앙의 위대함을 인정하면서도,

나의 확신과 주관적 체험을 절대화하고,

나와 다른 체험을 한 사람들을 흔히 ‘이단’, ‘이교도’로 내모는

근본주의적 태도가 나타날 수 있다.

또는 하느님의 사랑을 너무 보편화해서 어디에서든 하느님은 계시고,

만날 수 있기 때문에 특정 종교를 선택하는 일이 무의미하다고

여기는 범신론적 오류에 빠질 수도 있다.

또 어떤 이들은 종교적 가치를 동일시해서 자기 취향에 맞는 종교적 원리를

취사선택하는 편의주의적 신앙에 빠질 수도 있다.

 

하느님을 믿는 일이 과거처럼 당연한 일이 아닌 우리 세상에

나는 어떻게 하느님을 믿고 있는가?

하느님은 나의 숨결일까, 도구일까?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씀대로 늦게서야 찾아낸 영혼의 안식처인가,

아니면 필요할 때 찾고, 불편할 때 외면하는 편리한 자판기같은 분이신가?

어떤 신앙을 선택하기에 앞서 나는 과연 신뢰에 찬 태도로

하느님을 ‘당신’이라고 부르는 용기있는 결단을 하고 있는 지 물을 일이다.

 

 

송용민 사도요한 신부

(인천교구 사제/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