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istianity/† 생활 속의 교리들

죽음, 그 뒤에는 무엇이 오나요?

ohjulia 2010. 11. 17. 14:39

죽음, 그 뒤에는 무엇이 오나요?

 

 

죽음은 하나의 신비이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죽음과 사후세계에 대한 체험을 다양한 방식으로 전해주고 있지만, 모든 인간은 죽음의 경험이 무엇인지, 죽음 이후에는 무엇이 오는지 궁금해 한다. 그리스도인들도 예외는 아니다. 부활을 기대하고 고백하는 신자라고 무조건 교회가 가르치는 것을 그대로 믿기에는 뭔가 석연치 않은 점들이 많기 때문이다. 특히 죽음과 사후 일어날 사건들에 대한 교회의 전통적인 교리들은 성경과 교회 교부들의 가르침에 근거한 믿을 교리에 속하지만, 그렇다고 교리가 곧바로 내게 믿고 납득할 만한 진리가 되는 것은 아니다. 내게 살아 있는 진리가 되려면 그것이 내 삶의 언어로 재해석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일단 내가 죽는 상상을 한 번 해보자. 대중매체나 책을 통해 우리에게 각인된 사후의 세계는 이렇다. 내가 죽으면 영혼이 육신으로부터 이탈된다. 그리고 나의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내 영혼은 절대자의 심판을 기다린다. 그것이 염라대왕이든, 지옥사자이든 전통적인 민간신앙에서 각인시켜온 죽음의 과정 말이다. 나는 내가 살았던 행적에 따라서 심판을 받고, 이 세상에서는 상상해보지 못한 최상의 천국으로 가거나, 불길이 치솟는 지옥불에 떨어질 수도 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죄의 보속을 위한 연옥도 있지만, 연옥이라고 결코 만만한 곳도 아니다. 민간신앙에서는 원한을 품고 죽으면 저승에 가지 못해 구천을 떠도는 귀신이 된다고 하지만, 그리스도교에는 그런 귀신에 대한 믿음이 없다. 그래도 조상신에 대한 믿음이나, 죽은 영혼들과의 접신, 우리가 볼 수 없는 세상의 또 다른 죽은 자의 도시가 있다는 상상들은 다른 형태의 믿음일 뿐이다.

 

유감스럽게도 이런 죽음에 대한 상상들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그다지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죽음 이후는 단순히 호기심의 대상이기 이전에, 나의 생의 의미를 종결짓는 최종적이고 궁극적인 사건이자, 새로운 생(生)으로 들어가는 관문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새로운 생이란 우리가 믿고 고백하며, 간절히 바라는 하느님의 현존을 ‘얼굴을 맞대고’ 직접 보고 맛보는 새로운 차원의 생을 말한다. 이것을 그리스도교는 ‘부활한 삶’, ‘구원의 완성’이자 ‘영원한 생명(永生)’이라고 부른다. 사심판이나 공심판, 지옥, 연옥, 천국의 교리는 모두 이러한 근원적인 믿음을 해석해주는 언어적 표현들이다.

 

그리스도인의 궁극적인 목표는 하느님을 뵙는 것이다. 하지만 하느님은 우리가 세상에 살고 있는 한 직접 만날 수 있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단지 보고 들을 수 있는 표징들을 통해서 희미하게 ‘체험’할 뿐이다. 그렇다면 죽음은 더 이상 표징을 통하지 않고 하느님의 현존과 그 분의 섭리를 명료하게 만나는 사건일 뿐이다. 사후의 심판이란 것도 하느님 앞에 서는 것 자체를 말한다. 문제는 내가 하느님을 만날 때 얼마나 기대와 감사, 찬미와 영광 속에서 만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토록 간절히 기대하던 하느님을 직접 뵙는다는 것은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지극한 복됨(至福)의 체험이다. 그것은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천국(天國)과 다름이 없다. 하지만 하느님의 현존을 바라보면서도 그 분을 가까이 할 수 없는 절대적 나락의 상태가 있을 수 있다. 그것은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이자 영원한 관계의 단절 체험이다. 지옥불에서 타는 영원한 고통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가톨릭 교리에서 연옥이 존재하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 때문이다. 비록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이지만, 그 분을 직접 마주보는 것이 고통스러울 때 하느님을 우리를 기다려주신다. 마치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죄를 지어 가까이 다가서고 싶지만 스스로의 용기로는 다가설 수 없을 때 나에게 용기를 주고, 격려해주는 이웃의 힘으로 용서와 화해의 체험을 하듯이, 연옥이란 하느님을 뵙기에 부족한 나에게 정화의 필요성을 뜻하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중요한 점은 이러한 영원한 상태의 체험들을 우리가 살면서도 부분적으로 맛볼 수 있다는 것이다. 천국처럼 아름다운 체험이 있을 수 있고, 지옥과 같은 생의 고통을 맛볼 수도 있다. 그리고 가슴을 조이며 용서를 기다리는 연옥의 떨림도 체험할 수 있다. 단지 이런 체험들이 세상에서는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이 사후의 심판과는 다를 뿐이다.

 

종말에 관한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들은 하느님이 세상의 역사와 모든 것을 섭리하신다는 근원적 믿음에 뿌리를 두고 있다. 성경에서 우리에게 알려진 모든 종말의 이야기도 사실은 하느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듯이 당신이 우리 개인의 역사와 인류의 역사를 궁극적으로 완성하신다는 믿음을 다양한 표징들을 통해 전달한 것뿐이다. 문제는 죽음 이후가 우리의 체험 범주를 벗어나기 때문에 시대마다 달라지는 이 표징들의 해석에 따라 그 의미에 대한 이해도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죽음 이후는 하느님의 섭리에 맡겨져 있다. 단지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 깨닫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은 죽음보다 더 강한 희망, 부활한 삶에 대한 믿음이 있다는 것이다. 세상의 고통, 부조리, 모순과 절망을 넘어 하느님께 거는 강한 희망이 죽음을 넘어 우리를 살게 한다는 점이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여러분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힘쓰십시오’(필립 2, 12)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은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로서 누리는 영광을 이 세상에서 미리 맛보지 못한다면 결코 죽음 이후에 누릴 수 없다는 경고이기도 하다.

 

우리에게는 죽음의 공포와 세상이 상상하는 종말에 대한 호기심에 매달리기보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열정을 쏟는 일이 더 중요할 듯싶다. 그래서 위령성월은 우리의 공덕이 연옥 영혼에게 이른다는 믿음과 삶과 죽음이 모두 하느님께 달려있음을 고백하는 시기였으면 좋겠다.

 

 

송용민 신부

(인천가톨릭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