헝가리의 성 스테파노 (St. STEPHEN of Hungary) 왕
축일 : 8월 16일
성인의 활동지역 : 헝가리(Hungary)
성인의 활동연도 : 970?-1038년
성인과 같은이름 : 스테파누스, 스테판
성인들 중에는 왕후(王侯)출신도 많은데, 그 중에서도 유명한 성인 중의 한 분은
헝가리의 왕 성 스테파노이다.
당시의 헝가리는 아직 그리스도교를 몰랐고, 오스트리아와 독일 원정에만 급급하여
933년 및 955년의 두 번에 걸쳐 대패를 당했다.
헝가리에 그리스도교가 비로소 전래된 것은 바로 이 시기였으며, 우선 국왕 체살
자신도 그리스도교를 믿기는 했으나 완전한 신자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아들 와이에는 매우 경건하고 신앙심이 깊은 신자였으므로 헝가리가
그리스도교국이 된것은 실로 이 분의 힘이라 할 수 있다.
스테파노는 와이에의 영세 이름이다.
아버지 체살은 997년에 서거했는데, 임종때 국내 중신들을 모으고 자기의 계승자로
와이에를 국왕으로 추대하여 이에 충성을 다할 것을 간곡히 유언했다.
일동은 숙연하게 그의 말씀대로 할것을 맹세하고, 그 후 와이에를 국왕으로 받들었다.
스테파노는 어려서부터 그의 성덕의 일면을 보였다.
그의 깊은 신앙은 전국민이 그리스도교를 믿도록 노력한 데서도 엿보이는 것이며,
그의 인내와 유화함과 견인 불발(堅忍不拔)의 모든 덕은 오로지 그 신앙심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더구나 그는 교양이 높은 분이며 성서에 대해서는 특별히 정신을 기울여 연구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성인도 정의의 칼을 들지 않으면 안 될 사건이 일어났다.
즉 왕이 그리스도료를 국교로서 공포함에 반대해 2, 3명의 영주(領主)들이 반란을
기도한 것이다.
스테파노 왕은 우선 하느님께 열심히 기도를 바치고 특히 성모 마리아의 도우심과
성 루치오의 전구를 간구하고 난 후 출정해 대승리를 거두고 돌아왔다.
그는 패군의 장병에게도 대단히 관대한 처분을 내렸다.
그리고 그 후에도 여려 번 칼을 들지 않으면 안 될 경우도 있었지만,
그럴때마다 그는 은인자중(隱忍自重)하며 가능한 한 평화로이 해결하려 했다.
당시 독일의 황제 하인리히 2세의 여동생 지셀라(Gisella)를 왕비로 삼고 서로 격려해
신심과 수덕에 매진했으며,교회와 수도원을 건축하고 빈민에게 많은 자선을 베풀었다.
그의 특별한 주보는 성모 마리아였다. 왕은 전국민이 성모를 공경하도록 장려했으며,
성모 승천 대축일을 국경일로 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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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 게자 대공과 그의 아내 아델라이데의 아들로 태어난 바이크(Vaik)는
10살 때에 세례를 받고 스테파누스(Stephanus, 또는 스테파노)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그는 훗날 하인리히 2세 황제가 된 바이에른(Bayern) 공작의 누이동생인 기셀라와
결혼했고, 997년 그의 아버지가 사망하자 마자르족(Magyars)의 통치자로 군림하였다.
그는 일련의 그리스도교적인 정책을 펼쳐 성공을 거두었고,
1001년에는 헝가리의 왕으로서 대관식을 거행하였다.
성 스테파누스 왕은 성 아달베르투스(Adalbertus)의 지도하에 교계제도를 구성하였고,
교회 재건을 기하였으며, 온 나라를 평화롭고 지혜롭게 다스렸다.
헝가리 국가를 창건하고 그리스도교화 시킨 최초의 헝가리 왕인 그는 1083년에
그레고리우스 7세(Gregorius VII)로부터 시성되었고,
유해는 부다페스트의 성모 성당에 안장되어 공경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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