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ily/★ 빠다킹 신부님과 새벽을..

용서할 수 없다면, 용서받을 생각도 하지 말자.

ohjulia 2005. 9. 11. 14:00
2005년 9월 11일 연중 제24주일 가해

제1독서 집회서 27,33─28,9
원망과 분노는 가증스러운 것이니 죄인이 좋아하는 것이다.
보복하는 자는 주님의 보복을 받을 것이며, 주님께서 그의 죄를 엄격히 헤아리실 것이다.
이웃의 잘못을 용서해 주어라. 그러면 네가 기도할 때에 네 죄도 사해질 것이다.
자기 이웃에 대해서 분노를 품고 있는 자가 어떻게 주님의 용서를 기대할 수 있으랴? 남을 동정할 줄 모르는 자가, 어떻게 자기 죄에 대한 용서를 청할 수 있겠는가? 자기도 죄짓는 사람이 남에게 원한을 품는다면, 누가 그를 용서해 주겠는가? 네 종말을 생각하고 미움을 버려라. 한 번은 죽어 썩어질 것을 생각하고 계명에 충실하여라.
계명을 생각하고 네 이웃에게 원한을 품지 마라. 지극히 높으신 분의 계약을 생각하고 남의 잘못을 눈감아 주어라.


제2독서 로마서 14,7-9
형제 여러분, 우리들 가운데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사는 사람도 없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 죽는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해서 살고 죽더라도 주님을 위해서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아도 주님의 것이고 죽어도 주님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자의 주님도 되시고 산 자의 주님도 되시기 위해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복음 마태오 18,21-35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와서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 하고 묻자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
하늘나라는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어떤 왕이 자기 종들과 셈을 밝히려 하였다. 셈을 시작하자 일만 달란트나 되는 돈을 빚진 사람이 왕 앞에 끌려왔다.
그에게 빚을 갚을 길이 없었으므로 왕은 ‘네 몸과 네 처자와 너에게 있는 것을 다 팔아서 빚을 갚아라.' 하였다.
이 말을 듣고 종이 엎드려 왕에게 절하며 ‘조금만 참아 주십시오. 곧 다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애걸하였다. 왕은 그를 가엾게 여겨 빚을 탕감해 주고 놓아 보냈다.
그런데 그 종은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밖에 안 되는 빚을 진 동료를 만나자 달려들어 멱살을 잡으며 ‘내 빚을 갚아라.' 하고 호통을 쳤다.
그 동료는 엎드려 ‘꼭 갚을 터이니 조금만 참아 주게.' 하고 애원하였다. 그러나 그는 들어주기는커녕 오히려 그 동료를 끌고 가서 빚진 돈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어 두었다.
다른 종들이 이 광경을 보고 매우 분개하여 왕에게 가서 이 일을 낱낱이 일러바쳤다.
그러자 왕은 그 종을 불러들여 ‘이 몹쓸 종아, 네가 애걸하기에 나는 그 많은 빚을 탕감해 주지 않았느냐? 그렇다면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할 것이 아니냐?' 하며 몹시 노하여 그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그를 형리에게 넘겼다.
너희가 진심으로 형제들을 서로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실 것이다.”





성지에서 생활을 하다보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습을 많이 발견하게 됩니다. 쓰레기를 아무데나 버리는 사람, 옆에서 기도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크게 웃고 떠드는 사람, 버너를 사용할 수 없다고 말을 해도 구석진 곳에서 고기를 구워서 소주와 함께 드시는 분, 등등……. 그러면 화가 나고, 괜히 미워집니다. 얼굴을 붉히지 않고, 좋은 말로 이야기하자는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지요. 하지만 몇 번을 이야기해도 전혀 소용이 없을 때, 더군다나 오히려 다른 성지에서는 안 그런데 왜 여기는 깐깐하냐고 말씀하시면서 화를 내시면 저 역시 성인이 아니기 때문에 화가 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속으로 말하지요.

‘아니, 저렇게 몰지각한 사람이 어디에 있어?’

그런데 얼마 전에 어떤 신부님에게 이런 소리를 들었답니다.

“조 신부, 왜 이렇게 신자들에게 쌀쌀맞게 굴어?”

저는 그 몰지각한 사람들이 그 신부님께 가서 일렀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목소리를 높이어서 이런 사람들이 어디에 있냐면서 신부님께 말씀을 드렸지요. 그런데 신부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세요.

“내가 말한 사람은 그런 사람들이 아닌데……. 다름이 아니라, 조신부의 새벽 메일을 보던 사람인데 성지에 가서 조신부를 보았고, 너무나 반가워서 ‘신부님~~·’하면서 신부님 앞으로 갔는데, 신부님께서는 이상한 사람 보듯이 쳐다보면서 성의 없이 ‘안녕하세요~’라고만 이야기했다고 하더구만. 그 신자가 얼마나 반가웠으면 그랬겠나. 그때 좀 친절하게 굴면 얼마나 좋아?”

제가 오해를 했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또 한 가지를 알게 되었답니다. 저는 저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 또한 성지의 몰지각한 사람에 대해서만 생각을 했지, 내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있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마 많은 분들이 생활하면서 이런 체험들을 자주 하지 않을까 싶어요. 나에게 상처와 아픔을 주는 사람들... 그 사람들에 대해서 우리들은 힘주어서 말합니다.

“아니 내게 어쩌면 저럴 수가 있어? 사람이 되어가지고 어떻게 저런 행동을 할 수 있단 말이야. 나는 저런 사람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어.”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우리는 내 자신을 다시금 되돌아 봐야 합니다. 나를 두고서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없을까요?

저 또한 마찬가지지요. 사실 처음 보는 사람을 몇 십 년 만난 친구처럼 대한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앞선 그분을 보고서 그저 가벼운 목례만 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저의 그 성의 없는 인사로 저는 잘 몰랐지만, 그분께서는 상처를 받으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나만 아픔과 상처를 받는 것이 아니라, 나 역시 그 아픔과 상처를 많은 사람들에게 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주었던 그 아픔과 상처에 대한 용서를 상대방에게 청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나 그 전에 나에게 준 그 아픔과 상처에 대한 용서를 기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제1독서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도 죄짓는 사람이 남에게 원한 을 품는다면, 누가 그를 용서해 주겠는가?”

주님께서도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고 말씀하심으로써, 내가 먼저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십니다.

지금 내 자신은 어떤가요? 내가 용서를 해야, 나의 죄 역시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용서할 수 없다면, 용서받을 생각도 하지 말자.



신부님과 과부 이야기('좋은 글' 중에서)

한 신부님이 젊은 과부 집에 자주 드나들자, 이를 본 마을 사람들은 좋지 않는 소문을 퍼뜨리며 신부를 비난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그 과부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제서야 마을 사람들은 신부가 암에 걸린 젊은 과부를 기도로 위로하고 돌보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가장 혹독하게 비난했던 두 여인이 어느 날 신부를 찾아와 사과하며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러자, 신부는 그들에게 닭털을 한 봉지씩 나눠주며 들판에 가서 그것을 바람에 날리고 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닭털을 날리고 돌아온 여인들에게 신부는 다시 그 닭털을 주워 오라고 하였습니다.

여인들은 바람에 날려가 버린 닭털을 무슨 수로 줍겠느냐며 울상을 지었습니다. 그러자, 신부는 여인들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했습니다.

나에게 용서를 구하니 용서 해주는 것은 문제가 없으나, 한 번 내뱉은 말은 다시 담지 못합니다. 험담을 하는 것은 살인보다도 위험한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살인은 한 사람만 상하게 하지만 험담은 한꺼번에 세사람을 해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첫째는 험담을 하는 자신이요,

둘째는 그것을 반대하지 않고 듣고 있는 사람들이며

셋째는 그 험담의 화제가 되고 있는 사람입니다.

남의 험담을 하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의 부족함만 드러내고 마는 결과를 가져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