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으로 , 성 프란치스코 보르지아](http://saint.catholic.or.kr/pict/2861.jpg)
성 프란치스코 보르지아(St. Francis Borgia) 신부 , 총장
축일 : 10월 10일
성인의 활동지역 : 아라곤(Aragun)
성인의 활동연도 : 1510-1572년
성인과 같은이름 : 보르자, 프란체스꼬, 프란체스꾸스, 프란체스코, 프란체스쿠스,
프란치스꼬, 프란치스꾸스, 프란치스쿠스, 프랜시스
성 프란치스코 보르자(Franciscus Borgia, 또는 프란체스코)는 간디아(Gandia)의
세 번째 공작인 후안(Juan)과 아라곤의 페르디난도 5세의 비합법적인 딸인
후아나(Juana)의 14명의 자녀 중 맏이로 에스파냐의 발렌시아(Valencia) 근교
간디아에서 태어났다.
에스파냐 발렌시아 출생의 귀족 가문인 보르자가의 후손인 그는 사라고사(Zaragoza)의
대주교인 아저씨 밑에서 공부하였으며, 1528년에는 카를로스 5세(Carlos V)의 궁중
자문위원이 되었다.
1529년 그는 엘레아놀 데 카스트로(Eleanor de Castro)와 결혼하였고,
카를로스의 고문으로 10년을 봉직하다가 부친이 사망한 1543년부터 간디아의 공작 지위를
승계하였다.
1546년 그의 아내가 8명의 자녀들을 남기고 사망했을 때 그는 수도생활을 추구하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1548년에 예수회에 입회하려고 결정하였다.
1550년에 그가 로마(Rome)로 갔다가 다음 해에 자신의 재산 상속 문제로 에스파냐로
돌아왔다. 그 이후 그는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는 에스파냐와 포르투갈로 설교 여행을 다녔는데, 그의 설교에는 수많은 군중들이
모이기가 일쑤였다.
1554년 그는 로욜라(Loyola)의 성 이냐시오(Ignatius)에 의해 에스파냐 예수회의
총대리로 임명되었다.
프란치스코는 수많은 수도원과 대학 그리고 건물들을 세웠으며,
1565년에는 예수회의 총장으로 선출되었다.
7년 동안 총장직에 재임하는 동안 그는 예수회를 가톨릭 개혁운동의 기수로 만들었으며,
외국 선교사업에 예수회의 참가를 독려하고, 그레고리안 대학교 설립의 책임자 중의
한 사람이 됨은 물론 폴란드 관구 설정, 프랑스의 대학 설립, 아메리카 선교 개시 등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
1567년 그는 예수회의 회칙을 개정하였고, 1571년에는 보넬리(Bonelli) 추기경을 수행하여
에스파냐 전역을 선교 여행하다가 로마로 돌아온 지 이틀 만인
1572년 9월 30일에 운명하였다.
예수회를 그토록 왕성하고 생기 있는 수도회로 만든 이유 때문에, 그는 흔히 제2의 설립자
로 불린다.
그는 1671년 교황 클레멘스 10세(Clemens X)에 의해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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