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걷다 마주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마주치는 들꽃들과 마주치는 바람, 햇살, 나무, 오름, 바다 그리고 풀숲에서 낯선 이방인의 발자국 소리에 깜짝 놀라 '푸드덕' 날아가는 산새와 곤충들 모두 정겹다.
길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제주의 나지막한 풀숲을 따라 난 길들을 따라 걸어가다 보면 막다른 길에 다다를 때가 있다. 돌담으로 둘러쳐진 밭이거나 무덤이거나 그 작은 길 끝에도 사람들의 흔적이 있다. 아무리 나지막한 풀숲이라도 억새가 우거져서 웬만한 인내심을 갖지 않고는 걸어갈 수가 없다. 끝에서 다시 온 길을 돌아오는 길에도 생소하게 다가와 내가 걸어왔던 길처럼 보이지 않는다.
제주는 요즘 감자를 놓느라 한창 분주한 날들을 보내고 있다.
고슬고슬하게 갈아놓은 밭들마다 감자를 놓느라 이른 새벽부터 여념이 없다. 올 여름에는 날씨가 너무 더워 보관해 놓았던 감자씨앗들이 절반은 썩어버렸다며 속상해하면서도 고르고 또 골라 감자를 심는다.
'이만큼이라도 남은 것이 다행이쥬.'
감자농사를 짓는 분들을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그들의 속내를 금방 알 수 있다. 그렇게 순진하게 살아서 어떻게 할까 싶을 정도로 그들의 꿈은 순박하다. 말인즉슨 농사져서 빚만 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땀 흘린 대가는 고사하고 빚만 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도 그렇지만 풍년이 들어도 풍년이 든 대로 농산물 값이 하락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농사짓는 모든 분들이 풍년들었으면 좋겠단다.
그들에게는 나 혼자만 잘 먹고 잘 살겠다는 이기적인 욕심이 없다. 더불어 사는 맛을 아는 사람들 같다. 그런데 어쩌면 이 분들이 걸어가는 그 길은 남들이 다 걸어가는 그 길이 아니라 좁은 길이다.
여행길에서 비포장의 길을 만날 때가 있다.
누군가 걸어갔기에 우거진 풀 사이로 드문드문 길의 흔적이 남아있는 그런 길이 있다. 그런 길을 새벽에 걷다보면 신발이며 바짓가랑이가 이슬에 젖어 축축하다. 그 ‘아쌀한’ 시원함이 발밑에서부터 온 몸에 전해지고, 다른 풀들 보다 더 높게 고개를 쳐들고 꽃을 피우는 가을꽃들이 작은 바람에도 흔들린다.
천천히 걸을 수밖에 없는 길이기에 보이는 것도 많고, 보여지는 것이 많으니 더 느릿느릿 걸어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길을 돌아 나오면 문명의 이기인 자동차를 타고 더 먼 길을 돌아온 것보다도 더 많은 것들을 만나게 된다.
우리의 삶도 그렇지 않을까 싶다.
남들이 다 가는 그 길, 남들도 다 가고 싶어 하는 그 길은 넓은 길이다. 너도나도 넓은 길을 가려하니 아무리 그 길이 넓다고 해도 미어터질 수밖에 없다. 너도나도 그 길에 모여 있으니 남의 눈을 의식하게 되고, 누군가 나를 쫓아오기라도 할라치면 숨이 차도 더 급한 걸음걸이로 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숲길에 서면 좁은 길이라도 넉넉하다. 남을 의식할 필요도 없으니 쉬었다 가기도 하고, 가장 편안한 속도로 가면 그만이다. 설령 누군가 내 앞에서 또는 뒤에서 그 숲길을 걷는 다해도 그저 '안녕!'하고 눈인사를 나누면 된다. 그리고 그 눈인사 끝에 정겨운 대화를 나누며 오붓한 길 어깨를 맞대고 걸어갈 수도 있는 것이다.
길을 걷는 아낙을 만났다.
어깨에는 어디에 쓸 용도인지 모를 기다란 나무를 어깨에 둘러메고 한 손에는 삽을 들었다. 천천히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이 그 옛날 어머님의 모습이요, 할머니의 모습 같아서 '들어다 드릴까요?'해 보지만 '고맙쑤다게'하며 웃어주는 웃음만 얻어온다.
그 전에도 그런 경험이 있었다. 무척이나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할망에게 내가 들어다 준다는 것도 아니고 차에 실어다 준다는 것인데도 한사코 마다하는 바람에 나는 그 할망을 지나쳐 올 수밖에 없었다. 그냥 그렇게 구부정한 작은 몸을 짓누르는 듯한 무거운 짐을 지고 터벅터벅 걸어가는 그 할망의 뒷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 할망이 걸어간 그 길, 그 길을 따라 가다보면 할배가 기다리는 집이 있을까 아니면 할배도 없이 홀로 살기에 마당에 '털썩!' 주저앉듯 짐을 내려놓고 대충 씻고 찬밥에 물 말아 훌훌 허기를 채우고는 피곤한 몸을 쉬는 그런 집일까….
나는 어떤 길을 걸어가고 있는가?
자신 있게 좁은 길이라고 말하지 못한다. 그리고 좁은 길만이 능사가 아니라 넓은 길을 걸어가야 할 사람들도 있기에 어느 길을 걸어가는 것이 더 좋다 나쁘다 할 수도 없다. 그러나 어떤 길을 걸어가도 그냥 남들이 가니까 나도 가는 그런 길은 걷고 싶지 않다.
그렇다고 개척자처럼 길을 내면서 살아가겠다는 것도 아니다. 그 누군가가 걸어갔던 길, 그러면서도 많은 이들이 가지 않아 길 같아 보이지 않는 그런 길을 걸어감으로 인해서, 내가 걸어간 만큼 길의 흔적이 남아지는 그런 길을 걷고 싶다.
이 가을에 남들이 걷지 않는 길을 향해 한 걸음 내딛어야겠다.
오마이 뉴스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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