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으로 , 성 안토니오 마리아 클라렛](http://saint.catholic.or.kr/pict/1640.jpg)
성 안토니오 마리아 클라렛 (St.Anthony Mary Claret)
설립자 , 대주교
축일 : 10월 24일
성인의 활동지역 : 산티아고데쿠바(Santiago de Cuba)
성인의 활동연도 : 1807-1870년
성인과 같은이름 : 안또니오, 안또니우스, 안토니우스, 앤터니
성 안토니우스 마리아 클라렛(Antonius Maria Claret, 또는 안토니오)은
에스파냐 카탈루냐(Cataluna) 지방의 비크(Vich) 교구 관할인 살렌트
(Sallent)에서 직물공의 아들로 에스파냐에서 태어나 1835년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5년 후부터 그는 카탈루냐 전역을 다니며 사목하고 피정을 지도하였다.
그 후 그는 보다 큰일을 해보려고 1849년 7월 16일 다섯 명의 사제들을 모아
설교 활동을 하는 수도회를 세웠는데, 지금은 이 회를 클라렛 선교 수도회
(Claretian missionaries) 라고 부른다.
다음 해에 그는 에스파냐의 이사벨 2세(Isabel II) 여왕의 요청으로 산티아고데쿠바의
대주교로 선임되었다. 이 교구의 주민들은 흥분된 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클라렛의 엄격하고 세심한 개혁 운동은 많은 파란을 일으켰다.
그는 신학교 개혁과 성직자 쇄신을 추진하면서 방대한 관할 구역을 수시로 순회하였다.
또한 결실을 많이 얻을 수 있는 농사법을 권장하였고, 가난한 사람들이 그리스도교
가정을 이루는데 도움이 될 협동조합을 결성하도록 도왔다.
이 과정에서 성 안토니우스는 수많은 반대자들의 표적이 되었다.
1857년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에스파냐로 돌아온 그는 이사벨 2세 여왕의
고해신부 겸 왕실의 영성 지도자가 되었고, 설교와 간행물을 통한 선교의 중요성을
깨달아 출판사를 설립하여 많은 가톨릭 서적들을 보급하였다.
또한 그는 문화 방면에도 관심이 커 에스코리알(Escorial)에 과학 연구소, 자연사 박물관,
음악 학교, 언어 학교들을 세우고, 바르셀로나(Barcelona)에는 수도자 도서관을 세우기도
하였다.
1868년의 혁명 때 그는 급진주의자들에 의해 추방된 이사벨 여왕과 함께 로마(Rome)로
가서 제1차 바티칸 공의회(Vatican Council)에 참석하였으나 이후 에스파냐로 돌아가지
못하고 1870년 프랑스 나르본(Narbonne) 근처 프롱프루아드(Frontfroide)의 클라렛
수도원에서 사망하였다.
성 안토니우스는 1934년 2월 25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1950년 5월 7일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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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의 ’영적 아버지’인 그는 선교사,수도원 창설자,사회 개혁가,여왕의 지도 신부,
저술가 겸 출판업자,주교이자 피난민이었다.
그는 스페인 사람이었지만 일 때문에 카나리아 군도,쿠바,마드리드, 파리 그리고
제1차 바티칸 공의회까지 여러 곳을 다녔다.
그는 바르셀로나의 섬유 공장에서 직조 기사와 디자이너로 일하는 여가 시간에
라틴어와 인쇄술을 공부하였으며,
그것은 그가 후에 사제이자 출판업자가 되기 위한 준비이기도 하였다.
28세에 서품을 받은 그는 건강이 좋지 않아 카르투시안회와 예수회에서 입회를
허락하지 않아 수도생활을 할 길이 막혔지만 스페인의 가장 대중적인 설교가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언제나 성체 성사와 원죄 없으신 성모님께 대한 신심을 강조하면서 10년 동안을
대중 선교와 피정을 하면서 보냈다.
그의 손에서 단 한 번도 묵주가 떠난 적이 없다고 한다.
그는 42세에 5명의 젊은 사제들과 함께 오늘날 클라렛 수도회(Claretian Father)라고
알려진 선교사들의 수도 단체를 창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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