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ily/★ 빠다킹 신부님과 새벽을..

내 주위의 아파하는 이들을 위해서 기도합시다.

ohjulia 2005. 12. 5. 11:12
2005년 12월 5일 대림 제2주간 월요일

제1독서 이사야 35,1-10
1 광야와 메마른 땅은 기뻐하여라. 사막은 즐거워하며 꽃을 피워라. 2 수선화처럼 활짝 피고, 즐거워 뛰며 환성을 올려라. 레바논의 영광과, 카르멜과 사론의 영화가 그곳에 내려, 그들이 주님의 영광을, 우리 하느님의 영화를 보리라.
3 너희는 맥 풀린 손에 힘을 불어넣고, 꺾인 무릎에 힘을 돋우어라. 4 마음이 불안한 이들에게 말하여라. “굳세어져라,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너희의 하느님을! 복수가 들이닥친다, 하느님의 보복이! 그분께서 오시어 너희를 구원하신다.”5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6 그때에 다리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 광야에서는 물이 터져 나오고, 사막에서는 냇물이 흐르리라.
7 뜨겁게 타오르던 땅은 늪이 되고, 바싹 마른 땅은 샘터가 되며, 승냥이들이 살던 곳에는 풀 대신 갈대와 왕골이 자라리라.
8 그곳에 큰길이 생겨 ‘거룩한 길’이라 불리리니, 부정한 자는 그곳을 지나지 못하리라. 그분께서 그들을 위해 앞장서 가시니, 바보들도 길을 잃지 않으리라.
9 거기에는 사자도 없고, 맹수도 들어서지 못하리라. 그런 것들을 볼 수 없으리라. 구원받은 이들만 그곳을 걸어가 고, 10 주님께서 해방시키신 이들만 그리로 돌아오리라. 그들은 환호하며 시온에 들어서리니, 끝없는 즐거움이 그들 머리 위에 넘치고, 기쁨과 즐거움이 그들과 함께하여,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라.


복음 루카 5,17-26
17 하루는 예수님께서 가르치고 계셨는데, 갈릴래아와 유다의 모든 마을과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도 앉아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힘으로 병을 고쳐 주기도 하셨다.
18 그때에 남자 몇이 중풍에 걸린 어떤 사람을 평상에 누인 채 들고 와서, 예수님 앞으로 들여다 놓으려고 하였다. 19 그러나 군중 때문에 그를 안으로 들일 길이 없어 지붕으로 올라가 기와를 벗겨 내고, 평상에 누인 그 환자를 예수님 앞 한가운데로 내려 보냈다. 20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21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의아하게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저 사람은 누구인데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가?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22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대답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느냐? 23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24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그러고 나서 중풍에 걸린 이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 25 그러자 그는 그들 앞에서 즉시 일어나 자기가 누워 있던 것을 들고, 하느님을 찬양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26 이에 모든 사람이 크게 놀라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그리고 두려움에 차서 “우리가 오늘 신기한 일을 보았다.” 하고 말하였다.





스포츠 경기를 보면서 궁금했었던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높이뛰기 경기인데요, 왜 높이뛰기 선수들은 정면으로 뛰어넘지 않고서 뒤로 뛰어넘을까 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예전에는 저의 생각처럼 앞으로 뛰어넘었다고 하네요. 하지만 도저히 2m의 한계를 누구도 극복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미국의 D.포스베리가 다이빙의 재주넘기 장면을 보면서 ‘앞으로 넘지 말고 뒤로 넘자’는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시험을 해보자, 놀랍게도 2m의 벽을 쉽게 넘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이 방식을 이용하여 1968년 멕시코 올림픽 대회의 높이뛰기에서 금메달을 차지했고, 그의 도약방법인 포스베리플럽은 그때부터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사용되고 있는 높이뛰기 방식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이 방법을 이용해서 3m의 높이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우리 삶을 자주 가로막는 벽들을 경험합니다. 그 벽에 대해서 여러분들은 어떻게 대처하시는지요? ‘그 벽을 어떻게 넘어?’라는 부정적인 생각으로 그 벽 앞에서 무너지는 자기 자신을 체험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이제는 우리의 사고를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정면으로 넘을 수 없다면 옆으로 넘는 방법을 떠올려야 하고, 또 옆으로 넘을 수도 없다면 뒤로 넘는 방법을 떠올려야 합니다. 그렇게 계속해서 새로운 방법을 떠올려 나갈 때, 자신을 가로막는 그 벽들 충분히 넘어설 수가 있다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중풍병자 한 사람이 예수님으로부터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치유의 은총을 받습니다. 하지만 이 중풍병자가 죄를 용서받고 치유를 받았던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요? 이 병자의 굳은 믿음 때문이었을까요? 아닙니다. 도저히 예수님을 만날 수 없는 상황에서 절망하지 않고, 새로운 방법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려는 노력 때문에 그는 치유를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즉, 친구들은 지붕에 올라가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병자를 내려 보냈었던 것이지요.

사실 이 친구들의 행동은 멀쩡한 지붕을 부숴놓았다고 비판의 목소리를 들을 만도 합니다. 또 극성맞은 행동으로 인해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계시는 예수님을 감히 놀라게 했다는 비판을 받기에도 충분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노력이 헛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친구를 위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에서도 새로운 방법이 동원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자기만을 먼저 생각하는 일반적인 방법이 아니라, 남을 생각하는 새로운 방법이 동원되었다는 것이지요.

많은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먼저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 주위를 가득 매워서 중풍병자가 올 수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도 친구들은 자기 자신을 생각하지 않고, 아파하는 친구를 생각합니다. 만약 자기를 생각한다면, 자신들의 힘을 이용해서 군중을 뚫고 예수님 앞으로 억지로라도 헤쳐 나갔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아픈 친구를 생각했기 때문에, 새로운 방법인 지붕을 뚫는 것을 선택했던 것이지요.

주님 앞에 나아가는데 있어 우리들은 얼마나 새로운 방법을 동원하고 있는지요? 그 새로운 방법을 찾아나서는 오늘이 되시길 바랍니다.


내 주위의 아파하는 이들을 위해서 기도합시다.



인생은 5분의 연속이다(도스토예프스키)

사형수의 몸이 되어 최후의 5분이 주어졌다.

28년을 살아오면서 5분이 이처럼
소중하게 느껴지기는 처음이었다.

5분을 어떻게 쓸까?

옆에 있는 사형수에게 한 마디씩
작별 인사하는데 2분, 오늘까지 살아온
생활을 정리해 보는데 2분,
나머지 1분은 대지를..
그리고 자연을 둘러보는데 쓰기로 작정했다.

눈에 고인 눈물을 삼키면서 작별인사를 하고
가족들을 잠깐 생각하는데 벌써 2분이 지나 버렸다.

그리고 자신에 대하여 돌이켜 보려는 순간
'3분 후면 내 인생도 끝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자 눈앞이 캄캄해졌다.

지난 28년이란 세월을
아껴 쓰지 못한 것이 후회되었다. 

"이제는 다시 한번 더 살 수 있다면
순간 순간을 쓰련만. 이제 죽었구나" 하는 순간
기적적으로 풀려 난 그는 지금 느꼈던
'시간의 소중함'을 평생 잊을 수가 없었으며.

그 결과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영원한 만남'등
수 많은 작품들을 발표하여 톨스토이에
비견되는 세계적 문호로 성공하였다.

우리는 시간관리를 어떻게 해 왔을까?
나에게 정녕 최후의 5분 밖에 시간이 없다면.
과연 나의 마지막 시간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인생은 5분의 연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