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일 부활 제7주간 금요일-요한 21장 15-19절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차라리 날 때려요>
아이들 사이에서 ‘이빨’ ‘말빨’이 세기로 정평이 난 수사님이 한분 계십니다.
이 수사님의 특징은 왕성한 체력을 바탕으로 한 지칠 줄 모르는 입담에 있습니다.
이 수사님은 아무리 몰지각한 행동을 한 아이라 할지라도 폭력이나 욕설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끝까지 말로 해결하십니다.
그런데 때로 그 ‘말’이란 것이 더 무섭습니다. 아이가 완전히 항복할 때 까지
몇 시간이 흘러도 상관없습니다. 조근 조근, 차근차근 왜 그런 행동을 해서는
안 되는지, 왜 그게 잘못되었는지, 당신의 풍부한 인생경험과 나름대로의 철학을
바탕으로 차분하게 설명하십니다.
큰 문제를 일으킨 한 아이가 있었는데, 수사님에게 대들고, 따지고, 협박하고
난리였습니다. 그래도 수사님은 개의치 않습니다. 조근 조근, 친절하게 이렇게
이야기하고 저렇게 이야기하고, 했던 이야기 반복해서 다시 또 하고 하다 보니
어언 새벽 2시가 넘었습니다.
참다 참다 못한 아이가 급기야 수사님에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수사님, 차라리 날 때려요. 정말 해도 해도 너무 하시는군요. 지금 시계가
몇 신지 아세요. 차라리 맞는 게 백번 낫지!”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베드로 사도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같은 질문을 계속 반복해서 던지십니다. 한두 번도 아니고 세 번씩이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배신에 대한 질책성 질문이 분명했기에 죄송스런 마음에 베드로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대답합니다.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이제 됐겠지, 하고 있는데, 주님께서는 똑같은 질문을 다시 던지십니다.
두 번, 세 번. 그 순간 베드로는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었을 것입니다.
거듭되는 ‘나를 사랑하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베드로는 배신을 때린 죄 값으로
차라리 심한 욕설을 던지시든지, 벌을 주시던지, 매를 맞던지 하는 것이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세 번에 걸친 예수님의 질문은 다분히 의도적입니다. 예수님은 세 번의 거듭된
질문을 통해 당신의 수난 때 수제자 베드로가 보여준 세 번에 걸친 예수님 부인
사건을 상기시킵니다.
그러나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공개적으로 베드로를 질책하지 않으십니다.
다른 제자들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창피하게 혼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3번에 걸친 배신으로 인해 무너졌던 스승과 수제자 사이의 관계를
세 번에 걸친 질문을 통해 다시금 복원하십니다. 3번에 걸친 배신으로 인해 형편없이
실추된 베드로 사도의 권위를 다른 제자들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다시금 회복시켜
주십니다.
관계의 복원, 수제자 권위의 회복, 그 비결은 다름 아닌 ‘사랑’입니다.
우리들의 거듭된 배신에도 불구하고 스승이신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 아침 우리들을
향해 거듭 질문을 던지십니다.
“아들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부끄러움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대답은 어쩔 수 없습니다.
“주님, 정말 제가 형편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을 사랑합니다.
제게는 당신 밖에 없습니다. 제가 마지막으로 찾아갈 곳은 바로 당신입니다.
주님, 부족한 제 사랑을 받아주십니다. 당신은 어쩔 수 없는 제 최초이자
최후의 사랑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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