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ily/☆ 양 승국 신부님의..

시선을 하느님께로

ohjulia 2006. 6. 25. 02:34


 
    <시선을 하느님께로> 언젠가 몇몇 형제들과 의기투합해서 원시적 뗏목 하나를 만들었습니다. 돛대도 달고, 노도 만들었지만 완성하고 나서 보니 기가 차서 웃음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걱정이 많이 됐지만, 조금만 나갔다 오자며 함께 바다로 나갔습니다. 막상 바다로 나가보니 모든 것이 육지에서 생각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조수간만 차가 큰 서해여서 그런지 바닷물 움직임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뗏목은 우리 의도와는 달리 점점 큰 바다로 떠밀려 나가기 시작했고, 다급해진 저희는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해봤지만 마음뿐이었습니다. 큰 바다로 나가면서 파도는 너울로 바뀌고 다들 죽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행히 지나가던 어선을 만나 겨우 구조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제자들 역시 비슷한 체험을 했던가 봅니다. 갈릴래아 호수는 그 크기가 만만치 않습니다. 얼마나 큰지 바다처럼 보입니다. 이쪽에서 저쪽 기슭까지 약 12㎞ 정도였으니, 노를 저어 건너가려면 족히 1시간 가까이 걸리겠지요. 때로 갈릴래아 호수 주변의 바람이 갑자기 바뀌곤 했는데, 그럴 때면 바다처럼 파도가 쳤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배를 타고 건너가기란 여간 힘겨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저녁 무렵,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가게 되었는데, 때마침 불어 닥친 역풍을 만나 죽을 고생을 하게 되었습니다. 열심히 노를 저었지만 배는 역풍에 휘말려 계속 같은 자리만 맴돌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들이닥친 물이 배에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고생을 하다 보니 제자들은 문득 생명의 위협까지 느끼게 되었습니다. 잔뜩 겁을 집어먹은 데다 기진맥진해진 제자들은 이 난감한 국면을 어떻게 타개해야하나 하는 마음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그 긴박한 상황에서 보여주신 예수님 태도는 참으로 놀랍습니다. 태연하게도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속이 탄 제자들은 예수님을 흔들어 깨웁니다. 그리고 볼멘 목소리로 외칩니다.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생명의 주관자인 당신과 함께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포에 떠는 한심한 제자들 모습입니다. 큰 마음먹고 예수님을 따라나서기는 했지만 아직도 스승의 신원에 대한 정확한 파악이 이뤄지지 않은 제자들 모습입니다. 아직도 한쪽 발은 육의 세상에, 다른 한쪽 발은 영의 세계에 들여놓은 어정쩡한 상태의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제자들 내면 깊숙한 곳에는 다양한 근심걱정들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한곳에 정주(定住)하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는 생활에서 오는 불안함도 만만치 않았겠지요. 집요하게 그물망을 좁혀오는 적대자들의 존재도 큰 위협이었습니다. 과연 예수님을 따라나선 것이 좋은 선택이었는가 하는 의문도 꼬리를 물었습니다. 이런 제자들 내면을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파악하고 계셨던 예수님이셨기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불안감에 떠는 제자들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다른 무엇에 앞서 믿음을 지닐 것을 강조하십니다. 타성에 젖은 믿음, 막연한 믿음, 물에 물 탄 것 같은 미지근한 믿음이 아니라 제대로 된 믿음, 강렬한 믿음, 진심이 담긴 믿음을 요청하십니다. 근본적으로 인간은 불안정한 존재입니다. 성경에서도 인간을 끊임없이 방랑하는 존재, 불안정하게 이리저리 헤매는 존재로 묘사합니다. 마르틴 하이데거 역시 인간에 대해 본질적으로 근심하는 존재로 정의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 걷는 이 좋은 세상 한평생 근심 속에서 살아갈 수만은 없지 않겠습니까? 내가 나 자신에 대한 염려와 두려움을 가지고 나 자신에만 관심을 집중시킨다면 우리 인생은 언제나 흔들릴 것입니다. 우리 삶 전체는 온통 걱정에만 사로잡힐 것입니다. 늘 나 자신의 안전만을 추구하니 항상 불안할 것입니다. 그러나 시선을 하느님께로 돌려보십시오. 많은 것이 순식간에 해결될 것입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나 자신에게서 해방되니 마음이 편안해질 것입니다. 그토록 나를 짓눌렀던 나 자신에게서 벗어나 하느님께로 나아가게 되니 삶은 장밋빛으로 변할 것입니다. 자신의 실존을 위한 염려에만 얽매이지 말고, 인간의 실존을 가능하게 했고, 인간을 잘 알고 계시며 인간을 섭리하시는 하느님께 믿음으로 자신을 내맡기는 작업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