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Lord/† 聖人들의 삶을 통해서

성 베드로 클라베르 (9월 9일) 사제, 선교사

ohjulia 2006. 9. 9. 05:19
 고향으로, 성 베드로 클라베르
 

    성 베드로 클라베르(St. Peter Claver) 사제, 선교사

    성인의 활동지역 : 콜롬비아(Colombia) 성인의 활동연도 : 1580-1654년 성인과 같은이름 : 베드루스, 페드로, 페트루스, 피터 에스파냐의 바르셀로나(Barcelona) 근교 베르두(Verdu)에서 태어난 성 베드로 클라베르(Petrus Claver)는 바르셀로나 대학교에서 공부한 다음 20세 되던 해에 예수회에 입회하였다. 그는 마요르카(Mallorca) 섬의 팔마(Palma)에서 공부를 더 한 후, 성 알폰수스 로드리게스(Alfonsus Rodriguez, 10월 30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고, 신세계에서 활동하려는 소망을 꽃피우게 되었다. 그는 마침내 1610년에 중앙 아메리카 니카라과(Nicaragua) 뉴 그라나다(Granada)의 선교사로 파견되었고, 1615년에는 콜롬비아 북부 카르타헤나(Cartagena)에서 서품을 받았다. 당시 카르타헤나는 노예 매매의 중심지였으므로 성 베드로는 알폰소 데 산도발 (Alfonso de Sandoval) 신부와 함께 그들의 처참한 상황을 개선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는 서 아프리카에서 끌려온 노예들이 집단 수용되는 지역에서 주로 활동하면서 음식물과 의약품을 공급하였고, 신앙을 가르치고 세례를 베풀어서 4년 동안 약 3십만 명을 개종시켰다. 또한 그는 성 라자로 병원에서 나환자들을 위하여도 봉사하였고, 투옥된 죄수들의 고해신부로서도 큰 활약을 하였다. 그는 도시의 큰 광장에서 설교하였고, 엄격한 생활을 실천하였으며, 살아 있는 동안에 이미 초자연적 은혜를 받아 예언도 하였고, 기적하는 능력도 있었고, 사람들의 마음을 읽는 힘도 매우 강하였다. 그는 1650년에 카르타헤나를 휩쓴 흑사병에 걸려 끝내 회복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병중에서도 그는 일을 계속 지휘하였고, 조그마한 방에서 지내면서 잊힌 사람처럼 외롭게 운명하였다. 그는 1888년에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시성되었고, 1896년에는 같은 교황에 의해 흑인 선교의 수호성인으로 선언되었다. ******************************************************************************** 스페인 태생인 젊은 예수회 회원 베드로 클라베르는 신세계 식민지 선교사가 되기 위해 1610년 조국을 영원히 떠났다. 그는 카리브 해를 거쳐 부유한 항구 도시 카르타헤나(지금의 콜롬비아)로 향했다. 그는 거기서 1615년에 서품을 받았다. 그때까지 근 100년 동안이나 노예 무역이 아메리카에서 성행되었고 카르타헤나는 노예 무역의 중심지였다. 운송중에 약 1/3 이 죽어 가는 잔인하고 비인도적인 상황에서 1만 명의 노예들이 서아프리카로부터 대서양을 횡단하여 매년 카르타헤나 항구에 쏟아졌다. 비록 노예 무역 행위가 교황 바오로 3세에 의해 비난을 받았고, 후에는 비오 9세에 의해 ’최고의 악행’이라고 명명되긴 하였지만 그것은 나날이 번창되어 갔다. 클라베르의 선구자인 예수회 신부 알퐁소는 클라베르가 스스로 ’영원한 흑인들의 노예’ 임을 공언하고 그들을 보살피는 일을 하려고 카르타헤나에 도착하기 전 40여 년 동안 이미 노예들을 위해 봉사해 왔다. 노예선이 항구에 들어오자마자 클라베르는 노예들이 사슬에 묶인 채 짐승처럼 배에서 떼지어 나와 가까운 광장에 세워진 후에야 의약품,음식,빵,브렌디,레몬,담배 등을 가지고 그들 사이에 설 수 있었다. 통역자의 도움으로 그는 몇 가지 지시를 하고 말씀을 가르치고 그들의 인간적 존엄성과 하느님의 가호를 확실히 말해 주었다. 40년간 선교 활동을 하는 동안 클라베르는 약 30만 명의 노예를 가르치고 영세시켰다. 그의 사도직은 노예들은 돌보는 일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참으로 카르타헤나의 사도이며 도덕적으로 명망 높은 인물이 되었다. 그는 시 광장에서 연설도 했으며, 시골에서 선교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군인과 무역상들에게도 포교했고, 노예 소유주와 대농장 주인들의 감시와 방해를 피하느라고 노예 숙소에서 숙박했다. 그는 4년 동안 병으로 거의 활동을 하지 못할 정도였으며, 제대로 간호를 받지 못한 까닭에 결국 1654년 9월 8일에 세상을 떠났다. 흑인 부랑자들에 대한 그의 열성을 불쾌하게 생각하던 시장도 그가 죽자 공금으로 그의 장례식을 성대하게 치르도록 지시했다. 그는 1888년에 시성되었으며 교황 레오 13세는 1896년 그를 전세계 흑인 포교 사업의 수호 성인으로 선포했다. 성령의 굳셈이 클라베르의 대담한 행동과 중요한 결정에서 뚜렷이 드러난다. 결코 돌아오지 못할 조국을 떠나려는 결정은 현대인으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엄청난 의지적 행위를 보여 준다. 모든 이들 중 가장 비천하고,거절당하고 버림받는 삶들에게 영원히 봉사하려는 베드로의 결심은 아주 영웅적이다. 우리가 그 같은 사람의 삶에 비추어 자기 삶을 평가할 때 성령의 놀라운 힘에 더욱더 우리 자신을 맡겨야 할 필요성을 깨닫게 되고 우리가 우리 자신의 잠재력을 거의 사용하지 않고 있음을 알게 된다. 베드로 클라베르는 그의 흑인 형제 자매들에게 브랜디,음식,약품 등을 나누어 주는 것과 같은 구체적인 봉사가 언어로 하는 설교와 마찬가지로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 효과적인 방법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했다. 그는 가끔 "우리는 입으로 그들에게 말하기 전에 우리 손으로 그들에게 말해야 한다."고 했다. 옛날에는 노예라는 것이 있어 사람이면서도 물건 취급을 당하여 매매되고, 그 노예를 산 사람들은 그들 마음대로 부려먹을 수가 있었다. 이런 노예의 운명은 비참한 것이었다. 그들은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해 조금의 자유가 없었고 온전히 주인 소유물에 불과했다. 그런데 예수께서 "사람을 자기와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하시자 신자들은 노예까지도 사랑하게 되었다. 교회에서는 될 수 있는데까지 노예를 보호했으나 도저히 노예제도는 없앨 길이 없었다. 그래서 배상금을 모금하거나 혹은 좋은 훈계로써 그들을 석방시키도록 하는 동시에, 적어도 그들을 위안해 주려고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많은 열심한 신자들과 사제들은 기부금을 거둬 이런 좋은 자선 사업에 충당하는 등 이 자선 사업에 전력을 다했다. 그 중에도 이런 가련한 노예를 위해 가장 크게 활동한 최대의 은인은 아마 성 베드로 클라베르일 것이다. 당시의 노예는 대개가 흑인이었으며 그들은 백인보다 더욱 심각한 학대를 받고 있었으므로, 그는 이런 사람들을 위해 특별히 나섰고. 때로는 자신을 흑인의 노예라고 까지 불렀다. 그는 스페인의 바르셀로나 근교 베르두에서 태어나 일찍이 신부가 되려는 마음을 가졌었다. 그래서 부모는 그를 바르셀로나에 보내어 공부를 시켰는데 성적도 매우 우수했다. 그곳에서 그는 예수회의 회원들과 자주 접촉하게 된 것이 인연이 되어 그 회에 입회하게 되었다. 수련이 끝나자 그는 흑인 노예를 개종시키기 위해 남미에 파견해 줄 것을 청했다. 그 즉시 승낙을 얻지는 못했으나 1610년에 뉴 그라나다 선교사로 파견되었다. 그는 남미에 도착하자, 규정된 학문과정을 마치고 신품 준비를 해 1615년 카르타제나에서 서품되었다. 이미 자신은 그만한 학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바르셀로나에서 친하게 지냈던 평수사 성 알폰소 로드리게스(축일:10월30일)로 부터 완덕에 대한 수덕 신학을 배웠다. 그가 흑인 노예에게 전교를 하게된 연유는 성스러운 친구의 덕택이 컸던 것이다. 그는 학문을 닦고 준비를 한 후 흑인 노예들에게 전교하기 위해 부임했다. 카르타제나 지방에서는 광산, 도시, 농촌 할 것 없이 많은 노예들이 강제노동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아프리카에서 매년 1만명 내지 1만2천 명씩 수입되어 짐승과 같이 매매되고 혹 사되는 것이었다. 그 중에는 혹은 병에 걸리고 혹은 절망적 상태에 빠져 주인이나 감독에게 불붙는 듯한 반감과 증오심을 품은 자도 적지 않았다. 베드로는 이런 가련한 자들을 위로해 주기 위해 부임된 것이라 선내(船內)에서부터 과일과 과자를 나누어 주며 갖은 친절을 다해 그들과 접근하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그들은 이 역시 자기네들을 학대하는 동료인 줄 알고 도저히 마음을 주지 않으려고 했었는데, 베드로의 변함없는 친절에 그들은 안심하고 차차 가까워졌다. 베드로는 그들을 위로하고 하느님의 사역이나 예수에 대해서 그 수난하심과 부활하심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었다. 아프리카에서 온 흑인들은 아직 천주교를 몰랐으므로 이런 말들은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는 또한 어린이나 병자들을 알뜰히 보살펴 상처를 씻겨 주고 약을 발라 주며 부모보다도 더한 깊은 애정으로써 대했다. 이러한 사랑의 행실이 헛된 일일 리가 없었다. 불행한 사람들은 자비로운 아버지와 같이 생각하고 따르며 타인에게는 결코 걸 수 없는 신뢰를 갖게 되었다. 베드로는 그들을 위해 여러 가지를 궁리했다. 그들의 오락을 위해 악기를 사다 주기까지 했다. 그리고 자기를 가까이 하지 않는 흑인, 혹은 자기를 멸시하고 욕을 하는 흑인들에게도 똑같은 친절로써 대해 주었다. 노예의 주인들은 그의 일을 방해하는때가 물론 가끔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 모든 것을 하느님과 노예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능히 극복할 수 있었다. 이러한 사랑의 행위는 전교상에도 대단한 성과를 냈다. 그가 노예를 위해 일한 44년간에 세례를 받은 사람의 수효는 30만을 훨씬 초과했다고 한다. 그는 깊은 산골에 있는 흑인 노예들에게 전교를 하기 위해, 또는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기 위해 강을 건너고 늪을 지나며, 밀림 속의 맹수들과 싸우며 먼데까지 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러한 어려움도 달갑게 생각하는 베드로의 열심이 하느님 대전에 의합되었음인지, 가끔 그의 기도로 기적도 일어나곤 했다. 이러한 베드로의 존재는 사방에 알려져 이제는 흑인 노예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그의 도움을 구하러 오는 이가 적지 않았다. 그리고 부탁을 받은 일은 결코 거절하지 않으며 상대가 천주교이건 회교인이건 토인이건 외국인이건을 막론하고 아무 차별 없이 가능한 모든 도움을 주었다. 그는 많은 기도를 바치고 낮에 시간이 없으면 밤에라도 이를 행하고, 게다가 준엄한 고행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렇게 몸을 괴롭히면서도 그런 활동을 했다는 것은 이 역시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특히 순명과 청빈에 대한 덕은 모든 사람의 모범이 되었다. 그의 인내심이며 부드러운 마음씨는 사람들에게 큰 감화를 주었는데, 실은 그의 본래의 성질은 그와 반대였으나 수덕의 결과로 이같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1650년, 그는 어떤 페스트 환자에게서 병이 전염되어 겨우 생명은 건졌으나 몸이 매우 허약해졌다. 그로부터 4년 후 그를 돕기위해 사제 한 분이 유럽에서 파견되어 왔다. 몸이 쇠약해져 마음대로 활동을 못하는 그에게는 얼마나 고마운 일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생명이 붙어있는 동안 자기의 의무를 조금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의 위독함이 전해지자 전 시민은 비탄에 잠기고 위문객들은 쇄도해 왔다. 그가 영원히 쉬게 된 날은 1654년 성 마리아의 탄생 축일이었고, 그의 나이는 74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