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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양(洛陽)''

ohjulia 2006. 9. 25. 07:26

Loyang for Chamber Ensemble

윤이상 / 실내앙상블을 위한 '낙양(洛陽)'

Isang-Yun 1917~1995

Byung-Hwa Kim, Cond / National Philharmonic Orchestra

1악장
Byung-Hwa Kim, Conductor
National Philharmonic Orchestra, of D.P.R of Korea


2악장
Byung-Hwa Kim, Conductor
National Philharmonic Orchestra, of D.P.R of Korea


3악장
Byung-Hwa Kim, Conductor
National Philharmonic Orchestra, of D.P.R of Korea

尹 伊桑 (Isang Yun) Loyang (洛陽) - For chamber Ensemble

1962년 윤 이상은 Loyang(낙양의 중국 발음)을 작곡하였으나 2 년여 동안 초연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여러번의 시도끝에 지휘자 Klaus Bermbacher의 관심을 끌게되어 1964년 1월에 하노버에서 있었던 "Tage der Neuen Musik (새로운 음악의 날)" 행사에서 드디어 초연을 가질수 있었고 결과는 성공적 이었다. 이에 고무된 윤 이상은 1966년 그의 첫번째 대곡 Reak(禮樂)을 작곡하게 만들었으며 이것은 그가 세계적인 전위 (Avntgarde) 작곡자로 도약하는 계기가 되었다.

낙양은 중국 당나라 시대의 수도였으며 당시 그곳에서 성행하였던 唐의 궁중음악이 우리나라에 유입되어 당악으로 불리며 우리의 고유 음악인 향악과 분리되어 성행하였다. (지금은 토착화되어 우리의 고유 음악인 향악과 거의 구분이 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당악이 테마가 되었으며 3악장에서는 우리의 국악에서 들을 수 있었던 멜로디가 연주 된다.

윤이상(Isang-Yun, 1917.9.17~1995.11.3)

시인 윤기현의 아들로 그는 경남 산청에서 태어나  통영에서 자랐으며, 17세 때 일본에 유학하여 첼로 음악이론 작곡 등을 배웠다. 1943년 무장독립운동을 하려다가 체포되었고 8·15해방 후 고아들을 보살피기도 했다. 

1948년 통영여자고등학교에서 음악교사로 있었고 1953년 서울에 있는 여러 대학에서 강사로 있었다. 이즈음 가곡과 실내악을 발표하기 시작했는데, 1956년 유럽으로 유학을 떠나 파리음악원에서 P. 르벨과 T. 오벵에게서 음악이론과 작곡을 배웠다. 1957년 8월 서베를린음악대학에서 R. 슈바르츠 쉴링, J. 루퍼에게서 음악이론을 배우고 B. 블라허에게서 작곡을 배웠다. 1960년 서독 프라이부르크에서 중국·한국의 궁중음악에 대한 라디오 방송을 했고 1962년에는 관현악곡 〈바라 婆羅〉가 베를린 라디오 방송관현악단에 의해 초연되었다.

1963년 북한을 방문했고 1965년 서독 하노버에서 〈오 연꽃 속의 진주여!〉를 초연했다. 1967년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으로 한국 중앙정보부는 그를 임의동행형식으로 귀국시켰으며 재판결과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1968, 1969년의 2번에 걸쳐 10년이 감형되었다가 동료음악가·교수들의 국제적 항의와 독일정부의 도움으로 석방되었다. 감옥에서도 오페라 〈나비의 미망인〉(1967)을 작곡하고 그밖에 〈율〉·〈영상〉 등을 작곡했다. 1971년 서독 킬 문화상을 수상했고 독일국적도 취득했다.

1971년 8월 뮌헨 올림픽의 문화행사로 오페라 〈심청〉을 초연했고 1973에는 미국 애스펜 음악제에 작품을 발표했다. 1977년 서베를린예술대학 교수로 임명되었다. 1981년에는 광주민주화운동을 소재로 한〈광주여 영원하라〉광주민주화운동 과장에서 분신한 사람의 넋을 추모한<화염메 횝싸인 천사 에필로그>를 작곡했고, 1988년에는 일본 도쿄[東京]에서 민족합동음악축전을 제의했으나 실현되지 않았다. 늘 고국을 그리워했던 그는 복권이 이루어진 1994년 9월 한국에서 열린 윤이상음악축제에 참석하려 했지만, 한국정부와의 갈등으로 끝내 귀국하지 못했다. 그의 작품은 중국·한국의 궁중음악과 불교·도교의 신화적 소재가 주를 이루는데 주된 음악적 경향은 도교적이다. 그밖의 작품으로 〈낙양 洛暘〉(1961)·〈예악 禮樂〉·〈무악〉·〈무궁동 無窮動〉(1986)·〈나의 땅 나의 민족이여〉(1987), 오페라 〈요정의 사랑〉(1969)이등 150여편의 작품을 남겼다. '현존하는 유럽의 5대작곡가'로 꼽혔으며, 독일연방공화국대공로훈장, 괴테메달 등을 받았다.

그렇게 음악활동을 하는 동안 그의 음악은 '서양현대음악 기법을 통한 동아시아적 이미지의 표현' 또는 '한국음악의 연주기법과 서양악기의 결합'이라는 평을 받으며, 세계적인 음악가로 인정받았다. 그는 또 깊은 겨레사랑으로 '범민족통일음악회'의 산파 역할도 했다. 하지만 그는 자유로운 몸으로 남한 땅을 밟아보지 못한 채 1995년 베를린에서 눈을 감았다.

1941년에 창작한 가극 〈편지〉(김상옥 시)에서 마지막 작품 〈화염에 싸인 천사와 에필로그 Symphonische Dichtung Engel in Flammen & Epilog〉(1994)에 이르기까지 그의 창작의 원천은 한국의 역사와 미학이었다. 우리 모두에게 인간과 세계가 '참되고 선하며 아름다울수 있음'을 일깨워주었던 작곡가 윤이상, 희망으로 일관된 그의 삶과 예술은 온 세계에 빛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