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Lord/† 聖人들의 삶을 통해서

성 클레멘스 1세 (11월 23일) 교황, 교부, 순교자

ohjulia 2006. 11. 23. 06:23
 성 클레멘스 1세
 

    성 클레멘스 1세 (St.Clement I) 교황, 교부, 순교자

    성인의 활동지역 : 로마 (Rome ) 성인의 활동연도 : 30?-101년? 성인과 같은이름 : 글래멘스, 글레멘스, 끌래멘스, 끌레멘스, 클래멘스, 클레멘트 성 클레멘스(Clemens)는 로마인이었고 로마(Rome)에서 순교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그는 황제의 집사 친구로서 성 베드로(Petrus)에 의하여 세례를 받았다. 그는 91년경에 교황 성 아나클레투스(Anacletus)를 승계하여 제4대 교황이 되었으나, 트라야누스(Trajanus) 황제에 의하여 크림(Krym) 반도로 귀양을 갔고, 그곳의 광산에서 일하는 노동 죄수들에게 열렬히 설교하여 많은 개종자를 얻었으나 그로 인해 사형을 언도받았다. 그는 목에 닻을 달고 바다 속에 던져져 순교하였다. 그가 이교를 반박하기 위하여 고린토인들에게 쓴 편지(The Epistle of Clemens)의 저자임을 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인정하고 있다. 이 편지는 신약성서 다음으로 오래된 초대교회의 유명한 문서 가운데 하나로서 최초의 교부 문헌으로 인정받는 역사적인 의의를 지니며, 로마의 주교가 지니는 권위를 확인해 주는 중요한 문서이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로마의 클레멘스는 성베드로의 세 번째 후계자이며 1세기의 마지막 10년 동안 교황이었던 사람이다. 역사에서 보면 그가 101년에 순교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의 순교에 대한 이야기는 4세기나 5세기에 만들어진 전설이다. 아마도 로마에서 가장 초기 본당 중의 하나인 성클레멘스 대성당은 클레멘스의 집이 있던 자리에 건축되었던 것 같다.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클레멘스의 첫번째 편지는(First Epistle of Clement to the Corinthians) -오늘날 가(假)클레멘스라고 불리는 작가와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초대 교회에서 널리 읽혔으며 지금까지 잘 보존되어 있다. 그것은 많은 평신도들이 성직자들에게서 갈라져 나간 분열에 관하여 클레멘스가 고린토에 있는 교회에 쓴 로마 교회의 편지로 되어 있다. 클레멘스는 고린토 교회의 용납할 수 없고 정당화될 수 없는 분열을 몹시 슬퍼하면서 그들에게 일치를 호소한다. 그는 그 싸움의 원인을 ’시기와 질투’때문이라고 하였다. 클레멘스는 고린토 교회의 분열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애덕을 강조한다. 그것은 "애덕이 없이는 아무것도 하느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모든 교회는 ’옛 것’과 ’새 것’사이의 양극화를 체험하고 있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인 우리는 다음과 같은 성바오로의 말씀을 되새기면서 클레멘스의 교훈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사랑을 실천하십시오. 사랑은 모든 것을 하나로 묶어 완전하게 합니다." (골로 3,14) "사랑은 우리를 하느님과 결합시켜 줍니다. …사랑에는 비천한 것도 없고 오만한 것도 없습니다. 사랑은 아무런 분열도 모르고 아무런 반역도 하지 않고 모든 것을 화목한 가운데서 합니다. 사랑 안에서 하느님이 뽑은 모든 사람들이 완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번째 편지,49장)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클레멘스가 교황이 된 때는 아직 도미시아노 황제의 박해가 끝나기 전이었다. 그러므로 백발의 노구를 이끌고 탄압에 떠는 신자들을 격려하며, 또는 적의 손에 잡힌 신자들을 위로해 주며 카나콤바에 숨어 미사를 지내고 성체를 모시어 그들에게 영해 주며, 맡은 바 어린양들의 신앙을 보존키 위한 노고는 보통이 아니었다. 또한 순교자가 날 때마다 위험을 무릅쓰고 그 형장에 나타나 그들에게 최후의 축복을 주었다. 그에게 걱정이 또 하나 늘었다. 즉 고린토 신자간에 불화와 알력이 벌어진 것이다. 교회에는 외부의 박해 보다 내부의 반목이 더 무서운 일이다. 이를 간파한 클레멘스 교황은 노쇠하여 떨리는 손으로 붓을 들어 정성어린 서한을 써 그들에게 보냈다. 자비로운 아버지와 같은 두터운 애정으로 그들의 잘못을 밝히며, 그 교회의 창설자 성바오로의 낯을 보아서라도 조속히 반목을 일소하고 평화롭게 일치, 단결할 것을 설득했다. 고린토 교우들은 20년전에도 그와 같은 불화소동을 일으켰으나, 바오로의 애절한 질책에 겨우 진정을 보았는데, 지금은 클레멘스의 설득에 접하여 크게 마음을 움직이고 곧 화해하게 되었다. 그 편지는 소위 클레멘스의 서한으로서 고린토 교회 내의 알력을 조성했을 뿐 아니라, 로마의 주교가 교회 초대로부터 성 베드로의 후계자로서 온 교회를 통치하는 권리를 보유한다는 것을 증명한 귀중한 살아있는 역사적 재료인 것이다. 그 필치는 깊은 신앙과 애정이 넘치며, 구약, 신약의 지식이 풍부한 점으로는 사도 성 바오로를 방불케 하고,간결하고 겸손한 인사안에 감히 침범치 못할 박력을 갖고 있는 점으로는 사도 성 베드로를 생각하게 한다. 그런즉 이 서간경은 4세기 말엽까지 성 바오로 서간경과 더불어 미사때 낭독 되었다. 도미시아노 황제의 박해에 일단 종지부를 찍고 교회가 안도의 숨을 채 쉬기도 전에, 즉 약 10년경 트리야노 황제가 박해를 가하기 시작해, 다시금 수많은 신자들이 선혈을 흘리게 되었던 중, 이번에는 연로한 클레멘스가 신앙때문에 순교할 차례가 되었다. 그 순교의 전말에 대하여는 유감스럽게도 남은 기록이 없으나, 성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그가 영생의 책에 기록되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대구대교구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