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Lord/† 聖人들의 삶을 통해서

성 엘리지오 (12월 1일) 주교

ohjulia 2006. 12. 1. 06:47
 성 엘리지오
 

    성 엘리지오 (St.Eligius) 주교

    성인의 활동지역 : 누아용(Noyon) 성인의 활동연도 : 588-660년 성인과 같은이름 : 엘로이, 엘리기오, 엘리기우스, 엘리지우스 엘로이(Eloi)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성 엘리기우스(또는 엘리지오)는 프랑스계 로마인의 아들로서 프랑스의 리모주(Limoges) 근방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 에우케리우스(Eucherius)는 금속 세공인이었기 때문에 그 당시 유명한 금 세공인인 압보(Abbo)에게 아들을 보내어 공부하도록 안배하였다. 압보는 리모주의 조폐국 책임자였다. 그가 도제 수업을 마친 뒤에는 궁중 재무관 봅보(Bobbo) 수하에서 일을 하다가 국왕 클로테르 1세의 조폐국 책임자가 되었다. 성 엘리기우스는 그 분야의 최고 전문가로서 명성을 떨치는 한편 국왕의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성 엘리기우스의 신심과 끊임없는 설득에 의하여 국왕은 가난한 이들에게 선정을 베풀었으며, 수많은 노예들의 보석금을 대납하였고 또 여러 교회를 세웠다. 또 632년에 그는 솔리냑(Solignac)에 수도원을 세웠고, 클로테르의 아들 다고베르트 1세(Dagobert I)의 도움으로 파리(Paris)에 수도원까지 세우는 등 참으로 놀라운 일을 성취하였다. 그래서 국왕은 그를 자신의 주요 고문으로 삼았다. 또 엘리기우스는 브르타뉴(Bretagne)로 가는 외교사절이 되어 활약한 결과 브르타뉴 국왕을 설득하여 프랑크 왕의 권위를 인정하게끔 하는 큰 공을 세웠다. 또 그는 640년에 서품되어 누아용의 주교가 되었다가 투르네(Tournai)의 주교로도 활약하였다. 그는 벨기에 플랑드르(Flandre) 지방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던 중에 안트베르펜 (Antwerpen) 지역에서 수많은 개종자를 얻었다. 그는 금속 세공인, 금 세공인의 수호성인이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프랑스 왕조에서 일을 한 많은 성인 중 성 엘리지오는 가장 탁월한 인물이다. 그는 590년경에 출생했다. 부모는 신앙심이 깊은 신자로 그 아들을 교회의 가르침대로 교육시켰으므로 엘리지오는 매우 경건하게 자라났고, 어려서부터 기도하기를 즐겼었다. 그의 가장 뛰어난 재능은 미술 방면이었으므로 양친은 그로 하여금 금은세공 (金銀細工)을 배우게 했더니, 과연 놀랄만한 기술을 발휘해 이 방면의 대가가 되었다. 한편 그는 덕을 닦음에도 게으르지 않고 모든 이에게 친절하며 더욱이 극빈자들에게는 동정심이 깊었다. 또한 열심히 성서를 연구하며, 이에 대한 설명도 열심히 들었다. 그의 예술가로서의 명성이 천하에 떨치게 되자, 프랑스 국왕 클로테르 1세는 당시 겨우 30세인 엘리지오를 궁중에 초청하여 보석 귀금속으로 자기의 화려한 옥좌를 만들도록 했다. 필요한 금은 보석의 보고(寶庫)가 그에게 맡겨졌다. "주신 금은 보석이 남았으므로 두 개의 옥좌를 만들었습니다"했다 주문대로 한 개의 옥좌로 족한 것인데, 손품을 아끼지 않고 두 개를 만들어 남은 금은 보석을 제것으로 삼지 않는 그의 청렴함은 참으로 감탄할 일이다. 그러니 국왕은 화려한 그의 옥좌보다 엘리지오의 정직하고 결백한 마음씨를 더욱 가상히 여겼고, 그를 즉시 왕립 조폐 국장(王立造幣局長) 및 자기 고문으로 등용했다. 이렇듯 놀라운 입신출세를 한 엘리지오였지만 그는 항상 겸손한 그대로 였으며, 주위 사람들의 부패 타락한 틈에서 그는 오직 덕행의 길로만 나아갔다. 그는 그런 부패 타락한 이들에게 충고를 가하는 한편, 국왕에게까지도 충언을 가끔 올렸다. 이들도 모두 엘리지오의 충고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이는 그의 정직한 행실과 열심한 기도, 준엄한 단식 등 실로 그에게는 한점의 결점도 볼 수 없었고, 따라서 그의 말에는 힘있는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다. 클로테르 왕이 서거하자 후계자로 그의 아들 도고베르트가 왕위에 올랐으나, 그 역시 엘리지오를 측근자로 두고 중요한 일에는 반드시 그의 의견을 청취했다. 그는 이미 위세 당당한 고관의 신분이었으므로 그 앞날의 출세도 양양한 바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극빈자와 불행한 이를 위해 사재를 내던졌고, 자신은 매우 빈곤한 생활을 감수했다. 궁중에서만은 신분에 알맞은 복장을 했으나, 자택에서는 보잘것 없는 의복과 또 의복감도 가장 검소한 것을 택했다. 한편 신학을 열심히 연구하여 상당한 학식을 갖추었으므로 노이용 교구의 사제 및 신자들은 그를 주교로 추대했다. 우선 사제 서품을 받고 641년에는 주교로 축성되어 부임했다. 노이용 교구는 대단히 광범위한 지역이며 주민의 대부분은 아직 그리스도교를 믿지 않았다. 엘리지오 주교는 열심히 그들이 개종을 도모하고, 각 지방에 성당을 세우며 여러 개의 수도원까지 건축했다. 한편 여전히 극빈자를 생각하며 수입의 거의 전부를 그들 구제에 사용했다. 또한 교육 사업에도 큰 관심을 두어 사제들을 양성하기 위한 학교를 설립했다. 그리고 여가 있는대로 손수 교회용의 귀중한 성물도 제작했다. 그때가지도 국왕과 그 후계자들은 가끔 그의 의견을 청하러 왔다. 나이 불과 69세인 엘리지오는 죽음이 임박해옴을 깨달았다. 때마침 주교좌 대성전을 건축 도중이었는데, 그는 ’빨리 공사를 완성하도록 하시오. 그렇지 않으면 나는 준공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하여 듣는 사람들을 놀라게했다. 그러나 엘리지오는 항상 명랑하게 걱정스러운 그들을 위로하며 '기뻐하십시오, 나는 이미 오랫동안 하느님 대전에 나아갈 날을 고대했습니다"하고 말했는데, 과연 얼마 안되어 세상을 떠났다. 임종 때 침대 주위에 모인 이들에게 서로 사랑할 것과 또한 빈민을 가련하게 여겨줄 것을 거듭 강조하며 부탁했다 한다. (대구대교구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