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암브로시오](http://info.catholic.or.kr/pds/include/readImg.asp?gubun=&seq=&id=5934&filenm=24191502%2Ejpg&maingroup=)
성 암브로시오 (St.Ambrose) 주교, 교부, 교회학자
성인의 활동지역 : 밀라노(Milano)
성인의 활동연도 : 339-397년
성인과 같은이름 : 암브로시우스, 앰브로스
성 암브로시우스(Ambrosius, 또는 암브로시오)는 갈리아(Gallia)의 지방 장관으로
재직한 아우렐리우스의 아들로 339년 독일 남서부 트리어(Trier)에서 태어났다.
그는 부친이 사망 후 로마(Rome)에서 인문 교육을 받아 수사학과 법학 외에
그리스어에도 능통하였다.
가문의 전통에 따라 그는 국가 관리의 길을 택해 뛰어난 실력과 좋은 가문을 배경으로
빨리 출세하였다.
시르미움(Sirmium, 오늘날 유고슬라비아의 미트로비카)의 지방 법원에서 잠시 근무를
하다가 지방 장관 프로부스(Probus)의 고문이 되었고, 그의 추천으로 370년에 에밀리아
리구리아(Aemilia-Liguria)의 수도인 밀라노의 집정관이 되었다.
암브로시우스가 그 지방을 다스리던 때 밀라노에는 서방 교회 아리우스주의(Arianism)의
대표자인 아욱센티우스(Auxentius)가 주교로 있었다.
아욱센티우스는 발렌티니아누스 1세 황제의 도움으로 교회에서 파문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죽을 때까지 밀라노의 주교로 재직하였다.
그러나 그가 죽자 후임자를 선출하는 과정에서 아리우스주의자들과 정통 교리를 따르는
신자들 사이에 격렬한 대립이 발생하였다.
집정관인 암브로시우스는 밀라노의 질서 회복을 위해 이 문제에 개입하였다.
아리우스주의자들과 정통 교리를 따르는 신자들을 중재하면서 암브로시우스는 성당에
모여 있던 신자들에게 평화적 방법과 대화를 통해 화해를 추구하자고 연설을 하였다.
이때 뜻밖에 시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로 암브로시우스가 주교로 선출되었고 그는 할 수
없이 수락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암브로시우스는 세례를 받지 않은 예비신자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니케아(Nicaea) 공의회의 결정을 따르는 주교로부터 세례성사를 받은 뒤,
8일 후인 373년 12월 7일 주교품을 받았다.
주교직은 막중한 책임이 따르는 지위이다. 그리고 밀라노는 로마제국 서부 지역의
행정적인 중심지였기 때문에 주교 역시 불가피하게 정치에 개입되어 있었다.
홍수처럼 밀려드는 개종자들, 수없이 많은 이교도들 그리고 아리우스 이단에 동조하는
그리스도인들 등 모든 문제를 새 주교인 암브로시우스가 해결해야만 했다.
주교가 된 후 성 암브로시우스는 자신의 부족함을 고백하며 자신의 모든 재산을 가난한
이들을 위해 희사하고, 수도자와 같이 청빈과 극기의 생활을 하면서 신학, 성서 등을
연구하였다.
그에게 신학을 가르쳐 준 사람은 훗날 그의 후계자가 된 심플리키아누스(Simplicianus)
신부였다.
그는 오래지 않아 당대의 유명한 설교자가 되었고, 아리우스를 반대하는 서방 교회의
가장 영향력 있는 지도자가 되었다.
성 암브로시우스가 주교품을 받은 지 약 1년 만에 발렌티니아누스 1세 황제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그라티아누스가 황제가 되었다. 새 황제의 고문관이 된 암브로시우스는 황제를
설득하여 니케아 신앙 고백을 따르도록 하고 서방에서 아리우스파를 축출하는 법안을
만들게 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황제가 전투에서 막시무스에게 살해되자 암브로시우스는 또 다시
막시무스를 설득하였다.
또한 그는 로마의 원로원 회의실에 승리의 여신상과 제단을 재건하려는 로마 시 집정관
심마쿠스(Symmachus) 일파의 시도를 분쇄하는데 성공하였으며, 3
85년에는 발렌티니아누스 2세의 어머니로 아리우스주의 추종자인 황후 유스티나에 의해
일단의 무리들에게 밀라노의 성당들을 아리우스주의자들에게 내주라고 명한 발렌티니아누스
황제의 명령에 성공적으로 저항하였다.
390년 테살로니카인들이 폭동을 일으켜 로마 총독을 살해하자 그에 대한 징벌로써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가 군인들에게 진압을 명령했을 때, 군인들의 무차별 진압으로
7,000명이 살해당하였다.
이에 성 암브로시우스는 황제에게 범죄의 중대함을 알리는 편지를 썼다.
그 편지에서 암브로시우스는 참회의 필요성을 깨닫게 하고 공식 참회 행위로 보속해야만
용서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황제는 이에 순순히 응해 성탄 때 제복을 벗고 참회복으로 갈아입고 통회하였다.
암브로시우스는 항상 다음과 같은 원칙 밑에서 행동하였다.
“황제는 교회 안에 있다. 그는 교회 위에 있을 수 없다.”
393년 발렌티니아누스 2세가 갈리아에서 아르보가스투스들에 의하여 살해되었는데,
그들의 대표자 에우게니우스는 우상 숭배를 재건하려고 시도하는 무리들이었다.
성 암브로시우스는 그들의 살인과 공격을 공개적으로 비난함으로써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마침내 제국 내에서 우상 숭배를 완전히 없애버렸다.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수개월 후에 죽게 되자, 성 암브로시우스가 그의 장례 때 기도하고
설교하였다. 성 암브로시우스도 그 후 2년 뒤에 밀라노에서 운명하였다.
성 암브로시우스는 초기 교회의 가장 위대한 인물 가운데 한 분이며, 로마 제국이 쇠퇴해
가던 서방 세계에서 그리스도 교회의 부흥을 새로운 단계에 돌입시킨 분이시다.
또한 세속의 권위에 대항하여 교회의 독립과 자주성을 옹호했던 행정가이면서도 성서,
신학, 신비신학 등 설교를 중심으로 설파한 그의 지식 또한 괄목할만하였다.
그는 설교를 통해 이단에 빠져있던 성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8월 28일)를 이끌어
가톨릭 신앙을 고백하도록 했으며, 387년 그에게 세례를 주었다.
이 사건은 그 당시의 사회를 온통 뒤흔들어 놓은 놀라운 일이었다.
그래서 성 암브로시우스는 성 아우구스티누스, 성 히에로니무스(Hieronymus, 9월 30일),
교황 성 대 그레고리우스 1세(Gregorius I, 9월 3일)와 함께 서방 교회의 4대 교부
가운데 한 분으로 추앙받는다.
또한 그의 저서 중에 “신비에 대해서”란 책이 있는데, 여기서는 주로 세례, 견진
그리고 성체에 대한 글이 실려 있다.
그는 시편을 대중적인 찬미의 기도로 활용하도록 가르친 첫 번째 인물이다.
그의 주요 저서로는 “성직자들의 직무론”(De Officiis Ministrorum), “동정녀”
(De Virginibus), “신앙론”(De Fide) 등이 있다.
***********************************************************************************
암브로시오의 전기 작가 가운데 한 사람은 그의 최후 심판 때에, 사람들은 암브로시오를
칭찬하는 쪽과 그를 진심으로 싫어하는 쪽으로 나누어졌을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그 시대 사람들의 생활에 깊은 흔적을 남긴 행동가로 부각된다.
왕족들까지도 암브로시오의 가르침에 맞서다가 하느님의 무서운 벌을 당해야 했던
사람들에 속한다.
유스티나 황후가 암브로시오가 관리하던 가톨릭 교회내에 있는 두 개의 대성당을
아리우스 이단에게 주기 위해 강제로 빼앗으려고 했을 때 암브로시오는 그것을 집행하러
온 군인들과 대항하여 맞섰다.
그때 그의 신자들은 그와 함께 황제의 군대에 맞서려고 정렬해 있었다.
이러한 반란의 와중에서도 그는 자극적인 동방의 가락에 맞춘 새로운 찬미가를 지어
신자들을 매혹시켰으며 그들을 자극하기도 하고 진정시키기도 하였다.
그는 황제와의 논쟁에서 "황제는 교회 안에 있는 것이지 교회 위에 있는 것이 아니다."
라고 그를 반박했다.
그는 7천명의 무죄한 사람들을 학살한 테오도시우스 황제를 공적으로 비난했으며,
황제는 자기 죄를 깨닫고 공적 참회를 했다.
암브로시오가 로마 총독으로 밀라노에 파견되었을 때 아직 예비 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은 그를 주교로 선출하였다.
암브로시오는 넓은 이마에 커다란 눈과 길고 우울한 듯한 얼굴을 가진 키가 자그마하고
정열적인 사람이었다.
우리는 성서를 안고 있는 허약한 모습으로 그려진 그를 볼 수 있다.
그는 귀족적인 바탕과 학자의 모습을 지닌 사람이었다.
암브로시오에게는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영향을 준 또 다른 면이 있다.
아우구스티노는 암브로시오의 설교가 그 당시에 행하던 다른 사람들의 설교보다 더
훌륭하지도, 재미있지도 않았지만 그가 다른 사람보다 휠씬 박식하다는 것을 알았다.
암브로시오의 설교는 대개 키케로를 모델로 한 것이지만 그의 사상은 당시의 사상가나
철학자들의 영향을 벗어난 것이었다.
그는 이방인의 이야기를 인용하는 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방인의 철학자들에게서 인용한 ’이집트 인들의 황금’이라는 이야기를
자신의 강론에서 할 수 있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했다.
그의 설교와 저술 그리고 그의 개인 생활을 보면 마치 그가 그당시의 크나큰 문제에
파묻혀 있는 ’다른 세계’의 사람처럼 생각된다.
암브로시오에게는 인간이란 무엇보다도 먼저 영(靈)이었다.
하느님과 인간 영혼을 올바르게 생각하기 위해서는 하느님께 가장 가까운 것, 물질적
요소가 전혀 없는 선을 생각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는 축성된 동정성을 열정적으로 옹호한 투사였다.
아우구스티누스에 대해 암브로시오의 영향력은 언제나 논쟁의 대상이 될 것이다.
’고백록’은 암브로시오와 아우구스티누스 사이에 있었던 몇 가지 대담하고 갑작스러운
대립을 보여 주지만 박학한 주교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깊은 존경은 의심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모니카가 자기의 아들을 과거의 생활 방식에서 벗어나 그리스도께 대한 확신으로
인도한 암브로시오를 하느님의 천사처럼 사랑했다는 것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우구스티누스가 그리스도를 입기 위하여 세례반으로 내려갈 때에
아우구티누스의 벗은 어깨에 손을 올려놓은 것은 바로 암브로시오였다는 말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