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ily/★ 빠다킹 신부님과 새벽을..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관대합시다.

ohjulia 2007. 1. 4. 05:46
2007년 1월 4일 주님 공현 전 목요일

제1독서
요한1서 3,7-10
자녀 여러분, 아무에게도 속지 마십시오. 의로운 일을 실천하는 이는 그분께서 의로우신 것처럼 의로운 사람입니다. 8 죄를 저지르는 자는 악마에게 속한 사람입니다. 악마는 처음부터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악마가 한 일을 없애 버리시려고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9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죄를 저지르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씨가 그 사람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느님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10 하느님의 자녀와 악마의 자녀는 이렇게 뚜렷이 드러납니다. 의로운 일을 실천하지 않는 자는 모두 하느님께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도 그렇습니다.


복음 요한 1,35-42
그때에 35 요한이 자기 제자 두 사람과 함께 서 있다가, 36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눈여겨보며 말하였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37 그 두 제자는 요한이 말하는 것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갔다.
38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 “무엇을 찾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라삐’는 번역하면 ‘스승님’이라는 말이다.
3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보아라.” 하시니, 그들이 함께 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날 그분과 함께 묵었다. 때는 오후 네 시쯤이었다.
40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간 두 사람 가운데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였다. 41 그는 먼저 자기 형 시몬을 만나,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하고 말하였다. ‘메시아’는 번역하면 ‘그리스도’이다.
42 그가 시몬을 예수님께 데려가자, 예수님께서 시몬을 눈여겨보며 이르셨다.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구나. 앞으로 너는 케파라고 불릴 것이다.” ‘케파’는 ‘베드로’라고 번역되는 말이다.




영국의 유명한 문인 찰스 램이 잘 알고 지내던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평생 동안을 혼자 살았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젊은 날의 아픈 경험 때문이라고 하네요.

그는 청년 시절, 한 여인을 깊이 사랑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청혼을 하기 위해 사랑하는 여인의 집을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녀가 자신의 청혼을 받아줄 것으로 굳게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 집에 도착해 문을 두드리자 하인이 나와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어요.

“아가씨가 이제 더 이상 당신을 만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그 청년은 마음에 깊은 상처를 안고 집으로 돌아와 그녀에게 자신을 거절한 이유를 알려 달라는 편지를 썼습니다. 그 여인으로부터 온 회답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나는 당신을 기다리며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당신이 오는 것을 보고 나는 기뻤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길에서 일하고 있던 한 여인을 밀치고 그냥 지나쳐 버리더군요. 당신은 넘어진 그 여인을 부축해 주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때 이미 당신에게 내 한평생을 맡길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불쌍한 여인에게 친절을 베풀 수 없는 사람이라면, 나에게도 진정한 사랑을 베풀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이 글을 보면서 가슴 깊은 반성을 하게 됩니다. 저 역시 이렇게 친절한 행동을 하지 못했음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사실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관대한 사람이야말로, 어쩌면 한 사람을 소중하게 여길 줄 아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한테는 아름다운 마음의 향기를 느낄 수가 있겠지요. 그런데 우리들은 특별한 사람에게만 친절하려고 하고, 관대하려고 할 때가 참으로 많았던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당신을 따라오는 사람에게 묻습니다. “무엇을 찾느냐?”

그런데 이에 따른 그들의 대답이 재미있습니다.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하지만 이에 따른 예수님의 대답도 참 엉뚱하지요. “와서 보아라.”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하기 위해서 어디에 묵고 계신지를 물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장소를 구체적으로 언급하신 것이 아니라, “와서 보아라.”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직접 따라야 함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즉, 당신이 직접 이끌어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직접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을 실천하면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과연 어떠한가요? 편한 사랑을 하려 하고, 나에게 이익이 되는 사랑을 실천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러한 사랑의 실천은 주님을 절대로 기쁘게 하지 못합니다. 앞선 예화에 등장하는 청년이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에게 퇴짜를 맞듯이, 우리의 실천하지 못하는 사랑을 보시고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퇴짜를 놓으실 것입니다.

“와서 보아라.”라는 주님의 말씀. 바로 지금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는 주님의 경고임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관대합시다.



배려가 아름다운 사람('좋은 글' 중에서)


배려가 아름다운 사람.
그런 사람이 참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나의 자유가 소중하듯이...
남의 자유도
나의 자유와 똑같이 존중해주는 사람.

남이 실수를 저질렀을 때...
자기 자신이
실수를 저질렀을 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그 실수를 감싸안는 사람.

남이 나의 생각과 관점에 맞지 않다고 해서
그것을 옳지 않은 일이라 단정짓지 않는 사람.

나의 사랑이 소중하고 아름답듯...
그것이 아무리
보잘것없이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타인의 사랑 또한
아름답고 값진 것임을 잘 알고 있는 사람.

잘못을 저질렀을 때는...
"너 때문에" 라는 변명이 아니라
"내 탓이야" 라며...
멋쩍은 미소를 지을 줄 아는 사람.

기나긴 인생 길.
결승점에 일등으로 도달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억누르기보다는...
비록 조금 더디 갈지라도...
힘들어하는 이의 손을 잡아 당겨주며
함께 갈 수 있는 사람.

받은 것들을 기억하기보다는...
늘 못다 준 것을 아쉬워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참으로 아름다운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