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Lord/† 聖人들의 삶을 통해서

성녀 콜레타 (2월 7일) 동정

ohjulia 2007. 2. 7. 07:51
 성녀 콜레타
 

    성녀 콜레타 (St. Coletta )

    성인의 활동지역 : 프랑스(France) 성인의 활동연도 : 1381년-1447년 성인과 같은이름 : 꼴레타, 꼴레따 프랑스 건르비 태생인 꼴레따는 그녀의 어머니의 열렬한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그녀는 신심 활동에 커다란 기쁨을 느꼈으며 부모가 죽은 후에는 은둔소로 숨어들었다. 여기서 그녀는 많은 천상 위로를 받았으며 동시에 매우 엄격한 고행 시련들에 의하여 정화되고 신앙은 굳건해졌다. 꼴레따는 하느님의 감도하심을 받아 은둔 생활을 버리고 프랑스 전역에 엄격한 규율을 지키는 "가난 글라라" 수도원을 설립하기 시작했다. 생존 중에 17 개의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그녀는 사랑, 참회, 겸손, 온유의 모범을 보이며 살다가 1447년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작은형제회홈에서) 콜레타는 1381년 1월 13일 작은 마을 코르비에서 모범적인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어머니의 끊이지 않은 기도의 응답으로 은총을 받고 태어난 아이였다.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를 낳을 때 이미 60살이었으며 그때까지 아이가 없었다. 기도로 태어난 탓인지 어린 소녀는 기도하는 것을 기뻐하였으며 가난한 사람들을 동정하며 엄격한 생활을 지키며, 자신의 영혼과 육신을 하느님께 희생 제물로 바쳤다. 14살이 될 때까지 그녀는 이상하리만큼 키가 작아서 이 때문에 그녀의 아버지는 크게 상심하였다. 콜레타는 하느님께 아버지를 위로해 주시길 간청하였다. 그 후 그녀는 매우 빨리 자라기 시작하여 정상적인 키가 되었다. 한편 그녀는 하느님께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위험에 처하게 할지도 모를 자신의 빼어난 미모를 가져가시라고 기도하였다. 이 요구도 받아들여져서 매우 심한 외모로 자랐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에 존경을 보여 주었다. 22세 때 부모가 죽자 교회의 허락을 얻어 교회 바로 옆에 조그만 곳에 혼자 갇혀 지냈다. 방의 조그만 창문을 통해 복된 성체를 볼 수 있었다. 그녀는 그곳에서 여생을 은수자로 살고 싶어 하였다. 그녀는 성 프란치스코 3회 회칙을 받아서 나날이 더욱 세라핌적 사부를 닮고자 회칙에 따른 완전한 가난, 극심한 극기와 끊임없는 기도 안에서 살려고 열망하였다. 18세가 되던 어느 날 기도에 열중하고 있을 때 사람들이 죄를 짓는 것을 무척 슬퍼하시는 것만 같은 형상으로 예수님과 성 프란치스코가 나타나셨다. 그때 프란치스코 성인은 주님을 향해 “콜레타에게 죄인을 위한 보속과 성녀 클라라 수도원의 개혁을 맡기면 어떻겠습니까?”하고 말씀드렸고 주님께서는 쾌히 승낙하셨다. 전능하신 하느님은 성녀 클라라의 회칙의 엄격한 준수를 재도입하고자 하는 열망을 그녀 마음 안에 불러일으키려 하셨던 것이다. 당시 많은 클라라 수도원들은 완화된 형식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이 개혁에 관한 생각이 악의 세력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하여 계속 거부하였다. 그러자 그녀는 벙어리와 장님이 되었고 다마스커스의 사울처럼 결국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고는 “주님 제가 무엇을 하길 원하십니까?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무엇이나 하겠나이다.”라고 했다. 그러자 그녀는 즉시 말문이 열리고 눈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 후 그녀는 가난한 클라라회를 하나씩 설립하여 생전에 17개나 세웠다. 그녀의 사후에 프랑스가 아닌 여러 나라에서도 비슷한 수도회가 설립되어 성 클라라의 초기 회칙이 새로이 번창하였다. 그녀의 기도의 응답으로 또 그녀의 사업을 확인해 주는 것으로서 죽은 사람들이 되살아나는 것을 포함하여 무수한 기적들이 일어났다. 40년 동안 열심히 일하다가 그녀는 1447년 3월 6일 겐트에 있는 수도원에서 숨을 거두었는데 그녀가 이 세상을 떠나는 순간 여러 수도원에 있는 여러 수녀들에게 동시에 나타났다. 우리바노 8세 교황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으며 1807년 비오 7세 교황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재속프란치스코 한국 국가형제회홈에서) 프랑스 피카르디의 코르비에 사는 목수의 딸인 그녀는 1381년 1월 13일에 태어나 니콜레뜨라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으나, 흔히 콜레타로 불렀다. 17세 때 천애 고아가 되어, 그녀는 자신의 유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 뒤에 프란치스꼬 3회원이 되었으며, 코르비에서 독수자로 생활하였다. 21세 때부터 콜레타는 코르비의 원장이 빌려 준 은둔소에서 홀로 살아왔는데, 이곳에서 이씨시의 성 프란치스꼬의 환시를 보았다. 이때 성 프란치스꼬는 당신의 가난한 부인회(글라라회)가 엄격하던 그들의 원회칙에 따라 살도록 인도하라는 명을 내렸다고 한다. 이 당시에는 이미 그녀의 성덕과 영적 지혜가 널리 알려지고 있었다. 그녀는 글라라회의 개혁을 지시하는 환시에 응답하려고 자신의 은둔소를 떠나서, 앙리 드 바움 형제의 권고에 따라 교황청 책임자인 베드로 드 루나를 면담하기 위하여 1406년에 니스로 갔다. 드 루나 역시 깊은 감명을 받고, 그녀가 글라라회의 입회를 허락하고, 기존 수도원의 개혁과 새로운 수도원 설립을 위임하였다. 처음에 그녀는 피카르디와 사보이의 수녀들로부터 심한 반대를 받았으나, 1410년 부터 앙리드 바움의 지지를 얻어서 개혁 사업은 점차 성공하기 시작하였다. 그녀는 프랑스와 플랑데르 지역 내에 엄격한 규칙을 지키는 수도원을 17곳이나 세웠고, 러 퓌이-앙-블레의 한곳을 포함하여 기존의 다른 수도원을 개혁하였다. 콜레타는 무슨 일을 수행하도록 훈련받거나 준비한 일은 없었지만, 믿음의 힘과 성덕 그리고 아무도 거스르지 못하는 결정에 따라 일을 올바르게 성취하였던 것이다. 그녀는 다시 자주 탈혼에 빠졌고, 고난에 대한 환시를 보았으며, 겐트 수도원에서 자신이 죽으리라는 예언을 하였다. 콜레타의 개혁 글라라회는 프랑스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는 세계 도처에 산재해 있다. 그녀는 1807년에 시성되었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