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시의 프란치스코 대 성당
프란치스꼬가 죽은지 2년이 지난 후인 1228년 3월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성인의 뜻을 기리고 성인의 유해를 잘 보전하기 위해 성인을 위한 무덤 성당을 짓도록 명하였다. 1228년 7월 17일 프란치스꼬의 시성식이 있는 직후, 그레고리오 9세 교황은 엘리야 수사에게 공사의 책임을 맡기면서 성인이 새로 묻히게 될 대 성전의 머릿돌을 축성하였다. 성당은 예루살렘에 있는 그리스도의 무덤을 본 딴 양식으로 성인의 유해를 담은 관을 중심으로 성당을 지었다. 성당은 겉의 모양뿐만 아니라 성당이 지닌 의미 또한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살아 생전 프란치스꼬는 당시에 '지옥의 언덕'이라 불리던 곳을 자신이 무덤으로 선택하였다. 이곳은 중세가 지날 때까지 법정 최고형인 사형을 집행하던 장소로 도시의 성 벽 밖에 위치해 있었다. 복음서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처한 장소는 도시밖에 위치해 "해골산"(마태 27,32; 마르 15,21; 요한 19,17)이라고 불렀듯이, 아씨시 역시 교수대가 있던 언덕은 도시의 서쪽에 위치한 성 벽 밖에 있었던 것이다. 프란치스꼬는 백성들에게는 형벌이 이루어져 혐오감을 주는 곳이지만, 복음으로 회심한 프란치스꼬에게 있어서 이곳은 그가 본받아야 할 전형인 그리스도의 수난을 지속적으로 상기시키는 곳이 되었다. 오직 성인의 뜻만이 교황 그레고리오 9세, 엘리야 수사의 마음을 움직이게 할 수 있었고, 처형장을 도시의 다?곳으로 옮기게 함으로서 아씨시의 서쪽 언덕 위에 대성당을 지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성 프란치스꼬의 무덤은 예루살렘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무덤 성당과 유사하다.
1230년에 무덤과 아래층 성당의 형태가 완성되자 바로 성인의 유해를 모셔올 계획에 따라 5월 25일에 이장하였으며, 아래층과 위층으로 된 2층 구조의 이 대성당은 1253년 5월 25일 교황 인노첸시오 4세에 의해 장엄하게 축성되었다. 여러 세기를 통하여 이 대성당을 온 세상의 수 많은 순례자들의 목적지가 되어 왔다.
출처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