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ily/★ 빠다킹 신부님과 새벽을..

현실 속에 비할 데 없이 ....그 어디에도 없다

ohjulia 2009. 1. 2. 09:43

2009년 1월 2일 공현 전 금요일

제1독서 요한 1서 2,22-28

사랑하는 여러분, 22 누가 거짓말쟁이입니까?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사람이 아닙니까? 아버지와 아드님을 부인하는 자가 곧 ‘그리스도의 적’입니다. 23 아드님을 부인하는 자는 아무도 아버지를 모시고 있지 않습니다. 아드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사람이라야 아버지도 모십니다.
24 여러분은 처음부터 들은 것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 처음부터 들은 것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면, 여러분도 아드님과 아버지 안에 머무르게 될 것입니다. 25 이것이 그분께서 우리에게 하신 약속, 곧 영원한 생명입니다. 26 나는 여러분을 속이는 자들과 관련하여 이 글을 씁니다.
27 그러나 여러분은 그분에게서 기름부음을 받았고, 지금도 그 상태를 보존하고 있으므로, 누가 여러분을 가르칠 필요가 없습니다. 그분께서 기름부으심으로 여러분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십니다. 기름부음은 진실하고 거짓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 가르침대로 그분 안에 머무르십시오.
28 그러니 이제 자녀 여러분, 그분 안에 머무르십시오. 그래야 그분께서 나타나실 때에 우리가 확신을 가질 수 있고, 그분의 재림 때에 그분 앞에서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복음 요한 1,19-28

19 요한의 증언은 이러하다. 유다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사제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당신은 누구요?” 하고 물었을 때, 20 요한은 서슴지 않고 고백하였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하고 고백한 것이다. 21 그들이 “그러면 누구란 말이오? 엘리야요?” 하고 묻자, 요한은 “아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그 예언자요?” 하고 물어도 다시 “아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2 그래서 그들이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우리가 대답을 해야 하오. 당신은 자신을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이오?”
23 요한이 말하였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24 그들은 바리사이들이 보낸 사람들이었다. 25 이들이 요한에게 물었다. “당신이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그 예언자도 아니라면, 세례는 왜 주는 것이오?”
26 그러자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27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28 이는 요한이 세례를 주던 요르단 강 건너편 베타니아에서 일어난 일이다.




1500년경 이탈리아의 밀라노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날 매우 신비스러운 미소를 띤 아름다운 여인이 도시에서 꽤 이름난 화가를 어렵게 만났습니다.

“그림 값은 얼마든지 드릴 테니 제 초상화를 그려주시겠습니까?”

여인을 본 화가는 거만한 태도를 보이며 이렇게 말했다고 해요.

“나는 너무 바빠 그림을 그릴 수 없습니다. 저기 길 건너 초라한 곳에 가면 일거리가 필요한 화가가 있소. 그 사람에게 가보시오.”

초라한 곳에서 일거리를 필요로 했던 화가는 누구였을까요? 그는 바로 레오나르도 다빈치였습니다. 그리고 신비로운 미소를 띤 아름다운 여인은 모나리자였지요.

우리는 이 일화를 통해, 교만한 화가에게서는 아름다운 것이 나오지 않고 겸손한 화가로부터 유명한 명작이 나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즉, 겸손한 사람을 하느님께서는 쓰시며, 우리 역시 이렇게 겸손한 사람으로 살아가길 바라십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겸손한 사람보다는 교만한 사람이 되기를 원했던 것은 아니었는지 반성하게 됩니다. 즉, 낮은 자리보다는 높은 자리를 좋아했으며, 남을 섬기기보다는 남에게 섬김을 당하기를 원했던 우리였던 것이지요. 그러다보니 우리를 쓰려는 주님의 이끄심을 제대로 응답하지 못하게 됩니다. 세상의 유혹은 주님의 이끄심보다도 훨씬 더 매혹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이끄심을 제대로 따르지 않음은 참된 행복과는 점점 멀어지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어떻게 사는 것이 겸손한 사람인지를 자신의 삶으로 직접 보여주었던 한 인물을 만납니다. 그는 바로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주던 세례자 요한이지요. 사실 당시의 사람들은 요한이 그리스도 또는 엘리아, 그리고 그도 아니면 예언자가 아닐까 싶었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모두 인정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맞다는 한 마디 대답만 있어도, 또한 이렇게 말하는 것에 약간 죄책감을 느낀다면 아무런 답변도 하지 않고 그냥 가만히만 있어도 사람들은 그를 그리스도로 아니면 엘리아나 예언자라고 확신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보답으로 세례자 요한에게 최고의 존경과 사랑을 던졌을 것이지요.

그러나 그는 솔직하게 답변을 합니다. 단지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라고 말하면서, 자기보다 뒤에 오실 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면서 가장 겸손한 자세를 취하십니다.

그러한 겸손함이 바로 하느님의 선택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 겸손함으로 인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을 준비하는 가장 큰 역할을 담당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역시 이 세상 안에서 이러한 겸손함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의 선택을 받을 수 있으며, 주님 안에서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현실 속에 비할 데 없이 아름다운 것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아직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 현실의 삶 그 자체에서 보여주는 것과 같이 그렇게 변화를 거듭하며 새로워지는 예측불허의 환상적 아름다움은 그 어디에도 없다.(베레니스 애벗)



행복의 옷(‘행복한 동행’ 중에서)

많은 것을 가졌지만 결코 행복하지 않은 왕이 있었다. 어느 날 왕은 스승을 찾아가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을 물었다. 왕의 고민을 들은 노스승이 이렇게 말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자의 옷을 입으시면 됩니다.”

다음 날, 왕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자의 옷을 가져오라는 방을 나라 곳곳에 붙였다. 그러나 그 누구도 자신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나서는 이가 없었다. 기다리다 못한 왕이 홀로 짐을 꾸려 찾아 나섰지만 어느 곳에서도 행복을 자처하는 사람을 만날 수가 없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잠을 청하던 어느 날, 왕은 멀지 않은 곳에 들려오는 아름다운 피리 소리에 잠이 깼다. 왕은 소리가 나는 쪽으로 다가가 피리 부는 사람에게 물었다. “너무도 아름다운 피리 소리요. 무척 행복하게 들리는데, 당신 마음도 그 연주처럼 행복하오?” 그러자 피리를 불던 사내가 말했다. “그럼요,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거든요.” “당신의 옷을 내게 파시오! 돈은 얼마든지 주리다!” 왕이 기쁨에 겨워 말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의외였다. “나는 당신에게 줄 옷이 없어요. 어두워서 보이지 않겠지만, 나는 지금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아요. 어제 지나가던 불쌍한 거지에게 마지막 남은 옷을 적선하고 말았답니다.”

왕은 그제야 스승이 말한 ‘행복해지는 옷’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행복은 무엇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가진 것을 남과 함께 나눌 수 있는 마음의 기쁨이었다. 왕궁으로 돌아간 왕은 그동안 쌓아 둔 재산을 풀어 가난한 백성을 구제했다. 그리고 진정 행복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