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ily/★ 빠다킹 신부님과 새벽을..

이제 우리 주변에서 계속해서 보이는 주님의 사랑을 발견하고 느끼도록 ..

ohjulia 2009. 1. 22. 08:33

2009년 1월 22일 연중 제2주간 목요일

제1독서 히브리 7,25 ─ 8,6

형제 여러분, 25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통하여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을 언제나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늘 살아 계시어 그들을 위하여 빌어 주십니다.
26 사실 우리는 이와 같은 대사제가 필요하였습니다. 거룩하시고 순수하시고 순결하시고 죄인들과 떨어져 계시며 하늘보다 더 높으신 분이 되신 대사제이십니다. 27 그분께서는 다른 대사제들처럼 날마다 먼저 자기 죄 때문에 제물을 바치고 그다음으로 백성의 죄 때문에 제물을 바칠 필요가 없으십니다. 당신 자신을 바치실 때에 이 일을 단 한 번에 다 이루신 것입니다. 28 율법은 약점을 지닌 사람들을 대사제로 세우지만, 율법 다음에 이루어진 맹세의 그 말씀은 영원히 완전하게 되신 아드님을 대사제로 세웁니다.
8,1 지금 하는 말의 요점은 우리에게 이와 같은 대사제가 계시다는 것입니다. 곧 하늘에 계신 존엄하신 분의 어좌 오른쪽에 앉으시어, 2 사람이 아니라 주님께서 세우신 성소와 참성막에서 직무를 수행하시는 분이십니다.
3 모든 대사제는 예물과 제물을 바치도록 임명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대사제도 무엇인가 바칠 것이 있어야 합니다. 4 만일 그분께서 세상에 계시면 사제가 되지 못하십니다. 율법에 따라 예물을 바치는 사제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5 모세가 성막을 세우려고 할 때에 지시를 받은 대로, 그들은 하늘에 있는 성소의 모상이며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성소에서 봉직합니다. 하느님께서 “자, 내가 이 산에서 너에게 보여 준 모형에 따라 모든 것을 만들어라.” 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6 그런데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더 훌륭한 직무를 맡으셨습니다. 더 나은 약속을 바탕으로 세워진 더 나은 계약의 중개자이시기 때문입니다.


복음 마르 3,7-12

그때에 7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호숫가로 물러가셨다. 그러자 갈릴래아에서 큰 무리가 따라왔다. 또 유다와 8 예루살렘, 이두매아와 요르단 건너편, 그리고 티로와 시돈 근처에서도 그분께서 하시는 일을 전해 듣고 큰 무리가 그분께 몰려왔다. 9 예수님께서는 군중이 당신을 밀쳐 대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시려고, 당신께서 타실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10 그분께서 많은 사람의 병을 고쳐 주셨으므로,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은 누구나 그분에게 손을 대려고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11 또 더러운 영들은 그분을 보기만 하면 그 앞에 엎드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12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곤 하셨다.




성당에 처음 나온 사람이 신부님을 찾아와 물었습니다.

“신부님, 오늘 복음을 보니까 예수님께서는 예전에 많은 기적을 일으키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기적을 보려고 구름같이 몰려들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왜 지금은 계속하지 않으시나요? 그 기적들이 지금도 계속된다면 이 성당에 발 들여 놓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몰려올 텐데요.”

이 사람을 바라보면서 신부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형제님, 사실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매일같이 기적을 행하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너무 바빠서 그것들을 바라볼 여유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일이 너무 많아서 주님께서 그들의 길 위에 심어놓은 꽃 한 송이, 그들에게 뿌려주는 비 한 방울조차 눈치 채지 못하더군요. 그것이 바로 기적인데 말이지요.”

우리 주변에는 기적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거창한 기적만을 바라보려고 합니다. 어쩌면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커다란 기적이며 행복인데도 우리들은 대단한 기적만을 찾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모여들지요. 그들은 예수님께서 그동안 보여주었던 놀라운 기적들을 보고서 쫓아왔던 것이지요. 예수님만 따른다면 병에 걸릴 염려도 없고, 더 이상 배고플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더러운 영을 가진 이들이 예수님을 향해 소리를 지릅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맞는 말일까요? 틀린 말일까요? 분명히 맞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정답을 말하는 더러운 영을 가진 사람들에게 왜 함구령을 내리실까요? 바로 사람들이 당신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놀라운 기적이나 행하는 분, 배고프지 않고 아프지 않도록 하는 분, 그래서 편안하게 이 세상을 살 수 있도록 해주는 분으로만 이해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더러운 영을 가진 사람들이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정답을 말하지만, 이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볼 수 없도록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착각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말하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신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고자 하는 주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 역시 더러운 영이 말하는 정답에 속아서 주님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게 됩니다.

이제 우리 주변에서 계속해서 보이는 주님의 사랑을 발견하고 느끼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때 우리들은 더러운 영의 말에 속지 않고 주님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의 영광이 어디서 시작되고 어디서 끝나는지 생각하고, 그러한 친구들이 있어서 영광이었다고 말하노라.(W.B.예이츠)



세 가지의 눈(‘좋은 글’ 중에서)

우리에게는 세 가지 눈이 필요합니다.

첫 번째는 자기를 보는 눈입니다. 나는 지금 무엇을 원하고 있는가? 내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두 번째는 남을 보는 눈입니다. 다른 사람이 내게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가를 알고, 자신의 중심을 잃지 않으면서 그들과 조화를 이루어나갈 때 건강한 인간관계가 형성됩니다.

세 번째는 세상을 보는 눈입니다. ‘이 세상은 지금 어떻게 변해가고 있는가?' ‘나는 이 세상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보는 눈입니다.

개인이 속해 있는 사회 전체가 성장하지 않는 한 개인의 성장은 한계가 있습니다.

먼저 나를 보고, 그 다음 다른 사람들을 보고, 더 나아가서 자신이 속한 사회 전체를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가질 때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의지와 힘을 기를 수 있으며 이상과 현실이 조화를 이루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