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istianity/† 생활 속의 교리들

십자가와 연꽃, 삶을 대하는 두 개의 상징

ohjulia 2010. 5. 17. 09:38

십자가와 연꽃, 삶을 대하는 두 개의 상징

 

다종교 사회인 한국의 종교들은 비교적 서로 평화롭게 공존해왔다. 최근 일부 보수적 개신교가 오로지 말씀을 ‘듣는’ 신앙에 몰입함으로써 천주교와 불교의 종교적 상징들을 우상으로 치부하고 훼손하는 일들도 간혹 있지만, 종교들 상호 간에 선의의 경쟁은 한국 문화의 특성이 되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천주교와 불교는 서로 통하는 면이 없지 않다. 신자들이 두 종교를 선택하는 가장 큰 이유는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이고, 성직자, 수도자들은 모두 독신으로 살며, 세상에 보이는 것을 넘어 보이지 않는 것을 찾는 영적 수행의 삶도 비슷하다. 교회와 사찰은 언제부터인지 성탄절과 석탄일이면 서로 축하 현수막과 메시지를 전달하고, 같은 수도자라고 수녀님들께는 불교 사찰에 공짜(?)로 입장하는 특혜도 준다. 시끄러운 도심을 떠나 고향처럼 포근한 자연 속의 산사와 고요함과 거룩함을 느끼게 해주는 성당에 들어설 때의 느낌도 비슷하다. 최근에는 불교의 선(禪)에 대한 천주교 신자들의 관심도 제법 커지고 있다.

 

그리스도교와 불교를 표현하는 가장 큰 상징은 십자가와 연꽃이다. 십자가와 연꽃은 우리가 사는 세상 뒤편에 있는 실재 세계를 해석하는 두 가지 다른 방식을 대표하는 강력한 종교적 상징들이다. 동시에 이 둘은 우리의 삶과 죽음에 관한 근본적인 의문에 관한 두 개의 다른 길을 보여준다.

 

먼저 그리스도교 신앙을 표현하는 가장 큰 상징은 십자가이다. 십자가는 인간이 처한 극한의 절망과 모순의 상징이다. 예수님은 이 십자가위에서 인간이 겪어야할 처절한 고통과 죽음의 쓴맛을 맛봤고, 군중들의 모욕과 야유, 단말마의 고통 속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하느님 아버지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마태 27, 46)라고 절규하셔야 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결코 부활의 영광을 이르는 과정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다. 한 치의 희망도 보이지 않을 듯한 그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까지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가 23, 46)라는 예수님의 신뢰에 찬 고백이 없었다면 부활은 그저 헛된 희망에 불과했을지 모른다. 예수님은 고통이 하나의 현실임을 보여주신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불교 신앙을 상징하는 연꽃은 십자가와는 사뭇 다르다. 연꽃은 더럽고 추하게 보이는 물에서 살면서도 그 더러움을 조금도 자신의 꽃이나 잎에는 묻히지 않으며, 물 위에 평온하게 떠서 단아하고 유순한 자태로 사람의 마음을 끈다. 연꽃은 불교의 세계를 표현하듯 진흙탕 같은 고통의 현실과는 무관하게 고고하게 꽃을 피우는 깨달음의 초연한 세상을 상징한다. 인생의 신비는 고통이지만, 그 고통이 인간의 집착하는 마음에서 온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참된 해탈의 출발점이라는 것을 가르치는 불교의 정신이 연꽃의 상징에 담겨 있는 것이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즉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려 있다는 불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고통이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 셈이다.

 

그러나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고통의 현실이 과연 그럴까? 불교가 가르치듯 고통은 마음의 집착에서 해방되는 것만으로 극복해낼 수 있는 것일까? 연꽃처럼 고통의 세계를 초월하여 깨달음의 삶을 추구하는 모습과 현실의 고통을 당당하게 맞서 있는 십자가는 서로 어떤 연관이 있을까?

 

우리가 바라보는 십자가는 연꽃과는 달리 힘 있고 고통스럽고 당당하게 땅 위에 솟아나 있다. 때로는 거칠고 험상궂고 비극적인 자태의 십자가가 우리의 눈에 거슬리는 것도 사실이지만, 십자가는 피할 수 없는 고통과 모순의 현실 세계를 있는 그대로 우리에게 보여주는 가장 역설적인 상징이다. 우리 주변에는 적지 않은 신자들이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의 현실을 회피하지 않고 자신의 십자가로 여기면서 기꺼이 짊어지려한다. 선천적 장애아를 키우는 어머니의 희생, 장애를 딛고 희망을 살아가는 이들, 가난 속에서도 비굴하지 않고, 절망의 상황 속에서도 자살이 아닌 제2의 인생을 살아가는 이들, 철거민들과 같이 소외된 이들의 애환을 몸으로 겪으며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 이들은 모두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4)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다. 십자가는 자신을 억누르는 고통의 상징이지만,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통이 회피할 대상이 아니라, 나의 약점과 모순을 짊어짐으로써 하느님께 바치는 희생 제물임을 가르쳐 주신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근래에는 불교가 그리스도교보다 현대인들에게 훨씬 더 매력적으로 보인다. 죄의 현실을 짊어짐으로써 하느님께 나아가려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현대인들에게는 짐스럽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마음의 수행을 통해 인간 마음의 집착을 벗어버리는 수행의 종교적 태도가 고통의 현실을 짊어지는 일보다는 훨씬 세련되고, 감성적인 현대인의 감각에 맞는 것 같기 때문이다. 연꽃의 아름다움에 비하면 십자가의 거침은 부담스럽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신앙의 아름다움은 모든 것을 마음의 문제로 보지 않고, 현실로 바라보는 독특한 영적 감각에 있다. 하느님의 사랑은 결코 깨달은 자의 연민의 마음이나 수행을 통해 얻은 정신적 평화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고통을 현실로 받아들이신 하느님의 인격적 결단 안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신”(필립 2, 7)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신다. 단순히 탐욕과 집착을 마음에서 떨쳐 버리는 마음 수행에 머물지 않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신” 예수님의 결단 속에서 십자가의 위대함이 드러난다.

 

그래서 십자가는 행동하는 신앙의 상징이다. 최근 4대강 개발 사업으로 인한 생태계 파괴를 막기 위한 오체투지와 단식기도나, 용산참사에서 사라진 인권을 지키기 위한 애쓰는 신앙인들의 모습 속에서 연꽃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고통과 모순의 현실 속에서도 희망을 노래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십자가를 더 아름답게 보고 싶은 것도 이 때문이 아닐까?

 

 

 

 

송용민 신부

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