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과 윤회는 어떻게 다른가요?
얼마 전 서거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유서에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이 아니겠는가?”란 문구가 있다. 검찰의 표적 수사와 양심의 자책감으로 사는 게 더 이상 사는 것이 아님을 비관한 그의 생의 마지막 말이었다. 사는 것도 죽는 것도 결국 자연의 순리이고, 못 이룬 생의 희망도 또 다른 생의 형태에서 이뤄질 것에 대한 희망이었다. 유명한 연예인, 가수, 영화배우 등과 같이 대중적이 인기는 얻었지만 불행한 생을 마감한 이들에게도 우리는 안타까움과 더불어 부디 ‘다음 생’에서는 그들이 더 행복하기를 바란다.
죽음 이후의 다음 생애. 한국 사회의 자살 신드롬 속에서 그들이 택하는 죽음은 한 번 주어진 자기 생의 결단이자 종결이 아닌 또 다시 시작될 다음 생을 위한 과정으로 미화되는 경우가 많다. 사채 빛에 내몰린 사람, 성적부진을 비관한 학생들, 상처받고 버림받은 사람, 벗어버릴 수 없는 가난에 몰린 사람. 이들은 모두 한 생을 마감하며, “다음 생에는 지금 보는 덜 고통스럽고 더 행복한 삶이 오기를” 희망한다.
OECD 국가들 중에서 자살률 1위의 불명예는 오랫동안 한국인의 종교 심성을 지배한 불교의 윤회설과 환생에 대한 막연한 믿음과 무관하지 않다. 생명은 돌고 도는 자연의 순리에 따라 어떤 형태로든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태어날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이 한국인의 심성에 녹아 있다. 이 믿음은 인생의 막다른 골목길에서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어 자포자기하는 이들에게도 해당된다. 비록 명확하지는 않지만, 지금의 불행한 인생이 마감되면 어떤 형태로든 지금보다는 더 나은 다음 생에 대한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교의 윤회는 단순히 생명의 순환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본래 윤회설이란 모든 것을 인과관계 속에서 바라보는 불교의 ‘깨달음(해탈)’의 교리에 바탕을 둔다. 윤회와 환생은 깨닫지 못한 중생이 스스로 얻은 업(業)의 결과에 따라 또 다른 생으로 윤회할 수밖에 없는 ‘고통의 현실’을 말하는 데 목적이 있다. 깨달음을 얻기 전까지 인간에게 영원한 안식이 없음을 말하려는 것이지, 인간이 죽으면 예외 없이 또 다른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고 말하는 것은 윤회설과 무관하다.
그렇다면 부활을 믿는 그리스도인은 어떨까? 통계에 의하면 상당수의 신자들이 부활보다는 윤회나 환생을 믿는다고 한다. 이해할 수 없고, 때로는 신화 같은 부활에 대한 막연한 기다림보다는 차라리 자신의 업보에 따라 윤회를 하거나 환생하는 편이 더 자연스럽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윤회가 짧고 불공평한 한 번의 인생을 만회할 기회를 주는 반면에, 부활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동참하는 단호함에다가 심판과 연옥 단련 이후에나 얻게 될 부담스런 일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종교학자가 그리스도교의 부활보다 불교의 윤회설이 더 매력적인 것은 “패자 부활전”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자기 힘으로는 현세의 삶을 어떻게 바꿔볼 수 없는 막다른 골목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고통을 인내한 이후의 보상적 의미의 부활 신앙은 패자로 살아가야 하는 이들에게 지나친 처사일 수 있기 때문이다. 설령 그리스도인이라 하더라도 심판 이후의 부활에 대한 기대보다는 “인생 재역전”과 같이 “내가 다시 태어난다면...”을 외치는 패자 부활전이 더 매력적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윤회는 그리스도교의 부활 신앙과는 사뭇 다른 것이다. 부활과 윤회는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면 같은 삶과 죽음에 대한 서로 다른 해석일수 있지만, 종교적 관점에서 보면 누가 죽음과 삶을 주관하는지에 대한 전혀 다른 입장을 취한다. 삶과 죽음이 단순히 자연의 한 조각에 불과하다면, 우리의 삶은 그렇게 치열할 필요도, 선과 악을 구별할 필요도 없어진다. 불가에서 깨달은 사람들이 더 이상 세상의 인연에 연연하지 않고, 생사를 초월한 해탈의 삶의 구가하지만, 이들에게 인생은 모든 생명체의 순환 속에 덧없음을 깨닫고 더 이상의 집착으로 받게 될 고통에서 해방되는 것이 목표이다. 그러나 부활 신앙은 생명은 본래 자연의 조각이 아니라, 선사된 은총임을 말해준다. 나의 생명은 결코 우연이나 자연의 순환 속에 시작된 것이 아니라, 나의 밖으로부터 주어진 것, 유한한 ‘나’ 아닌 무한한 ‘너’로부터 받아진 선물이다. 그래서 인간은 선사된 이 생명에 대해 자유로운 주체가 되지만, 동시에 생명의 궁극적인 목표가 또 다른 생명에 대한 욕구가 아니라, 생명을 주신 하느님께로 돌아갈 수밖에 없음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스도 신앙은 계시 신앙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하느님의 존재에 대한 막연한 믿음을 전제한 것이 아니다. 인간이란 무릇 자신이 모든 것을 가지고 모든 것이 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내가 숨 쉬는 모든 순간마다 내 의지와 무관하게 주어진 수많은 하느님의 표징들에 의해 살아지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신앙을 말한다.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생명에서부터 돌봄을 통한 성장, 사랑 받고 인정 받음으로써 얻는 기쁨,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나 아닌 너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는 인간의 실존적 체험은 이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절대적 ‘당신’으로서의 하느님의 현존에 대한 믿음 없이는 가능하지 않다.
부활은 단순한 죽음에서의 소생을 말하지 않는다. 부활은 궁극적으로 우리의 죽음까지도 하느님께로부터 받아들여진다는 놀라운 체험이다. 아쉬운 생을 접고 새로운 생명에 대한 재도전을 감행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모순된 삶, 절망과 고통, 회의와 좌절까지도 하느님은 당신이 주관하신 생명에로 우리를 초대하기를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뜻이다. 그래서 부활은 예수님이 단 한 번 이루신, 그래서 우리가 겪지 못할 과거의 사건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 안에서 피어난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의 무한하신 사랑에 대한 찬미와 감사의 언어이어야 한다. 다시 태어나지 않아도, 그 분은 지금의 나를 사랑하시고, 죽음을 넘어서까지도 나를 사랑하신다는 확신의 체험이다. 패자 부활전 없이도 부전승으로 우리를 이끄시는 하느님의 섭리를 믿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인이 부활을 사는 매력이 아닐까?
송용민 신부
(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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