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잡지 - 세상 속 신앙 읽기 5월호 원고
미운 신부님, 수녀님,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송용민(사도요한) 신부
신부님, 수녀님이 미워요
좀 난감한 주제를 뽑았다는 생각이 든다. 자칫 누워서 침 뱉기가 될 수 있는 이야기지만 짧은 본당생활에서 신자들의 마음을 아주 조금이나마 이해해볼 수 있는 부분이란 생각이 들었다. 적지 않은 신자들이 신앙생활에서 가장 힘들어 하는 것은 먹고 살기 바쁜데 신앙생활 할 시간이 어디 있냐는 것일 수 있다. 생활고로 신앙생활에 소홀한 사람은 그래도 낫다. 언젠가는 돌아올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냉담자의 상당수는 교회에 실망을 하고 떠난 이들이다. 그들 가운데에는 성직자와 수도자에게 직접 상처를 받았거나, 그들의 실망스런 삶에 대해 회의를 느껴 교회에 발을 끊은 이들도 없지 않다. 신자들이 신부님과 수녀님에 대한 미움이 드는 이유야 다양하겠지만, 그런 이유로 성당에 나오지 못한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신부, 수녀도 사람인데 모든 신자들에게 칭찬 받고, 사랑 받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속된 말로 결혼을 하지 않아 철이 들지 않은 신부, 수녀들에겐 때로 독선과 아집, 교만과 위선의 그림자가 늘 따라다니기 십상이다. 가톨릭교회 구조상 성직자들에게 집중되어 있는 사목형태나 자칫 신부들의 편에 서지 않았다가 본당 내에서 반대세력(?)으로 규합되는 수녀님들의 편(?) 때문에 적지 않은 상처를 받는 이들도 많다. 사제가 일부러 독선을 펴려는 것은 아니겠지만, 고집스런 신자들에게 휩쓸리지 않기 위해서 제법 카리스마를 신부의 독선적 행동이 신자들에게 상처를 준다는 사실은 신부 자신만 모르는 경우가 많다.
본래 신부들은 신학생 시절부터 본당 교우들로부터 대우받고, 사랑받아온 경험 때문에 자신의 내면을 진솔하게 살피는데 익숙하지 않다. 깨어 있는 삶을 살아가는 사제가 아닌 이상 자신에게 노력 없이 주어진 권위와 사제적 권위 때문에 신자들에게 쉽게 반말을 하거나 자신의 뜻을 소통 없이 관철시키려는 유혹을 많이 받는다. 신자들은 생업에 매달리고 있을 뿐 정작 본당을 책임지고 있는 신부들이 결정해야할 일들이 많아질수록 사제의 양심적 판단이 본의 아니게 일부 신자들에게 뭇매를 맞는 경우도 있다. 게다가 신부가 신부답지 못한 실수라도 하게 되면 그야말로 구설수에 올라 사목생활에 치명타를 맞기 십상이기도 하다.
본당에서 활동하는 수도자들도 예외는 아니다. 수도자들이 본당 사목에서부터 활동을 시작한 한국 교회의 특성상 본당에 신부님이 있다면 수녀님의 존재는 어머니의 존재처럼 여겨져 온 것도 사실이다. 수도자의 본연을 잊지 않고 겸손하고 청빈한 수도자의 모습은 신자들로 하여금 존경과 사랑을 자아낸다. 하지만 수녀들 역시 세속의 영향 때문인지 본당에서 자신들의 존재감을 발휘하고 싶어 하고, 신자들의 사랑을 받다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권위적인 수녀들이 되기도 한다. 혼자 사는 신부들과는 달리 공동생활을 기본으로 하는 수도자들은 행여 함께 사는 동료수녀와 사이라도 안 좋으면 그것이 본당에서 그대로 드러나 손가락질 당하는 일도 적지 않다. 본당신부와 사이가 좋지 않은 수녀들은 본당 안에서 신부의 반대세력을 형성하는 일도 없지 않은 걸 보면, 요즘 일부 수도회가 수녀들의 본당소임을 철수시키는 이유가 납득이 가기도 한다.
어떻게 사랑해야 하나요?
보통 신자들이 교우들 간의 미움과 상처 때문에 냉담 하는 일도 잦지만, 신부, 수녀에게 상처를 받으면 거의 냉담으로 이어지는 건 구조적인 문제만은 아닐 듯싶다. 그만큼 가톨릭교회에서 신부, 수녀의 역할이 크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들에게도 인간적인 약점과 결함이 있다는 것을 신자들이 인정해주고 감싸주는 과거의 교회 분위기는 사라진지 오래다. 과거에는 비록 신부, 수녀의 인격적 결함이 있더라도 신부가 지닌 사제직의 고귀함 때문에라도 그 허물을 감싸주고, 독선적인 사제의 회개를 위해 신자들이 기도를 함께 바친 적은 있었지만, 오늘날에는 신자들이 신부들의 허물을 눈감아주지 않는다. 모두는 아니지만 못된 신부를 몰아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진 신자들은 주교님께 투서를 넣고, 신자들을 선동해서 반대파를 형성하는 일까지 있다. 교회도 세상 속에 사는 사람들의 조직이니 어쩔 수 없는 현실이기도 하다.
하지만 신부, 수녀의 인격적인 결함을 무조건 감싸주는 것이 신자들의 사랑만은 아니다. 때로 주어진 권위로 살아가는 이들은 스스로 겸손을 실천하지 않는 한 타인의 말을 잘 듣지 못한다. 자신의 정당함만을 강조하다보면 소수의 의견을 무시하거나, 이들을 설득하고 대화하는 일 없이 일방적인 권위로 사목을 추진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무엇보다 신부들 스스로 자신들의 소명의 거룩함과 봉사자로서의 겸손을 몸에 익히는 일도 중요하지만, 신자들에게 휘둘리지 않을 수 있는 지혜로운 언변과 태도, 매사에 부드러운 말투와 행동, 하지만 옳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단호할 수 있는 부드러운 카리스마가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기이다.
신부님, 수녀님 때문에 상처받는 신자가 늘어난다고 무조건 그들만을 탓할 수는 없다. 신자들 스스로도 교회 안에서 주인의식을 갖고 믿음생활의 중심이 무엇인지 깨달아가는 노력도 필요하다. 신부, 수녀들에게 상처 받고 냉담 하는 대부분의 신자들은 자신들의 정당함을 보이기 위해 교회에 발을 끊는 경우도 있지만, 성당에 오면 부딪히지 않을 수 없는 신부, 수녀를 마주하기 힘들어하는 인간적인 어려움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미사에 오면 사제들의 강론과 공지사항을 일방적으로 들어야 하고, 수도자들의 위선적인 말과 행동에 염증을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래서 교회를 멀리한다면 누가 정작 손해인지 생각해볼 일이다. 신앙생활은 신부, 수녀를 벗어나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강박관념이 작용하겠지만, 하느님을 진심으로 믿는 사람이라면 그런 상처가 있다고 교회를 떠나거나 신앙생활을 접는 어리석음을 범하지는 않는다. 자신이 왜 믿음을 갖게 되었는지 생각해보면, 결코 신부, 수녀가 자신들의 신앙을 대변해주는 것은 아니란 것도 깨달을 필요도 있다.
그렇다고 미운 신부님, 수녀님과 무관하게 자신만의 신앙생활을 이기적으로 하란 말은 아니다. 기회가 된다면 진솔하게 그들에게 편지를 쓰거나, 자신의 마음을 터놓고 고해성사를 볼 수도 있고, 면담을 신청해서 자신들의 입장을 조용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 대놓고 비판하기 위한 대화는 싸움과 상처밖에 남지 않는다. 하지만 기도하는 마음으로 신부, 수녀와의 허심탄회한 대화는 그들이 아무리 인격적인 결함이 많다 해도 성품성사와 수도서원의 은총 덕분에 훗날에라도 자신들의 과오를 인정하는 계기를 마련해줄 수도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요즘처럼 대형마트 앞에만 가도 절을 90도로 깍듯이 하는 시대에 교회가 목을 뻣뻣이 하고 신자들을 대하는 태도는 지났다. 새 교황님도 피선 후 첫 인사 때 신자들에게 먼저 축복을 청하며 고개를 숙인 모습을 기억할 일이다. 신부, 수녀가 밉다고 성당에 발을 끊고, 그들이 떠나기만을 기다리는 태도는 성숙한 신앙인의 자세는 아니다. 내 믿음의 중심이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봉사와 교회생활은 내가 하느님께 받은 은총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어야지 성당의 신부 수녀의 인정을 받기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한다. 인간의 감정적인 문제까지 어떻게 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서 우리에겐 그런 감정을 진지하게 다룰 수 있는 영성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싶다.
예전에 집에 하나씩은 놓여져 있던 삼형제 인형~ 우리네 모습도 다 이런 거 아닐까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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