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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7. 까칠한 신앙인가, 터프한 신앙인가?

ohjulia 2013. 10. 2. 08:02

경향잡지 8월호 원고

 

 

까칠한 신앙인가, 터프한 신앙인가?

 

송용민 신부

 

까칠함이 필요한 세상

세상살이가 녹녹하지 않다는 건 평범한 삶 속에서 어떤 인간관계의 단절이나 경제적인 곤궁, 병과 우울증 등 혼자 힘으로 풀 수 없는 일들을 만날 때 분명하게 느낀다. 뭐 하나 제대로 자기 힘으로 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 우린 본성적으로 누군가의 힘을 필요로 하고, 때로는 심리적인 위로를 받고 싶어 한다. 하지만 우리 세상은 응석받이처럼 자기 한탄을 받아주는 사회가 되지 못한다. 늘 참고 견디면 언젠가는 빛을 본다는 식의 인내와 끈기의 가치가 각광 받던 세상도 퇴색된 느낌이다. 아무리 견디고 참아도 자신의 곤궁한 처지를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의 벽에 부딪힌 사람들이 늘어난다. 그것이 경제적인 빈곤의 악순환일수도 있고, 인간관계에서 받은 상처로 인해 늘어가는 우울증과 피해망상증과 같은 정신적인 한계일수도 있다. 때로는 자신이 이미 선택한 삶을 바꿀 수 없는 현실의 숨 막히는 세상일수도 있다.

 

최근 들어 과거 인생의 기준과도 같았던 수동적인 삶의 가치관들, 가령 은근과 끈기, 인내와 겸손 등의 가치들이 성공할 수 없는 세상의 가치들로 변해가고 있다. 서점에서 사람들의 눈을 끄는 곳에서는 언제나 자기 계발과 관련된 서적들의 수북하다. 그들 책의 공통점은 세상을 조금은 까칠하게 살라는 주문이다. 과거에는 늘 남의 눈치 보면서 남과의 관계에서 서로 잘 조화롭게 살기 위한 처세술과 같은 것을 주문했다면, 오늘날에는 자기 인생을 스스로 만들어 가라는 조언이 많다. 한마디로 인생을 늘 떠밀려서 혹은 피할 수 없기 때문에 살지 말고 자기 인생에 대한 분명한 선택과 결단을 하면서 살아가라고 가르친다.

 

 

개인주의와 집단주의 사이에서

까칠하게 살라는 조언은 과거 인생의 성패를 인간관계를 잘 맺는 처세술 중심으로 살라는 말과는 다르다. 늘 자신의 속마음은 숨기고,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속상해하는 상처받은 인생에서 벗어나 자신의 진심을 말할 줄 알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면서 자신과 화해하고 감정의 질식 상태에서 벗어나 상처받지 않으면서도 건강한 까칠함을 살아가라고 주문한다. 이런 삶의 가치들은 주로 서구의 문화 구조에서 기인한 개인주의 문화에 익숙한 현대인들에게 공감을 얻을 수 있는 것들이다. 개인주의 문화는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면서도 자기의 말과 행동에 책임을 질 줄 아는 성숙한 사람이 되기를 요구한다. 자신이 소중하고 자기감정에 충실하면서도 성숙한 자유인이 된다는 것은 동시에 나와 함께 사는 다른 이들의 소중함과 그들의 감정, 그들의 가치관과 삶을 존중할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개인주의 문화의 핵심이다.

 

유감스럽게 우리 사회는 동양의 오랜 가치질서인 집단주의 혹은 가족주의 문화의 뿌리에서 성장했다. 나의 존재는 늘 내 가족을 통해서,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친인척과 이웃들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었다. 나는 그대로의 나보다는 언제는 누군가의 나혹은 남이 내게 바라는 나가 되어야 한다는 당위성 속에서 살아온 셈이다. 그래서 내가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고, 혹시라도 사회적 관계에서 도태되거나 왕따를 당하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서 자기 생각과는 다른 가치와 결정에도 군소리 없이 따르며 보통 사람으로 사는 것이 삶의 지혜라는 것을 배워 온지도 모른다. 그래서 집단사회는 진솔한 개인의 가치와 감정을 집단 안에서 숨겨오면서 자신을 감추는데 익숙해져서 자신의 기대치를 넘어 강요된 삶을 요구하는 피로사회속에서 살면서 자기모순과 우울증에 빠질 경우도 많아졌다.

 

 

터프한 신앙, 예수의 길

까칠한 삶은 자괴감이나 자기비하심에서 벗어나 솔직한 자아를 인정하고, 죽는 날까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수용할 것을 요청하는 삶이다. 하지만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 자아가 살아가는 방법이 아닌 그 삶의 방향에 관심을 갖는다. 단지 자아에 대한 자신감과 정체성을 찾기 위해 타인에게 때로는 까칠할 정도로 자기를 챙기고 자존감을 찾는 것을 중요시한다면 그런 자아가 결국에는 나아가야할 궁극적인 관심을 잃을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께서 걸어가신 진정한 자아의 길을 따라 나서는 사람들이어야 한다. 예수는 자신만의 길을 걷기 위해 타인의 눈치를 보지 않는 까칠함만을 갖고 산 것이 아니다. 때로는 자신을 반대하는 율법학자나 바리사이들에게 맞서서 터프할 정도로 진리를 향해 발걸음을 옮길 줄 알았다. 예수는 당시 유대인들이 가진 선입견과 편견에 맞서서 한 인간이 진정한 자아를 찾기 위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 지 몸소 보여주셨다. 참된 하느님의 나라를 가로막는 율법의 모순을 밝혀내고,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치부되던 사회적 변두리에 내몰린 이들에게 그들이 먼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고 있다고 선언한다. 죄인으로 낙인찍힌 창녀와 세리들,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에게 용서와 회개의 길을 보여주신다. 평생을 불구로서 장애인으로서 천대받고 인정받지 못했던 병자들, 중풍병자, 나병환자, 앉은뱅이, 소경, 하혈하는 여인, 손이 오그라진 사람을 치유하시고, 악령에 들린 사람에게 평화를 주고, 심지어는 죽은 라자로와 백인대장의 딸까지 일으켜 세우신다. 한 마디로 유대인들이 보기에 경악할 정도로 터프한 삶이다.

 

 

믿음이 필요한 세상

지난해부터 시작된 신앙의 해(2012.10.11.2013.11.24)의 표어는 주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루카 17, 5)이다. 우리 시대는 인간이 이뤄야할 과학적 진보나 경제적 풍요, 사회적 안정이라는 인간의 유토피아적 희망이 아니라, 이 시대의 모순을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참된 믿음이 필요하다. 예수님은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져라.' 해도 그대로 될 것이다.(마태 17:20)”라고 말씀하신다. 현대의 기술로 산도 평지로 만들고, 바다도 육지로 메꿔버리는 세상이 되었으니 그런 믿음도 믿음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예수님 말씀의 참 뜻은 산보다 더 옮기기 힘든 사람의 마음을 옮기는 힘이 믿음에 있다는 뜻일 수도 있다. 사실 살면서 가장 힘든 것이 마음을 바꾸는 일이다. 그리고 남의 마음을 바꾸는 것은 산을 옮기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믿음은 사람의 마음까지도 움직이는 힘이 있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믿어주면 그가 비록 세월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언젠가는 그 믿음의 응답이 오는 것을 본다. 평생을 믿고 기다리며 기도해온 결실이 맺어지기도 하고, 믿는 마음으로 청하면 하느님께서 당신이 원하시는 때에 그 기도를 채워주시기도 한다. 본당생활을 하면서 신자들의 신앙 체험담을 들으면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오직 당신만을 믿고 의지할 때 기도를 들어주신다고 말들 한다. 절대로 바뀔 것 같지 않았던 옹고집의 남편과 시부모가 성당을 나가게 되고, 돌아올 것 같지 않았던 자녀들이 자기 자리를 되찾고 열심히 인생을 살아가는 모습도 본다. 포기할 수 없을 것 같아서 붙잡고 힘들어하던 사람도 막상 포기하고 나면 더 많은 자유와 기쁨을 누리기도 한다.

 

믿음은 인생을 바꾸는 힘이 있다. 하지만 이 믿음은 결코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니다. 삶 속에서 때로는 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않는 까칠한 믿음으로, 때로는 남들이 포기하라고 손짓할 때 한 발자국 더 나갈 수 있는 터프한 믿음으로 살 때 생긴다. 우리 시대는 이런 믿음이 필요하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 1, 37)고 천사가 마리아에게 전한 그 말씀에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 38)라고 응답한 성모님의 믿음처럼 말이다.

 

 

 

 

빈센트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1899) 

그의 인생이나 작품은 터프한 삶과 작품의 대명사가 아닐까 생각해보곤 합니다.

 

 

출처 : 신학하는 즐거움
글쓴이 : 송사도요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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