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비오 10세(St. Pius the Tenth ) 교황
축일 : 8월 21일
성인의 활동지역 :
성인의 활동연도 : 1835-1914년
성인과 같은이름 : 비우스, 피오, 피우스
1835년 6월 2일 이탈리아 베네치아(Venezia)의 리에제(Riese)에서
우체부인 아버지와 재봉사인 어머니 사이의 10남매 중 둘째로 태어난
주세페 멜키오레 사르토(Giuseppe Melchiorre Sarto)는 어머니의 신앙에
많은 영향을 받아 1850년에 파도바(Padova) 신학교에 들어갔다.
1858년에 사제가 된 그는 향후 17년 동안 본당 사목자로서 생활하다가
1884년 9월에 만투아(Mantua)의 주교가 되었다.
그 후 그는 베네치아의 추기경과 대주교가 되었으나,
베네치아 정부와의 문제로 인하여 18개월 간 부임하지 못하였다.
그는 레오 13세(Leo XIII)를 계승하여 교황이 되었다.
그는 교회법 개정을 착수했고, 불가타 성서 개역 위원회를 만들었으며,
시편과 성무일도서 개정을 명하였다.
특히 그는 성체를 자주 영하도록 권장하였다.
그의 재임기간은 ‘근대주의’와의 투쟁이 많았고,
1910년에는 프랑스 사회 운동인 ‘시용’(Sillon)을 비난하였다.
교황 비오 10세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지 22일 후인 1914년 8월 20일에,
전쟁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잃는 것을 개탄하면서 숨을 거두었다.
그리고 1051년 6월 3일 복자품에 올랐으며,
1954년 5월 29일 교황 비오 12세에 의하여 시성되었다.
그럼으로써 1712년 비오 5세가 시성된 후 처음으로 시성된 교황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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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 10세는 북 이탈리아의 트레비스 교외 리에세라는 조그마한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구두 수선 및 우편 배달부로 후에 우체국 국장이 된 사르토였다.
비오 10세는 10남매 중 장남으로 그의 이름은 조세페(요셉) 멜키오레 사르토였다.
어려서부터 영혼 구원을 위해 일하고자 카스테르프란코에 있는 어떤 중학교에 다녔으나,
이것도 가정 형편으로 인해 어떤 때는 맨발로써 통학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의 부모에세는 아직 교육시켜야 할 자녀가 수명이나 있었으므로,
요셉이 신부가 되기 위해서는 신학교에서의 장학생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고
마침 그의 성적이 우수했기 때문에 그는 1850년 파두아 신학교에 들어가 학업을
마칠 수가 있었다.
그의 본당 신부는 이미 연로하고 병약한 분이었으나,
그는 9년간 그의 밑에서 보좌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했다.
그리하여 자연히 그의 위대한 능력은 인정되어 살차노 본당의 주임 사제가 되었다.
살차노 본당 교우들은 그가 별로 이렇다 할 가문의 출신이 아니라 하여 신통히
대접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의 재능 및 그가 모든 사람들 특히 가난한 이들에게 베푼 사랑과
희생과 협조는 곧 지방민의 인심을 사게 되어, 9년 후 그가 트레비소 대신학교에
고문 겸 교수로 임명되었을 때는 애석히 여기지 않는 사람이 하나도 없을 정도였다.
그는 1875년 11월에 트레비소 대신학교의 영성 지도 신부와 교구의 성서국장을 지냈다.
그가 대신학교에서 교수로 9년간을 지내고 레오 13세는 그를 1884년에 만토바의 주교로
임명했다.
그리하여 그는 여러 계층의 사람들을 만나 교구를 활성화시켰고,
그로부터 9년 후인 1893년에는 베네치아의 총주교 겸 추기경이 되었다.
그때 그는 이러한 직을 사양하려 했으나, 란포라의 추기경에게
“이미 그러한 직을 사양한 사람이 한 분 있으므로 다시 그런 일이 생기면 교황께서는
크게 마음 상할 것”이라는 주의를 받고 온순히 교황의 뜻을 따랐다.
그는 그때부터 대교구중의 하나인 자기 교구의 개혁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을 기울였으며,
민심 수습을 위해 노력했고,과거에 반목되어 있던 정부와도 타협을 하게되었다.
그가 가장 중요시 한 것은 빈민들이었다.
그는 자기 필수품까지 전부 빈민에게 나누어 주었으므로 어떤 때는 생활에 곤란을 느낄
때가 많았다.
1903년 레오 13세의 서거로 사르토 추기경도 교황 선거를 하기 위해 로마로 상경하게
되었다.
그는 선거 후 곧 돌아갈 줄 알고 왕복차표를 마련했다.
그러나 돌아갈 차표는 필요치 않게 되었다.
그 이유는 압도적 다수표로 새로운 교황에 당선되었기 때문이다.'
교황으로서의 이름은 그 전대의 교황 비오의 이름을 따서 그는 비오 10세가 되었다.
4억 인의 세계 신자들을 인솔하여 과학의 진보와 더불어 유물론이며 기타 불신,
부도덕적인 세상에 대처해 나아감은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비오 10세의 특기할 만한 사적 중에는 신앙을 견고히 하기 위한 운동과
신자의 영신적 양식이 되는 성체를 자주 또한 정당히 영하기 위한 회칙을 반포한 것이다.
이러한 법칙 변경으로 인해 수백 만 명의 신자들이 세상에서 혹은 천국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할 것이다
비오 10세는 전임 교황과는 전혀 다른 성격의 소유자였다.
교황좌에 오른 후 발표한 첫 번째 칙서 “E Supremi Apostolatus"(10월 4일)는
추기경단에 한 훈시와 더불어 비오 10세의 사목방향을 제시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하느님으로부터의 이탈과 배교가 어느 시대보다도 심하게 일어나는 시대임을 강조한
교황은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 회복시켜 그리스도가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게 하자고 호소했다.
그는 교회법 개정을 착수했고, 불가타 성서 개역 위원회를 만들었으며,
시편과 성무 일도서 개정을 명했다.
특히 그는 성체를 자주 영하도록 권장했다.
그의 재임 기간은 “모던니즘”과의 투쟁이 많았고,
1910년에는 프랑스사회 운동인 “실롱”을 단죄했다.
그의 만년인 1914년 8월 2일에 돌연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그는 평화의 회복을 위해 전력했으나 결국 허사였다.
그리고 그로부터 3주일이 지난 1924년 8월 20일을 일기로 그는 영원히 세상을 하직했다.
교황이 서거하자 전세계는 겸손하고 열심한 교황의 죽음을 애도했다.
추기경단의 요청으로 엄격한 시복 시성 조사를 한 후
그분으로부터 3대의 후계자인 비오 12세에 의해 1951년 6월 3일 베드로 대성전에서
시복되었고,
1954년 5월 29일에는 역시 같은 장소에서 시성되었는데,
이는 1712년 비오 5세가 시성된 후 처음으로 시성된 교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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