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Lord/† 聖人들의 삶을 통해서

성녀 로사 (8월 23일) 은수자 , 3회원

ohjulia 2005. 8. 23. 00:37
고향으로 , 성녀 로사
  

    성녀 로사 (St. Rose) 은수자 , 3회원

    축일 : 8월 23일 성인의 활동지역 : 리마(Lima) 성인의 활동연도 : 1586-1617년 성인과 같은이름 : 로싸 1586년 4월 20일 페루 리마의 에스파냐 가문에서 태어나 이사벨 데 플로레스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성녀는 14살 때에 로사(Rosa)라는 이름으로 견진을 받았다. 용모가 빼어나게 아름다웠던 그녀는 양친의 결혼 계획을 끝내 반대하고는, 어릴 때부터 자신의 모델 성녀로 모시던 시에나(Siena)의 성녀 카타리나(Catharina)를 본받기 위하여 엄격한 생활을 하기 시작하였다. 로사는 도미니코회 3회원이 되었는데, 그녀가 부모를 도와야 할 입장이므로 정원의 통나무 집 속에서 은수생활을 하였다. 이때부터 여러 가지 신비적인 특은을 비롯하여 환시를 보았는데, 초자연적인 일들이 자주 일어나게 되자, 사제와 전문가들로 구성된 조사위원회가 그녀를 심사하는 사태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들은 로사 주변의 모든 일들이 초자연적인 사실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자 로사의 성덕 이야기가 퍼져나가기 시작하여 자기의 집 정원은 영성 센터로 변하였다. 건강이 나빴던 관계로 로사는 돈 곤잘로 데 마사와 그 아내의 제안을 받아들여 3년 동안 리마에 있는 그들의 집에서 지내다가 운명하였다. 그녀는 교황 클레멘스 10세(Clemens X)에 의하여 1671년 4월 12일 신세계의 첫 번째 성인으로 시성되었으며, 페루와 남아메리카, 서인도 제도, 필리핀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 1492년에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콜룸부스에게 그 지방의 신기한 이야기를 전해 들은 스페인 사람들 중에는 신대륙이 마치 무진한 보물로 충만되어 있는 옥토인 줄 생각하고 제각기 그 보물을 점유하고자 고국을 떠난 이가 적지 않았다. 특히 그로부터 40년이 경과한 후, 페루를 점령한 스페인 사람들은 토인들을 학대하며 심지어는 그들의 생명까지 빼앗는 심한 폭행까지 자행하여 선교사들은 그들의 비그리스도교적 행위를 경고했으나 아무 효과가 없었다. 그러니 이러한 대죄악을 충분히 보속하지 않으면 하느님의 풍성한 은총이 결코 이 나라에 내려올 수 없게 되었으나, 다행히 나약한 여성으로, 영웅적 희생을 바침으로써 주님의 분노를 풀고 하느님의 나라를 이 땅위에 건설할 기초를 닦은 분이 있었는데, 이분이 바로 로사 동정녀다. 그녀는 1586년 페루의 수도인 리마에서 태어났다. 세례명은 이사벨라(작은 엘리사벳)였는데, 용모가 매우 아름다워 가히 장미꽃의 아름다움을 연상시키므로, 이름을 로사(장미꽃)라 부르게 되었다. 그의 양친은 마음씨가 훌륭한 분들로 처음에는 상당한 재산도 있었으나 운이 나빠서 모든 것을 다 잃어 가난한 가정이 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신앙은 조금도 동요됨이 없었고, 오히려 하느님께 더욱 굳은 신뢰심을 갖게 되었다. 그들의 10여명 자녀 중에 로사는 장녀였다. 로사는 철이 들기 시작할 때부터 하느님의 기이한 섭리로 보속, 희생, 박애(博愛)등의 숭고한 정신에 관심을 갖게 된 것 같았다. 그것은 즉 아직 어린이로서 몸에 대수술을 받았을 때에도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으며 조금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든지, 또 매주 3일간은 소량의 빵과 물로써 지내며, 편안한 침대 대신 판자 위에서 자는 것 등이었다. 이러한 경향은 커감에 따라 더욱 뚜렷이 나타났으며, 여러 가지로 고행하는 방법을 강구하고 그대로 실행했다. 그녀는 자기의 미모가 사람들의 마음을 미혹케 할까 염려하여 후추가루로 얼굴을 비볐으며,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잘라서 약간이라도 그녀의 미를 손상시키려 애을 썼다. 뜰 한구석에는 작은 방을 꾸미고 그 안에서 몇 시간이고 기도와 묵상으로 지내며 죄인들에게 자비를 내려 주시기를 하느님께 기도했다. 그리고 나머지 몇시간은 자수나 기타 편물에 소비하고, 수면 시간은 불과 두세 시간 정도였었는데, 실로 이러한 엄격한 생활은 하느님의 특별한 섭리에 의한 것으로, 주님의 특별한 도움이 아니고서는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행할 수 없는 행위였다. 실제로 하느님께서 혹은 성인들이 나타나서 그녀를 위로해 주고 격려해 준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육신의 고행에 힘쓰던 그녀는 가끔 하느님께 버림을 받은 것과 같은 고적함과 가지가지 영신적 고민의 시련도 당했다. 그것은 말하자면 게세마니 동산에서 예수께서 받으신 고통과 비슷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신심이 두터운 부모들도 그녀의 정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고행을 그만두고 빨리 결혼하라고 재촉했고, 그말을 듣지 않는다 하여 엄히 책망하며 때로는 심한 매질까지 한 적도 있었다. 이러한 고통을 아무에게도 하소연할 곳이 없는 로사는 조금도 안색을 변하지 않고 더욱 부지런히 가정 일을 보살피면서, 남몰래 조용한 곳에서 부모를 위해 주님의 은혜를 청했다. 그리고 하느님께 맺은 정결 서원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 20세때 성 도미니코 제3회에 들어가 부모의 슬하에 있으면서도 가장 완전한 수도 생활을 하고 영혼 구원을 위해 자신을 전부 봉헌했다. 그녀의 방은 비좁았지만 그녀의 열성을 기뻐하시는 하느님의 은혜로 마치 지상 낙원과 같이 되어, 그 주위에는 아름다운 장미꽃들이 만발했고, 새들은 두려운 기색도 없이 마음대로 방안에 들락날락하고 재잘거리며 기도하는 성녀와 같이 창조주를 찬미했다. 극기 생황에 권태를 낼 줄 모르는 로사는 주님의 모습을 따르고자 편태를 하고 가시관을 만들어서 자기 몸을 괴롭히며 석회 가루로 손을 태워 그 아픔을 하느님께 바치기도 했는데, 만약 지도 신부의 명령이 없었다면 얼마나 더 무서운 극기와 희생을 했을지 모른다. 이 같은 수도 생활은 하느님의 풍부한 은총을 초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여러 번의 탈혼 중에 영신계의 진리를 맛보았으나, 겸손한 마음으로 타인에게는 일절 비치지 않고 지도 신부의 명령에 순명하는 뜻으로 그 일부를 밝혀 줄 뿐이었다. 매일 같은 준엄한 고행의 결과 로사는 건강을 잃고 매우 아픈 병고를 당했다. 전신을 태우는 듯한 고통은 아무리 치료를 받아도, 아무리 약을 써 보아도 낫지 않았다. 이런 고통울 기쁘게 생각하고 세상 사람들의 죄의 보속을 위해 주님께 바치기를 3년간, 최후가 가까이옴을 안 로사는 골고타의 예수의 수난을 묵상하고 3일째 되는 날, 예수의 이름을 세 번 부르고 조용히 눈을 감아 세상을 떠났다. 때는 1617년 8월 24일이었다. 그녀의 탄복할만한 희생은 천국에서 풍성한 상급을 받았을 것이다. 그녀는 아메리카의 제1의 성녀요, 남미(南美)의 꽃으로 찬양 받았으며, 그녀의 전구로 많은 기적도 일어났으므로 1617년에는 성인품에 오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