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독서 지혜서
3,1-9 의인들의 영혼은 하느님의 손에 있어서, 아무런 고통도 받지
않을 것이다. 미련한 자들의 눈에는 그들이 죽은 것처럼 보이고, 그들이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 재앙으로 생각될 것이며, 우리 곁을 떠나는 것이
아주 없어져 버리는 것으로 생각되겠지만, 의인들은 평화를 누리고 있다. 사람들 눈에 의인들이 벌을 받은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들은 불멸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이 받는 고통은 후에 받을 큰 축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시험하시고, 그들이 당신
뜻에 맞는 사람들임을 인정하신 것이다. 도가니 속에서 금을 시험하듯이, 하느님께서 그들을 시험하시고, 그들을 번제물로 받아들이셨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찾아오실 때 그들은 빛을 내고, 짚단이 탈 때 튀기는 불꽃처럼 퍼질 것이다. 그들은 민족들을 다스리고 백성들을 통치할
것이며, 주님이 무궁토록 그들의 왕으로 군림하실 것이다. 주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진리를 깨닫고, 주님을 믿는 사람들은 그분과 함께 사랑
안에서 살 것이다. 은총과 자비가 주님께 뽑힌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
제2독서 로마서 8,31ㄴ-39 형제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 되셨으니 누가 감히 우리와 맞서겠습니까?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당신의 아들까지 아낌없이 내어 주신 하느님께서 그 아들과 함께
무엇이든지 다 주시지 않겠습니까? 하느님께서 택하신 사람들을 누가 감히 고소하겠습니까?그들에게 무죄를 선언하시는 분이 하느님이신데 누가
감히 그들을 단죄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 예수께서 단죄하시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서 돌아가셨을 뿐만 아니라 다시 살아나셔서
하느님 오른편에 앉아 우리를 위하여 대신 간구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누가 감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혹 위험이나 칼입니까? 우리의 처지는, “우리는 종일토록 당신을 위하여 죽어
갑니다. 도살당할 양처럼 천대받습니다.”라는 성서의 말씀대로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분의 도움으로 이 모든 시련을 이겨
내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생명도 천사들도 권세의 천신들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능력의 천신들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의 어떤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나타날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복음 루가 9,23-26 그때에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제
목숨을 살리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제 목숨을
잃거나 망해 버린다면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을
거느리고 영광스럽게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지금 제 노트북에는 많은 자료들이 입력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제가 소중히 여기고 있는 것은
당연히 제가 써 놓았던 많은 글들입니다. 물론 한 번 쓰고 나면 다시는 보지 않지만, 정성껏 썼든 쓰지 않았든 상관없이, 내가 썼다는 이유만으로
제 노트북의 하드디스크 용량을 채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재미있는 것은 제가 쓴 그 글들이 하드디스크의 용량으로는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평화방송에서 마지막 녹음이 있는 날입니다. 작년 8월부터 시작해서 올 10월까지 ‘아침창가에서’라는 작은 프로를
진행해왔답니다. 그리고 어제 저녁 지금까지 이 프로를 위해서 써왔던 원고를 살펴보았지요.
1년 넘게 진행을 하면서 무려
400페이지에 달하는 원고입니다. 하지만 이 원고의 용량은 채 2M도 되지 않으면서, 제 노트북에서 아주 작은 부분만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노트북의 입장에서 볼 때도 제 원고 파일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단지 하나의 데이터 파일일뿐, 노트북을
움직이는데 꼭 필요한 파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즉, 나만 중요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지금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혹시 나 스스로만
중요하다고 그래서 절대 놓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래서 그 과정 안에서 더 큰 상처와 아픔을 겪게 되는 또 다른 사람이 있는 것은
아닌가요?
하느님의 진리는 특정한 누구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모두에게 똑같이 해당되는 것이 하느님의 진리입니다.
그래서 이 진리가 우리 모두에게 너무나 중요한 것이지요. 그런데 다른 이에게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고, 나만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라면 결국 그것은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나의 욕심을 통해서 나온 것이 아닐까요?
우리의 순교자들은 죽음까지도 불사하면서 보편적인 진리를
가져다주시는 하느님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과연 어떤가요? 내게만 좋은 것처럼 보이는 이 세상 것만을 선택하면서 점점 주님의 손길에서
벗어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자기를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신 주님을 기억하면서, 나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중요한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오늘이 되시길....
나한테만 중요한 것에 집착하지
맙시다.
고래가 걱정을 합니까?(좋은 글
중에서) 말향고래는 하루에 500kg가량의 먹이를 먹습니다. 길이 20m, 무게 100톤 이상이나 되는 이 동물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마어마한 먹이가 필요합니다. 고래는 오징어, 상어, 물개 심지어 물에 빠진 사람까지도 먹습니다. 고래는 여러가지를 한꺼번에 삼킬 수 있습니다.
이가 전혀 없거나 조금 나있는 작은 고래라도 조금만 해양동물, 물고기, 새우, 해파리 등을 수없이 먹습니다.
수염고래는 어지간히
게으른 동작으로 먹이를 먹는 고래입니다. 단순히 입을 벌린 채 물속을 다니다가 조그만 해양 동물들이 턱에 걸리면 입을 닫습니다. 그러면 물은
빠져나가고 그 먹이들은 목으로 넘어갑니다. 그리고 또 입을 벌려 먹이가 또 다시 턱에 걸리기만 기다립니다. 바다에서 바다 속이라 할지라도
성장하는 시기가 다르기 때문에 고래는 자주 이동합니다. 여름에는 북쪽 바다로 겨울이 오면 남쪽 바다로 이동 합니다. 고래는 태어난 후 7개월
동안은 소, 양, 사람의 새끼와 같이 어미의 보호를 받습니다. 스스로 먹이를 찾아 삼킬 수 있을 때까지 어미의 젖으로 자랍니다. 킬러고래라고
부르는 돌고래의 한 종류는 떼를 지어 다니며 자기보다 큰 것들을 공격하곤 합니다. 몸길이가 6m 정도이며 같은 종류의 고래를 공격해서 먹이로
합니다.
킬러고래는 보트, 배 등까지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비교적 추운 지방에 사는 이 고래들은 물개, 해마, 오징어,
참돌고래 등을 잡아 먹기를 좋아합니다. 대부분의 고래들은 매우 온순하나 모든 바다동물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고래가 왕성한
식욕을 가졌기 때문에 사람들은 고래가 먹이를 구하는데 큰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고래에게는 필요할 때 손쉽게 구할 수 있는
통조림도, 식량을 저장해 놓을 통도 없습니다. 그에게는 또한 매일 500kg의 새우를 공급하는 어떤 가게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래가
먹이를 구하는 일에 대하여 걱정합니까? 전혀 걱정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모든 생물들에게 먹이가 풍성히 공급되도록 자연계에 균형을
허락하셨습니다. 그 균형이 깨어지지않는 한 사람과 고래와 다른 동물들은 먹이에 대하여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거대한 고래를 위해서 충분한 먹이를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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