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 **
한국에는 18세기 말경에 처음으로 몇몇 평신도들의 노력으로 그리스도 신앙이 들어왔다.
1784년 북경에서 영세한 첫 한국인 이 귀국하기 전에 이미 공동체를 형성하고
신앙을 실천하였으니 이는 교회사에 전무 후무한 일이다.
초기부터 신자들은 모진 박해를 겪어야 했고 박해는 100년 이상 계속되어
만 명 이상의 순교자를 냈다.
초기 50년간에는 중국인 사제 두 분의 짧은 사목 활동이 있었을 뿐
1836년에 프랑스에서 선교사들이 몰래 입국할 때까지는
사목자 없이 평신도들만이 용감하고 열심한 신자 공동체를 지도하고 길러 냈었다.
이 공동체 속에서 1839년, 1846년, 1866년 박해 때 순교한 103명이 성인 반열에
들게 되었다.
그들 중 열심한 사목자였던 최초의 사제 안드레아 김대건과 훌륭한 평신도 바울로
정하상이 대표적 인물이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든지 가톨릭 신앙이 전파된 것을 보면 대개 선교사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하느님의 놀라운 섭리와 성령의 힘은 성실한 사람들이 진리를 찾아
생활하고자 할 때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된다.
극동 아시아의 조그마한 반도인 조선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진 것은
성실한 유학자들이 서적을 통해 학문을 연구한 끝에 스스로 입교함으로써
이루어졌다.
이것 역시 궁극적으로는 온 세상에 당신 성령의 힘을 불어넣으시는 하느님의
섭리일 것이다.
중국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이 중국의 복음화를 위해 한문으로 쓴 성서와
교리서 또는 윤리와 신학 서적들이 그 당시의 외교 관계를 통해 자연스럽게
조선에 들어오게 되었고, 다른 많은 종교 서적들과 함께 읽히던 천주 교회 서적들은
진리를 찾던 조선의 선량한 사람들에게 구원의 빛이 되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권철신과 이벽을 중심으로 한 젊은 양반 학자들의 학문적인 모임이었던
천진암 주어사 강학회가 1779년경에는 천주교 신앙을 알고 실천하려는 모임이 되었다.
1783년, 이승훈을 북경으로 파견하여 북경 선교사에게서 교리를 배우고 영세를 받게
했으며, 그 이듬해 이승훈이 귀국하여 이벽,권일신,정약용,약종 형제들과 함께
첫 신앙 공동체를 형성했다.
성직자나 선교사가 없이 스스로 복음을 받아들인 조선의 신앙 공동체는 급속도로
성장했으나 정치적 불안과 당파 싸움 및 교리와 마찰을 일으킨 조선의 풍속 때문에
심한 박해를 당했다.
1785년, 형조의 우연한 검거에 의해 야기된 최초의 박해에 이어 크고 작은 박해들이
끊임없이 이어졌고 수천 수만 명이 신앙을 위하여 목숨을 바쳤다.
신자들의 간절한 요청으로 1793년에 조선에 들어온 중국인 주문모 신부는
1801년에 대부분의 교회 창설자들과 함께 순교했다.
목자 없는 조선의 신앙 공동체는 1825년, 로마 교황청에까지 그 어려움을 호소하여
1831년에는 조선 교구가 설정되고 파리 외방 선교회가 이 지방의 선교를 담당하게 되어
1835년부터 몇 명의 프랑스 선교사 들어와서 활동했으나
1839년에는 주교 한 사람과 신부 두 사람이 모두 순교했다.
1845년에는 이 땅에 최초의 한국인 사제인 김대건 신부가 잠깐 활동했으나 그 다음해에
순교했다.
서구 열강들이 극동 지방에서 세력 다툼을 벌이던 19세기 말에는 국내외의 불안이
고조되고 어리석은 정치가들의 쇄국 정책으로 1866년, 외국 성직자들이 선교 활동을
하던 천주 교회에 다시 끔찍한 박해가 일어나 1만여 명의 신자들이 학살되고 십여 명의
성직자들이 모두 살해되거나 추방 되었다.
이렇게 100여 년에 걸친 박해로 적지 않은 신자들이 배교하기도 했으나 학자와 남자들 뿐
아니라 부녀자와 아이들 및 평민과 상인들까지도 신앙을 위하여 용감하게 목숨을 바쳤다.
이 중에서 초기의 순교자들은 증거자료의 미비로 누락되고 1839년부터 1849년까지의
순교자들 중에서 79명이 선택되어 1925년 7월 5일에 복자품에 오르게 되었고,
다시 1866년의 박해를 중심으로 순교한 24명이 1968년 10월 6일에 시복되어
모두 103명의 순교자가 시복되기에 이르렀다.
이 103명의 순교 복자들은 한국 선교 200주년이 되는 1984년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서울에서 시성되어 성인품에 오르게 되었다.
신자들이 강요받은 것은 주로 세 가지였다.
첫째는 배교할 것,둘째는 신자들이 성명과 주소를 댈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교회 서적과
성물을 내놓으라는 것이었다.
이에 불복하면 참혹한 형벌을 가했는데 손과 팔,다리에 주리를 틀며 끈으로 살을 톱질하여
베어 내고 치도곤이나 곤장으로 때리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몇 차례의 매를 맞으면 살이터지고 뼈가 부러지며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었다.
그러다가 기절하면 감옥에 처넣어 두는데 그 감옥이란 통나무로 된 움집 같은 것이라서
빛이 들어오지 않아 어둡고 음산하며 바닥은 습기로 가득 차 신자들의 매맞은 상처는
곪고 썩어 구더기가 생길 지경이었고, 먹을 것도 제대로 주지 않아 굶주림에 지쳐
어떤 사람들은 거적때기를 뜯어서 씹고 있을 정도였다.
많은 신자가 이렇게 비참하게 옥사했는데, 차라리 교수형이나 참수형을 받는 것이 오히려
고통을 덜 받는 편이다.
많은 신자들은 이 같은 혹독한 심문과 매질 그리고 감옥 생활에도 굳건하게 신앙을 지키며
때로는 심문중에 창조주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유교의 부모 공경과 임금에 대한
충성심에 비교하여 교회의 가르침을 설파하다가 용감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설명 ;
우리는 신앙 생활에서 하느님의 은총과 축복만을 빌며 무사안일한 생활을 꿈꾸기 쉽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악의 세력과 투쟁하며 복음의 메시지에 따라 살아가려면
비록 박해 시대가 아니더라도 갖가지 어려움에 부딪히고 유혹에 빠질 수 있다.
그때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과 수난을 생각하며 구원의 길을 용감하게 걸어간
순교자들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신앙 생활이 무사 안일하기만을 바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앙은 우리를 이 세상의 모든 악과 불행에서 면제해 주는 것이
아니라 고통과 어려움을 당함으로써 이 세상의 죄악과 불행을 극복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한국 순교성인들의 진리에 대한 갈망과 순교 정신은 현대 사회의
부조리와 무사 안일주의에 좋은 귀감이 될 것이다.
인용 ;
1877년에 서울의 감옥에 갇혔던 리델 주교는 옥중 생활의 비참한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나는 기아로 희생이 된 그들을 보고 너무나 놀라 뒷걸음질을 쳤다.
그들은 사람이라기보다는 해골이 걸어다니고 있는 것이라고 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괴로움과 굶주림과 가려움과 곪아 썩어가는 상처는
그들을 볼 수 없을 만큼 흉악한 모습으로 바꿔 놓았다.'
(류홍렬, '한국 천주 교회사' 상권 p.318)
1845년에 입국한 다블뤼(Daveluy)신부는 기해년의 옥중 생활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교우들은 이러한 감옥 속에 빽빽이 처넣어져 있었으므로 발을 뻗고 누울 수도 없을
정도이다. 그들이 소리를 같이하여 말하는 바에 의하면, 이 지굿지굿한 옥중의 괴로움에
비하면 고문은 문제도 안된다.
상처에서 흐르는 피와 고름 때문에 멍석은 푹푹 썩어 가고 고약한 냄새를 풍기게 되니,
이로 말미암아 고약한 병이 돌기 시작하여 2,3일내에 죽은 교우도 몇이나 있었다.
그러나 가장 무서운 형벌은 굶주림과 목마름이었다.
고문하는 곳에서는 용감히 그 신앙을 공표하면서도 이 기갈을 참지 못하여 굴복한 이도
적지 않았다.'
(류홍렬, '한국 천주 교회사' 상권 pp.318-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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