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으로 , 성 갈리스토 1세](http://saint.catholic.or.kr/pict/48.jpg)
성 갈리스토 1세(St. CALLISTUS I) 교황 , 순교자
축일 : 10월 14일
성인의 활동지역 :
성인의 활동연도 : +222년
성인과 같은이름 : 갈리스도, 갈리스투스, 깔리스또, 깔리스뚜스, 칼리스토, 칼리스투스
갈리스토 성인에 대해 가장 믿을 만한 보고는 그의 적인 최초의 대립 교황이며
나중에는 교회를 위해 순교한 히폴리토 성인에 의한 것이다.
부정 원리가 여기에 이용된다. 만일에 어떤 나쁜 일이 있었다면 히폴리토가 그것을
분명히 언급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칼리스토는 본래 로마 황제 집안의 노예였다.
그는 주인이 은행에 대한 책임을 맡겼는데 예금된 돈을 잃어버려 도망갔다 붙잡혔다.
얼마 동안 유예 기간을 주고 돈을 갚을 수 있는 방법을 찾으라는 조건으로 석방되었다.
그는 지나친 열성을 보인 탓으로 유대인 회당에서 말다툼을 일으키고 체포되었다.
이번에는 사르데냐의 광산에서 중노동을 하도록 선고받았지만 황제 후궁의 배려로
석방되어 안치오(제2차 세계 대전 때 유명한 상륙 지점)에서 살았다.
그는 자유를 얻고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 지하 공동 묘지(아직도 성 칼리스토의
지하 묘지라고 불린다.)의 총지배인이 되었다.
이 묘지는 아마도 교회가 소유한 최초의 땅일 것이다.
199년경 교황은 그에게 부제품을 주어 자신의 친구이자 조언자로 삼았다.
217년에 그는 로마의 성직자와 평신도들의 절대 다수에 의해 교황에 선출 되었고
그 후 교황 선거에서 떨어진 성 히폴리토의 심한 공격을 받았다.
교회역사 중 최초의 대립 교황인 성 히폴리토는 스스로 교황이라 지칭하였다.
이러한 분열은 약 18년간 계속되었다. 히폴리토는 성인으로 공경을 받는다.
그는 235년의 박해중에 추방되었으며 교회와 화해하였다.
그는 고통 속에 사르데냐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교리와 규율이라는 두 가지 면에서 칼리스토를 공격했다.
히폴리토는 아마도 신학적 언어가 아직 다듬어지지 못했기 때문에 성부와 성자의 구별
-거의 두 하느님을 만들 정도로-을 너무나 과장한 듯하다.
그는 또한 칼리스토가 너무 관대하다고 비난했다.
다음과 같은 면에서 우리는 칼리스토의 놀라운 점을 찾을 수 있다.
첫째, 살인과 간음, 간통에 대해 이미 공적 참회를 한 사람에게는 영성체를 허용한다.
둘째, 자유로운 여인과 노예 사이의 혼인을 인정한다.
하지만 이것은 로마법에 어긋나는 것이다.
셋째, 두 번이나 세 번 결혼한 사람들에게도 신품을 허락한다.
넷째, 대죄를 지었다는 사실만으로는 주교를 파면하는 데 충분한 이유가 되지 못한다.
다섯째, 박해중에 일시적이고 배교한 사람들에게 관용을 베푼다.
222년경, 갈리스토는 로마의 트라스테베레에서 지역적 반란이 일어났을 때 순교했으며
베드로를 제외하고는, 교회의 가장 오래된 순교록에서 순교자로 기념되는 첫 교황이다.
4 세기경부터 그는 순교자로 공경 받고있다.
우리가 칼리스토에 대해 아는 것은 별로 없을지라도 그가 가장 위대한 교황 중의
한 사람이었다는 의견에는 많은 사람들이 동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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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칼리스투스(또는 갈리스토)는 로마(Rome)의 트라스테베레 태생인 로마인이었으나
카르포포루스의 노예로서 회계 일을 맡고 있었는데, 그가 돈을 잃어버리자 도망하였다가
포르토에서 체포되었다. 이때 그는 중노동형을 선고받았다.
여기서 석방된 후에 그는 또 시나고가에서 싸우다가 다시 체포되어, 이번에는 사르데냐
(Sardegna) 섬의 광산에서 일하는 중노동형을 받았다.
그는 황제 콤모두스의 아내 마르치아의 요청으로 다른 죄수들과 함께 또 석방되었고,
노예에서도 석방되었다.
199년경에 그는 부제가 되었으며, 아피아 가도(Via Appia)의 묘지들을 관리하는 책임을
맡았고, 이때 그는 교황 제피리누스(Zephyrinus)의 친구이자 고문관이 되었다.
그는 217년에 제피리누스를 승계하여 교황이 되었으나, 교황직에 가장 유력시되던
히폴리투스의 심한 반발을 받았다.
그들은 교리적으로 또 규율적인 입장에서 교황을 공격하여 쉽사리 사그라질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불과 몇 년 후 그가 운명함으로써 이 싸움이 끝났다.
4세기경부터 그는 순교자로 공경을 받았는데, 그 당시에는 박해가 없었지만 아마도
폭도들에 의하여 살해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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