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으로 , 성 실베스테르 1세](http://info.catholic.or.kr/pds/include/readImg.asp?gubun=&seq=&id=1357&filenm=1357%2Ejpg&maingroup=)
성 실베스테르 1세(St.Silvester I) 교황
축일 : 12월 31일
성인의 활동지역 :
성인의 활동연도 : +335년
성인과 같은이름 : 실베스떼르, 실베스뗄, 실베스텔
멜키아데스 교황이 세상을 떠나자, 그 후계자가 된 분은 박해시대에 많은 공로를
세운 실베스테르였다.
그는 로마 명문의 영식이요, 열심한 어머니 유스티나의 교육을 받아 경건하게
자라났으며 더욱이 학덕을 겸비한 카리노라는 신부에게 신학과 기타 학문을 배우고
신품을 받았다.
그 당시에 디오클레시아노와 막시미아노 두 황제의 혹심하고도 가장 잔인한 박해가
시작되었으나, 실베스테르는 하느님의 안배하심인지 기묘하게 관가의 손을 피해
잡히지 않았다.
그는 이를 다행으로 여기고 잠복한 장소에서 잡힌 신자들을 찾아가 몰래 영성체를
시켜 주며, 혹은 위로하고 혹은 격려하며 그들의 순교에 대한 각오를 굳게 해 주었다.
그 열성, 그 성실, 이것이 인정되어 그는 뒷날 교황으로 선택된 것이다.
외부에서의 박해에서 숨을 약간 돌리기도 무섭게, 이제는 내부에서 오는 박해에
실베스테르는 고통을 겪게 되었다.
그 당시 인심을 현혹시킨 것은 은총이 없는 성직자가 행한 성사는 무효라고 주장하는
도나투스(도나토)파와, 성자(聖子)는 최고의 피조물이며 하느님은 아니라는 아리우스
(아리오)파의 이단들이었다.
그래서 실베스테르 교황은 프랑스의 아를르에서 공의회를 열어 도나투스의 사설을 파문하고,
이어 325년 소아시아의 니케아에서 공의회를 열고 아리우스파를 파문해 교회를 순수히
보존하는 데 성공했다.
이는 그의 최대의 공적이었다.
그러나 실베스테르 교황은 너무 고령이었으므로 니케아에는 참석치 못했다.
그는 대리로 코르도바의 주교 호시우스(소시오)와 수행원으로 비토 및 빈첸시오 신부를
보냈다.
그리고 아리우스파에 대항해서 구세주의 천주성을 명확히 규정했다.
"전능하신 아버지, 하늘과 땅과 유형 무형한 만물의 창조주를 만나이다.
또한 한 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외아들, 영원으로부터 성부에게서 나신 분을
믿나이다.
성자께서는 저희 인간을 위하여, 저희 구원을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오셨음을 믿나이다."
이는 곧 니케아 신경으로 미사때 외우고 있는 것이다.
실베스테르에게 파문을 당한 이단자들은 자신들의 도리에 어긋남을 회개함은 고사하고,
오히려 그에게 앙심을 품고 갖은 모략과 중상으로 그의 평판을 나쁘게 하고 그에게
여러 가지 방법으로 고통을 주었으나,
일단 교회를 위해 이미 생명을 내건 교황인지라 그런 정도의 시련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마침내는 오랜 박해로 인해 슬프게도 미사 성제를 카타콤바 같은 곳에서 숨어서 지냈으나,
실베스테르는 교회에 자유를 준 콘스탄티노 대제의 원조를 받아 공공연히 예식을 거행할 수
있는 성당을 도처에 건립했다.
세계에 유명한 성 베드로 대성전이며 성 바오로 대성전도 최초의 것은 그 시대에
건축되었다.
그리고 그는 빈민 구제에도 큰 힘을 기울였다.
이같이 교회를 위해 많은 공적을 남긴 실베스테르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세상을 떠난
것은 335년12월31일이었다.
그는 비아 살라리안의 프리실라 묘지에 안장되었으며, 그때까지의 교회사를 보면 순교하지
않은 최초의 교황이었다고 한다.
(대구대교구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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