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으로 , 성 콘라도](http://saint.catholic.or.kr/pict/2494.jpg)
성 콘라도 (Saint Conrad) 은수자
성인의 활동지역 : 피아첸차(Piacenza)
성인의 활동연도 : +1351년
성인과 같은이름 : 콘라두스, 콘라드, 콘래드
물질적으로 불행함이 도리어 정신적 행복함을 가져오는 때가 종종 있는데, 성 콘라도의
일생도 그 한 예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북 이탈리아의 롬바르디아 지방 비아첸자 시에서 태어나 지위도 높고 재산도
풍부해 무엇하나 부족한 것이 없었다.
별로 일하지 않아도 생계에는 곤란을 느끼지 않은 그는 오락으로 사냥을 퍽 좋아했다.
어느 날 콘라도는 에전과 같이 산으로 사냥을 가게 되었는데 그때 어떤 짐슴이 수풀속으로
도망쳐 들어갔다.
이를 본 콘라도는 쫓다가 잡을 수 없자 경솔하게도 그 수풀에 불을 질렀다.
때마침 며칠간이나 가물었으므로 아주 완전히 마른 초목에 그 불은 순식간에 타 들어가
어느덧 큰 산불이 되고 말았다.
그것을 본 부근의 사람들은 갑자기 달려와서 불을 껐으나 그때는 이미 대단히 넓은 산림과
밭은 다 탔고 그 손해는 극히 많은 것이었다. 자신의 경솔함으로 이러한 큰일을 저지르게
된 콘라도의 놀람과 고민은 이루 말 할 수 없이 커서 그 장소에 있지 못하고 몰래 자기
집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그러던 동안에 우연히 거기 있었던 한 농부가 불쌍하게도 방화(放火)의 혐의를 받고
관가에 붙잡혀 그 당시의 습관인 고문을 당하게 되었는데 가련하게도 그 농부는 고통에
못 이겨 마음에도 없는 자백을 해 진 범인으로 판정되어 젖은 옷을 입은 채 사형대에
서게 되었다.
이 사실을 전해 들은 콘라도는 양심의 가책으로 가슴이 터지는 것 같았다.
결국 그는 많은 번민을 한 후 굳은 결심으로 자수하면서 무죄한 백성을 석방하고 자기를
어떠한 형벌로라도 처해 달라고 간청하며 또한 사람들에게 끼친 손해는 자기의 전 재산으로
될 수 있는 데까지 보상하고 싶다고 용기를 다해 간청했다.
그때는 이미 사람들의 격분도 대부분 사라진 뒤여서 결국 콘라도는 잠시 감옥에 갇혔다고
석방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무서운 체험은 그의 영신을 각성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옥중에 있으면서 마음속 깊이 현세 재물의 허무함을 깨달았다.
그리고 또 그의 미지근하던 신앙은 열성을 일으키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출옥해 집에 돌아와서 즉시 아내와 상의하여 다같이 하느님께 몸을 바치기로
결심하고, 아내가 비아첸자 시에 있는 성 클라라 수도원에 들어갈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자기는 일개의 순례자로서 영원한 도시 로마로 여행을 떠났다.
로마에서 많은 대성당을 순례한 후 성 프란치스코 아시시가 창립한 프란치스코 제3회에
입회하고, 그 후 남쪽으로 내려와 시칠리아 섬 노도에 있는 어떤 병원에서 남모르게
간병인으로서 살다가 다시 산속에 초막을 짓고 기도와 고행의 은수자로서의 생활을
40년간 계속했다.
그동안 그는 금요일마다 산에서 내려와 때로는 생활의 필수품을 구하던가, 때로는
고해 성사를 보든가, 때로는 그 읍내에 유명한 성 십자가에 존경을 바치든가 했다.
어느 날, 이 세상을 떠날 날이 다가온 것을 깨달은 콘라도는 1351년 2월 19일 가까운
마을의 성당을 방문해 미사에 참여하고 성체를 영하고 미사가 끝났음에도 자리를
떠나지않고 기도에 몰두하고 있었다.
얼마 후에 그 성당의 사제가 식사를 같이하려고 가보니 콘라도는 주 예수의 성상 앞에서
기도에 만사를 잊어버린 듯이 무릎을 꿇은 채로 임종하고 있었다 한다.
(대구대교구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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