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istance/♡ 줄리아의...♥

낙태 체험자들의 글

ohjulia 2006. 2. 20. 08:28



낙태 체험자들의 글




고향으로(그리스도의 향기)
 
    낙태를 거부한 미혼모 " 저는 이 아이를 야훼께 바치기로 하였습니다. 이 아이의 한평생을 야훼께 맡기고 싶습니다." (1사무 1,28) 제 가족이나 저를 아는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제가 미혼모의 위치에 서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어요. 저 역시도 이런 삶을 살리라고는 상상조차 해보질 않았구요. 하지만 제가 비난받던 위치에 서 보니까 그 누구라도 그 위치에 자기 자신이 서보기 전에는 쉽게 판단하고 평가해서는 안되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나는 그들의 삶의 과정도 모르는 상태에서 쉽게 비난하고 값싼 동정을 던졌지만 그들은 참 많이 아파했었겠구나… 그들은 참 많이 힘들었겠구나… 이게 바로 내 문제인데, 이게 바로 내 이웃의 아픔인데… 하는 반성을 했구요. 제가 24살 때의 일이었는데, 아이를 낳아서 혼자 기르겠다는 동생 친구를 만나서 설득하고 또 제 돈까지 들여 가지고 6개월된 아이를 낙태시킨 적이 있었어요. 제가 낙태시킨 것에 대해서 죄책감 같은 것도 커다랗게 느끼지 못했어요. 그런데 3월 6일이 우리 딸아이 백일이었어요. 딸아이 머리맡에 나비 모빌을 매달아 놨는데, 제가 그 나비 모빌을 흔들어 주니까 그 나비를 보고 애가 너무 신선한 어깨짓을 하더라구요. 그것을 보는 순간 어떤 이유를 갖다 붙여도 태아는 없어서는 안되겠구나, ’그래, 태아는 생명이니까 아이는 낳아야겠다’는 쪽으로 깨달음이 왔어요. 굳이 종교나 생명, 이런 이유를 갖다 붙이지 않더라도 ’아유, 저거 없애지 않고 낳으면 조그마한 일에도 가슴아파하고, 울 수도 있고 나처럼 이렇게 감정표현도 할 수 있는 어른으로 크는데…’ 그런 생각을 강하게 했어요. 아이를 낳아서 자기가 기르든, 기르지 못하든 많이 가슴 아프고 많이 상처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정말 많은 삶들이 낙태의 유혹에서 벗어나 생명의 소중함을 깨달았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힘들고 어려운 선택을 한, 그래서 많이 가슴 아파하고 방황하고 있을 나의 친구들에게 따뜻한 격려의 박수를 보내고 싶어요. 하느님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며 아기를 탄생시켜 행복한 가정을 꾸려가는 어머니의 체험기 어느 날 몸이 계속 아프기 시작하여 임신인 줄도 모르고 신경외과와 정형외과를 다니면서 치료를 받았지만 그래도 더욱 아프기 시작하여 개인 산부인과를 찾게 되었다. 진찰 결과 임신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하느님께 감사드리기 보다는 온통 걱정 뿐이었고 의사 선생님께서도 수술하기를 권했다. 그 병원을 나와 신경외과, 정형외과를 차례로 찾아가서 문의를 했더니 태아에게 피해가 가는 약은 아니지만, 그래도 잘은 모르니..... 하는 의문이 드는 말씀을 하셨다. 그때 머리를 스치는 것이 이 세상 모든 것은 주님께서 주관하신다. 당신을 믿고 하는 일이라면 도와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마음에 자리했다. 그 길로 버스를 타고 집에 오다가 바로 성당에 가서 성체조배를 하면서 한없이 울었다. ’주님 당신 뜻에 따를 수 밖에 없습니다. 약 먹은 점 용서해 주시고 건강한 아이만 태어나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드렸다. 가족은 비신자이고 아이들과 나 혼자서만 신자였기에 남편에게도 임신이었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고 더우기 약을 먹었다는 이야기도 할 수가 없었다. 친정식구들에게도 이야기하면 모두 낳지 말라고 할 것이 분명하여 아무에게도 알릴 수 가 없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하루에 한번 꼭 성체조배와 묵주기도를 올리면서 ’예쁜 아이보다는 건강한 아이를 주십사’라고 기도드렸다. 아이가 둘이나 되는데 또 임신했다고 의아해 하는 개인병원의 모습이 싫어 ’파티마병원’ 을 찾아갔다. 왠지 많은 위로가 되었다. 그러기를 몇 개월 다른 사람이 조금 알아볼 수 있게 되었을 때 시댁 식구들이 모두 야단이었다. 경제적으로 공무원이 받을 수 있는 혜택도 받을 수 없다는 조건을 내세우고, 사회적으로는 안다는 사람들이 또 아기를 낳으려 한다고 시어머니께서는 노발대발, 남편 역시 부끄러워서 다니지 못하겠다고 야단이었고, 시댁 식구들 모두가 다시 병원에 가라고 야단이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긴 탓인지 마음은 더욱 굳어져 갔고 그 어렵고 가슴아픈 말들을 받아들일 수가 있었다. 모두 둘 이상 낳으면 안되는 것처럼 야단이었고 큰 화제의 대상이 되어 어떤 오해까지도 받았다. 신자 중에서도 왜 아이를 낳느냐고 그냥 병원에 갈 것이지 하는 말을 한 이도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피곤해도 기도하는 것을 잊지 않고 예수님께 의탁하니 큰 어려움도 견딜 수가 있었다. 의사 선생님이 지시해 주시는 예정일이 되어 새벽 3시에 혼자서 병원을 찾았다. 예수님과 성모님께서 같이 하신다는 생각에 묵주를 들고 기도를 드리면서 진통을 겪는 산모를 위해서도 기도할 수 있었다. 두 번의 큰 진통 끝에 간호원의 딸이라는 말에 "건강합니까"하니 "건강하다"라는 말을 듣고 한없이 기뻤고 감사기도를 드렸다. 가족들의 멸시와 박해를 받으면서 태어난 우리 ’그라시아’는 지금 유아영세를 받고 잘 자라고 있다. 아주 건강하고 모든 게 빠르다. 옛말에 자기 먹을 것 가지고 나온다는 말이 있듯이 사실은 경제적인 것 때문에 걱정이 되었는데 모든 게 잘 되어 어려운 줄 모르고 키우고 있다. 처음에는 아기를 안아 보지도 쳐다보지도 않던 남편이 요즘은 ’그라시아’ 재롱을 좋아하고 예뻐하며 가정에 더욱 충실해지고 돈도 아껴쓰고 술마시는 시간도 줄어들었다. 할머니께서도 좋아하시고 위의 두 아이는 온통 동생 자랑과 함께 사랑으로 돌봐주고 있다. 건강하게 무럭무럭 자라서 주님위해 일할 수 있는 아이가 되었으면 하는 게 나의 바램이다. 주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주님과 함께라면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해낼 수 있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고 배웠다. "성체 안에 살아 계시는 주님, 어떠한 환경에서도 우리에게 당신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할 줄 아는 마음을 주십시오. ’당신은 오장육부 만들어 주시고 어머니 배 속에서 나를 빚어 주셨으니 내가 있다는 놀라움, 하신 일의 놀라움, 이 모든 신비를 그저 당신께 감사합니다. (시편 139.13-14)’라는 말씀처럼 각 인간에게 인위적으로 태아의 생명을 살해하는 죄악을 범치 않게 해 주십시오. 우리에게 사랑을 가르치시는 예수성심을 닮아, 우리 삶을 당신께 신뢰하며 당신이 인도해 주시는 역사대로 순리를 따르며, 그 안에서 참기쁨과 행복으로 당신께 찬미 영광드리게 해 주소서. 아멘" 낙태의 후유증으로 시달리는 어느 주부의 이야기 "여러분은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깊이 생각해서 미련한 자처럼 살지 말고 지혜롭게 사십시오." (에페 5.15) 중2 아들과 중1 딸아이를 둔 어머니입니다. 1976년 혼인해서 연년생인 남매를 키우다 보니 너무 힘이 들고 짜증스럽더군요. 개구장이 아이들이 귀엽기보다는 힘든 생각이 앞설 때 또다시 임신을 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아기를 키운다는 것이 짐스러웠고, 또 하고 싶은 일을 못하게 된다는 생각도 들어 남편과 상의 한 후 두렵고 떨렸지만 수술을 받았습니다. 그때부터 무서운 쾌락의 독이 저의 육신과 영혼 안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거듭되는 수술로 몸은 약해졌고, 이기심에 눈이 가려 무엇이 선이며 진리인지 분간하지 못했습니다. 저를 행복하게 해줄 의무가 남편에게 당연히 있다고 여겨, 오직 나 자신만을 위한 삶을 요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삶은 불행하게 되었습니다. 세 번째 수술을 받던 날 마취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혼수상태가 되어 하루를 보낸 저를 의사와 간호사가 겁이 나서 흔들어 깨웠습니다. 몸은 약해졌고 매사에 신경질적이 되었습니다. 삶의 의욕을 전혀 느끼지 못한 채 두려움, 위장병과 저혈압, 빈혈로 몸을 가눌 수가 없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귀한 생명을 무자비하게 죽여야만 했던 잔인함과 이기심이 나를 더욱 괴롭혔습니다. ’엄마, 살려주세요. 제 손을 자르지 마세요. 제 발을, 제…… .’ 마취 중에 저는 많은 눈물을 흘렸고, 누군가가 나를 슬프게 또 무척 고통스럽게 바라보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어릴 적에 듣던 그레고리안 성가가 들려왔고, 누군가가 나를 불렀습니다. 그때 울며 회개하고 용서를 청했습니다. 모든 죄악을 씻어 주시기를 간절히 원했을 때, 예수님은 저의 육신과 영혼을 어루만져 주시며 깨끗이 치유해 주셨습니다. 그 동안 무겁게 짊어지고 있던 멍에를 벗고 보니 세상은 참으로 아름답고 소중하기만 했습니다. 다섯 번째 아기를 낳은 어느 어머니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의 곁에 있다. 걱정하지 말라. 내가 너의 하느님이다. 내가 너의 힘이 되어준다. 내가 도와준다." (이사 41.10) 네 번째 아이가 네살 되던 1974년 1월, 아무래도 몸이 이상해서 며칠동안 혼자 고민하다가 산부인과에 갔더니 임신이 확실하다는 것이었다. 청천벽력이었다. 친척 아주머니뻘인 여의사는 아주 초기니까 간단하다면서 내게 당장 소파수술을 할 것을 권유했다. 순간 그냥 아무도 모르게 나 혼자서 처리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저녁에 남편이 돌아왔는데 막상 얼굴을 대하니 도저히 입이 열리지 않아 말도 못 꺼냈다. 수재민 주택에 애들 넷과 시부모님과 발 들여놓을 틈도 없이 복잡하게 살고 있는데 또 한 아이를 더 낳다니, 어찌할거나…. 다음 날 저녁에 결국 그 얘기를 했다. 만약 그이가 임신된 걸 꺼려하는 눈치면 나 혼자라도 산부인과에 가리라는 독한 마음으로. 산부인과에서 당장에 수술을 하자더라는 말을 듣고 남편은 깜짝 놀라면서 "큰 죄를 지를 뻔 했구먼. 하느님이 주신 아이니까 아무리 힘들더라도 잘 낳아 길러야지. 그게 무슨 소리요!" 순간 하도 고맙고 미안하고 착잡해서 또 훌쩍훌쩍 한참을 울었다. 그러나 5남매를 두신 친척 어른께서 전화를 하셔서 성모님이 먹여주시는 것 아니니 병원에 가서 수술하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시기도 했다. 그해 9월 8일 성모 성탄축일에 나는 탐스런 아이를 낳았다. 프란치스꼬, 그 아이가 올해 고1이다. 어려서부터 기운이 별나게 세고, 특히 수학에 뛰어난 재능을 타고났다. 우여곡절 끝에 하느님께서는 현재 살고 있는 집을 짓고 프란치스꼬의 첫 돌잔치를 치루도록 허락해 주셨다. 생활하기는 늘 빠듯하지만 5남매가 모두 신심이 건강하고, 제 할 일을 충실히 하며, 무엇보다도 성가정을 이루고 마음의 평화를 누리게 해 주시니 이에서 무엇을 더 바라랴!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계시니 그저 감사 찬미 드릴 뿐이다. 이십년 간의 번민 이제 겨우 새 살이 돋아난 상흔을 밖으로 드러내 보여야 하고, 20년이란 세월의 아픈 골짜기를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수치심과 민망스러움이 엄습해 오기에 이 글을 쓴다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후배 의사 선생님들이 저의 전철을 밟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가슴 켜켜이 쟁여 있던 응어리를 용기내어 이야기하겠습니다. 산부인과에서는 분만의 고통을 보상해주듯 새 생명의 신비스런 음향을 들을 수 있는 기쁨이 있는가 하면, 바로 그 옆자리에는 컴컴한 일면이 그림자같이 드리워져 있습니다. 수술을 받지 않으면 죽음을 택할 길밖에 없다는 미혼 여성의 수태, 맺을 수 없는 인연인 남녀의 임신 사례 등 시린 가슴에 고드름이 맺힌다는 딱한 사정이 미처 선택의 여지도 없이 산부인과 의사의 손을 묶어버립니다. 다음으로 현금의 유혹이 발목을 잡아당겨서 결국 그 자리에 주저앉게끔 됩니다. 그래서인지 가톨릭 신자 집안에서 의과 대학에 다니는 자녀를 가졌을 경우에는 아예 산부인과와는 거리가 먼 임상과목을 택하도록 권유함으로써 죄를 짓지 않도록 미리 막아 주는 일이 있는데, 참으로 현명한 처사로 여겨집니다. 첫 번째 단추를 잘못 끼우면 끝까지 잘못 끼우게 되고 수정하려면 번거로운 절차에 못지 않게 시간도 소요되듯이, 저 또한 이미 들어선 길에서 빠져나오는데 20년의 세월이 걸렸습니다. 경제적인 문제가 워낙 컸었고, 부채를 갚은 후 곧 그 일을 청산하리라 맹세했었지만, 매번 계속되어 강산이 두 번이나 변할 수 있는 시간에 와서야 겨우 종지부를 찍었으니 말입니다. 인공 임신중절 수술이란 생명을 제거하는 일이니만큼 머릿속 아주 먼 곳까지 우레처럼 번져 가는 침묵의 절규가 들리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기계를 잡는 분이 신자가 아닐지라도 꿈자리가 사납고, 특히 임신 중반기부터의 수술일 경우는 강도가 더욱 높아집니다. 탄식의 외마디 소리가 끊임없이 귓전을 울리고 질펀한 고뇌의 흔적이 망막에 머무르면 역겨움이 목젖까지 올라올 지경이어서 술이라도 한잔 마셔야 잠들 수 있겠다는 얘기를 가끔 듣게 됩니다. 하물며 신자인 입장에서야 어떻겠습니까? 나 역시 수술을 하는 동안 안절부절 못한 채 겁먹은 사슴 모양 목을 길게 뽑으면서 가슴조여야 했고, 꿈에도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시달림에 몸부림쳤었습니다. 가슴 한복판에 근조(謹弔)의 리본을 깊이 묻고, 외출을 삼가고 여행이나 오락과는 거리가 먼 죄인의 자세로 생활을 하였습니다. 어느 때는 앞가슴에 ’A’자를 달고 다닌 {주홍글씨} 의 여인같은 수치심에 휩싸이기도 했습니다. 차를 타면 교통사고를 당할 것 같고, 비행기 를 타도 추락할 것 같아 진땀을 흘리곤 하였습니다. 수술을 하는 중엔 푸드덕거리는 가엾은 생명의 날개짓을 의식하면서도 왜 그 자리에 머물러 있어야 했는지! 속마음으로는 시술을 중단하고 회개한 연후에 죽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쉽게 용단을 내리지 못했던 기간동안 나는 심한 홍역을 앓았다고 고백하고 싶습니다. 고열로 숨이 헐떡거리고, 결막염이 동반된 눈은 충혈되어 시야를 가리는데다가 영과 육이 중한 증세로 흉한 꼴을 하며 신음해야 했습니다. 이 병의 후유증도 심각하여 가장 깊고 캄캄한 절망의 기억으로부터 이따금씩 꿈틀대며 무의식중에 기어올라오곤 합니다. 심지어 내가 지은 죄가 그토록 무거운 만큼 가까운 이웃이나 가족에게까지 여파가 미치지나 않을까 하는 압박감도 적지 않았습니다. 어떤 생명은 여아이기 때문에, 또는 부모가 원치 않아서 숨져가는 모습이, 단지 유태인이란 이유로 처형당했던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을 연상하게 했습니다. 어두운 뜨락을 배회하면서 사지가 오그라드는 듯한 전율을 느끼면서도 칼로 자르듯 결단을 내리지 못한 이유는, 양심의 눈을 가리는 죄의 속성이 그러하듯 시간이 깊어 가면서 아픔은 무디어지고 자기 합리화의 덮개가 무서운 견인력으로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두 손바닥엔 살점이 에이도록 죄인의 화인(火印)을 새기고 영혼의 맑은 외침을 외면했던 많은 날들을 지금은 몹시 후회합니다. 나와는 달리 불혹의 나이에 하루 아침에 수술을 중단한 용기있는 선생님이 계십니다. 그 동기는 마리아 수녀회에서 배포한 비디오 테이프 ’생명 구출 운동’때문이었다고 합니다. 태아의 팔과 다리가 기계로 인해 찢겨나오고 팔딱팔딱 뛰는 심장이 그대로 나오는 화면과 4개월 된 태아가 죽지 않으려고 수술 도구를 피해 구석진 곳으로 쫓기는 영상을 보고는 굳게 결심을 했다고 합니다. 아마 잘려나간 수천 수만의 손이 허공 속에서 내젓는 환상에 시달렸던 모양입니다. 또 어떤 분은 부인의 간곡한 권유로 그만두었는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습니다. 임신 중절 수술을 하던 어느 날, 수술 도구인 겸자 끝부분의 둥근 꼭지가 부러져 자궁 안에 삽입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너무 놀란 나머지 황급히 하느님께, 자궁 내에 들어간 기계가 무사히 빠져나오면 다시는 낙태 수술을 않을 것이니 한번만 봐달라고 생전 처음으로 간곡히 청했답니다. 수분 후 잘린 기계가 나오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자신의 지금까지의 생활을 청산하고 신자로 입교했답니다. 그 당시 그분은 밥줄을 끊는 기분으로 기도를 드렸는데, 그후부터 가족 모두가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삶의 설계를 다시 꾸몄답니다. 고생은 되었지만 성가정(聖家庭)을 이루는 큰 축복을 받았다고 스스로 자랑스럽게 말하곤 합니다. 자기 호주머니 속의 적은 돈은 남의 주머니 속의 큰 돈보다 낫다는 세르반테스의 말이 아니더라도, 자신의 돈이 귀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더구나 경제적인 책임을 양어깨에 짊어진 가장이 그런 용단을 내리기까지는 부인의 숨은 기도가 뒷받침 되었으리라고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너도나도 한밑천 잡으려는 이 시대에 부동산 투기나 그 밖에 정당치 못한 방법으로 단시일 내에 재벌이 된 사람이 있음을 감안할 때, 몸과 마음을 철저히 연소시키는 산부인과 의사들이 안스럽게 느껴집니다. 더군다나 수술을 시행하지 않으면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먹이를 구하다 덫에 걸린 새앙쥐처럼 되지 않기 위해서 늦게나마 산부인과 간판을 내렸던 10년 전의 일은 내게 베풀어주신 하느님의 가장 큰 배려였다고 생각합니다. 그전에도 신부님의 강론을 들은 후 한 달, 꾸르실료를 다녀와서 두 달, 프랑스 루르드 성체 대회를 다녀와서 석 달 정도 손을 뗀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정한 일이라는 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떨리는 손을 가누면서 임신중절 수술을 다시 시작하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1982년 텔레비젼에서 방영하는 외화를 중간부터 본 적이 있습니다. 큰 은행을 털기로 작정을 한 은행 갱단의 부두목이 자기 아들을 앉혀 놓고, 이번 일만 성공하면 다시는 도둑질을 하지 않고 살겠다는 비장한 각오를 들려주는 것이었습니다. 중노인인 그가 그 나이 들도록 나쁜 길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방황하는 것이 애처롭게만 보였습니다. 결국 실패하여, 손 털고 가서 살려던 캐나다는 가보지도 못하고 죽는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나도 현금의 유혹과 환자들의 절박한 사정에 못 이겨, 내일로만 미루다가는 그 중노인처럼 되고 말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산부인과의 무거운 닻을 내리고 소아과를 단일 과목으로 진료하니 총수입이 10분의 1 이하로 줄어들어서 며칠간은 시덥지 않았고, 어떻게 살아가나 하는 조바심도 생겼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며칠이 지난 후 적은 수입에 익숙해졌습니다. 물론 각오한 바도 있었지만 이같이 빠른 속도로 적은 수입에 적응하리라곤 미처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습니다. 괜히 자랑스러웠습니다. 다시금 전쟁을 생각해 봅니다. 아주 훌륭한 저택에 살던 사람도 전쟁이 터지면 피난지로 가서 한가족이 모두 비좁은 단칸방에서 살게 됩니다. 이와 같이 사람에겐 자신의 환경에 놀랍도록 잘 적응하는 힘이 있습니다. 디오게네스는 세상의 명리는 자신을 묶는 쇠사슬이라면서 통하나만을 가지고도 만족하면서 살았던 거지 철인(哲人)입니다. 한없는 인간의 욕심을 그의 철학으로 풀어 간다면 쉽게 해답을 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밀어젖힌 무게보다 더 큰 환희와 감사가 찾아오던 날, 뒤숭숭하게 헝클어진 그 자리에 은혜로운 햇살이 풍성했습니다. 이젠 번개가 쳐도, 어디를 가더라도 홀가분하고 편안한 자세를 취할 수 있습니다. 성당에 나가서도 더 이상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내 영혼을 위해 기도해 주신 많은 분들 중에서, 20년을 하루같이 공들여 기도하신 왜관의 수사님, 정릉의 수녀님께 뜨거운 감사를 드립니다. 시술을 중단하자 환한 등불이 내 앞에 달려 있는 기분이었고, 누군가 멀리서 환영과 기쁨의 텔레파시를 보내는 것같이 느껴졌습니다. ’죄인에게도 은총이……’라고 베르나노스가 내 귀에 대고 속삭이는 것 같아 곧장 성당으로 향하여 조용히 주님께 무릎을 꿇고 생의 나머지 시간을 후박(厚朴)하게 나누면서 살기로 깊이 다짐했습니다. 지금 이 시간 산부인과 의사 선생님들 모두를 위해 기도합니다. 새 생명의 탄생을 도와야 할 의사가… 먼저 이 글을 쓸 수 있도록 용기를 주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구약 시대이기는 하지만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율법은 지금에도 지켜져야 할 하느님의 명령임을 믿고 있습니다. "사람을 죽이지 말라"시던 제 5계명은 예나 지금이나 우리가 지켜야 할 바입니다. 하지만 우리 인간들은 약하고 죄악의 유혹에 넘어지기 쉬운 본성이 있어, 그분의 가르치심대로 살지 않고 거역하다가 많은 고통과 환난을 겪게 되었습니다.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이 그 좋은 본보기일 것입니다. 필자가 산부인과를 선택할 때에는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는 것을 도와준다는데 자부심을 느끼고 시작했습니다. 따라서 그와는 반대의 역할 즉 생명의 탄생을 저지하는 행위도 포함될 수 있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지 못했습니다. 불행하게도 대학병원 근무를 마치고 개업하기 전까지 인공유산 시술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지 못한 것도 사실입니다. 막상 개업을 하고 보니 그 수술이 차지하는 비중이 수효로나 재정적으로나 적지 않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괴로웠던 것은 교회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때마다 짓눌러오는 압박감이었습니다. 어릴 적부터 독실한 신앙을 가진 가정에서 자라났고 한때 젊은이의 방황을 겪었지만 다시 되돌아오기도 했습니다. 한 분 형님은 목회자로서 활동을 하시는 등 이어한 가정적 분위기들이 나의 양심을 세차게 일깨웠습니다. 그러나 나는 주변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또 스스로가 판단하기에도 산부인과 의사가 이런 일을 감당하지 않으면 누가 하겠으며, 병원은 또 어떻게 운영할 수 있겠느냐는 등의 이유로 버티어 왔습니다. 끊임없는 갈등과 심한 고민이 계속되었습니다. 비록 임신 초기의 경우에 한해서만 시술을 했었지만 그것도 엄연한 생명 파괴란 사실을 결코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생명 경시 풍조가 만연된 오늘날, 여기에 편승해서 병원운영이라는 구실로 돈벌이에만 급급하고 있구나, 내 본연의 달란트는 인간의 생명을 구하고 새 생명의 탄생을 돕는 것인데 나는 정면으로 거부하고 있구나, 자부심을 갖고 달려온 내 목적지가 바로 이것밖에 안되는가, 이렇게 계속되는 좌절감과 패배감 속에 억눌려 살게 되었습니다. 기도하고 싶어도 이 죄책감 때문에 참된 기도가 되지 않았고, 설령 기도를 드렸다고 해도 들어주신다는 확신이 서질 않았습니다. "주여, 저는 제가 가는 길을 알지 못합니다. 부디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간신히 이렇게만 기도했습니다. 개업한 첫 해에는 경험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병원을 꾸려가고 관리하느라 정신없이 지냈고, 이러한 양심의 갈등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개업 2년이 지나 뒤였습니다. 여러 차례 이 수술을 하면서 이것은 주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행위라는 것을 확실히 깨닫게 되었고, 이 수술의 중단 내지는 산부인과 자체를 그만둘 각오까지 하였습니다. 낙태 수술을 몇 차례 행한 날은 왠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너무나 피곤하고 짜증스러웠고, 주위 사람들에게 이유없이 화를 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내 스스로에게 화가 난 것이었습니다. 그런 날들은 꿈을 꾸면서 준엄한 심판을 받는 체험을 했습니다. 말을 탄 수많은 무리들을 이끌고 하늘에서부터 오시는 분이 있었는데, 그분의 얼굴은 심판자의 진노한 모습이었습니다.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은 놀라서 도망가기에 바빴습니다. 나도 역시 너무나 급하여 그분께 용서를 빌다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온몸이 땀에 젖어 있었고, 살아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그래도 얼마 동안은 그 수술을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또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가족들과 함께 옆으로 철조망이 쳐진 길을 걷고 있었는데 다른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철조망 안에는 넓은 공터와 어두운 색의 낮은 건물이 있고, 왠지 그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이 매우 위험천만한 일같이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정문의 경비원들이 길 가던 사람들을 한 사람씩 부르고 있었습니다. 놀랐지만 결코 그 명령을 거역할 수가 없었습니다. 참으로 참담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가족들과 헤어져 그 수용소 안에 들어갔는데 직감적으로 죽음을 기다리는, 즉 죄인들이 음부(陰府)의 세계로 가기 전에 모여 있는 집합소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넓은 마당에 측은하게 쭈그려 앉아 있는 사람들을 보고 나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졌습니다. 불현듯 도망가고 싶어졌습니다. 기회를 보다가 건물 속으로 들어갔지만 어디로 더 가야 할 지 당황하고 있는데 엘리베이터 같은 것이 눈에 띄어 그것을 타고 4층 가량의 건물 꼭대기까지 올라갔습니다. 그곳에는 뒷산으로 통하는 출입구가 있었습니다. 절대로 붙잡혀선 안된다는 생각에 필사적으로 출입구를 빠져나온 뒤 계속 길을 따라 달려갔습니다. 하지만 또 철조망이 쳐진 울타리가 나왔고 경비원이 떡 버티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엔 몇 사람이 그 문을 통과하려고 서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출입증을 내보이는 것 같았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다가가서 진심으로 내보내줄 것을 하소연했습니다. 나의 간절한 마음이 통했는지 나는 아슬아슬하게 그곳을 빠져나올 수가 있었습니다. 이 꿈을 체험한 뒤 나는 도무지 더 이상 산부인과 의사를 계속할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마침 내가 다니던 교회의 목사님 설교 중에 그 동안 흔히 들어오던 평범한 말씀 하나가 내 마음을 결정적으로 움직이게 하였습니다. "죄악의 습관은 한 번 빠져들면 그것을 끊기는 너무나 어렵습니다." 정말 지금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앞으로는 기회가 없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느덧 낙태 수술을 그만둔 지가 1년 4개월이 되었습니다. 처음 몇 달 동안은 환자가 격감하고 병원 운영도 어려웠지만, 내 마음은 얽매인 사슬에서 풀린 듯 너무 홀가분했고 비구름 지나간 뒤의 청명한 하늘처럼 맑고 기쁘기만 했습니다. 차차 병원 운영도 정상화되고 나는 오히려 환자들에게 더욱 심혈을 기울임으로써 내게 주신 달란트에 충실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인공 유산은 의사들이 각성하고 거부해야 할 문제이긴 하지만 반드시 의사들의 책임만은 아닐 것입니다. 지금 인구 문제와 공해 문제가 심각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생각은 없지만, 법으로도 엄연히 금지되고 있는 인공 유산이 인구 정책상 묵인되고 있다는 것은 분명 잘못된 것입니다. 먼저 의사들의 각성이 필요하고, 동시에 생명의 고귀함에 대한 국민들의 의식이 높아져야만 이 바람직하지 못한 생명 파괴 풍조가 사라질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정부는 예방적인 차원의 가족 계획을 적극 홍보하고, 청소년 교육자들은 건전한 성교육과 아울러 도덕과 윤리에 대한 올바른 인식 교육을 통해 청소년들이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배려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가정 교육의 뒷받침이 있어야 합니다. 믿는 이건 믿지 않는 이건 모두에게 생명은 고귀하다는 것과 결코 인간의 욕심이나 편리함 때문에 무죄한 생명을 파괴할 수 없다는 인식이 참으로 필요한 시기입니다. 의사들이 앞장설 때 다소나마 이러한 시류가 없어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해보면서, 더이상의 죄책감을 갖지 않고 받은 달란트를 충실히 불려가게 해주신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어느 미혼모의 이야기 마리아 수녀회 모성원 부산의 4월은 아직 많이 추웠다. 그런 봄 어느 날이었다고 기억한다. 할머니 두분이 우리 사무실을 찾아 오셨다. 그중 연세가 많은 분이 시내에서도 차를 못 타서 ’키미테’를 붙이고 왔는데도 힘들다 하시며 꼭 알아봐야 할 일이 있다고 옆집의 아는 사람을 데리고 왔다고 말씀을 꺼내셨다. 당신은 어느 본당 신자이며 그래도 처녀시절에는 수녀원에 가려고까지 한 사람인데 그 당시 눈이 멀어 주님을 배반했노라며 하시는 말씀인즉 21세 된 막내딸이 동네 남자를 사귀다가 임신한 것을 알게 되었는데 그때가 3개월이었다. 그 당시 심정으론 보이는 것이 없고 다만 이 일을 어떻게 하나 하는 체면 때문에 무작정 산부인과에 가서 낙태 수술을 시켰다고 한다. 그때는 낙태만 시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줄 알았는데 문제는 그때부터 생겼다. 이 딸이 그때부터 이 나이 많은 어미도 싫고 남자도 보기 싫고 모든 것에 의욕을 잃고 집에도 있기가 싫어 가출을 한 것이었다. 집 나가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마침 택시를 탔는데 그 택시는 마약 취급하는 사람의 것이었고 딸은 될 대로 되라는 상태였기에 쉽게 그들에게 넘어가게 되어 몇 달만에 딸을 찾아보니 이미 마약 상습범이 되어 있었다. 어처구니 없지만 겨우 수습하여 어느 요양원에 입원시켰다. 그런데 이 무슨 날벼락인지 얼마 있지 않아 요양원에서 당신 딸이 임신 중이라 약물치료를 할 수 없으니 데려가라는 통보가 왔다는 것이었다. 이 어미는 세상에 이럴 수가 있는가 하고 억장이 무너지는데 그때서야 지난번 자신이 강제로 낙태시킨 것이 얼마나 무서운 죄악인지 깨달아지고 이것이 다 죄값이라는 생각이 들더라는 것이었다. 쉽게 해결해 보려고 한 것이 오히려 더 곤란하게 되었고 더 악화시킨 결과가 나온 것이었다. 그래서 고민 끝에 이곳 이야기를 듣고 의논하러 왔다고 하셨다. 딸은 아직 요양원에 있는데 집에는 요즘도 마약 취급자로 부터 딸을 찾는 전화가 온다고 하셨다. 그러나 딸은 집에다 데려다 놓으면 언제 마음이 동해 달아날지 모르고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이곳에 있으면 마음이 놓이겠으니 제발 좀 도와달라는 말씀이었다. 그때 나는 새 소임을 받은지 불과 2개월이 채 안되어 경험이 별로 없었고 마약을 취급한 그녀가 난동이라도 부리면 내가 보호해야 할 다른 미혼모들이 불안해 할까 겁도 나서 자신이 없다고 했다. 그러나 그 어머니는 자기가 죄인이니 제발 좀 도와달라고 애원을 하셨다. 참 어려운 처지라 거절도 못하겠기에 그러면 1주일만 같이 지내보고 그 동안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기면 즉시 데려가야 한다는 조건으로 약속을 했다. 그리고 2·3일 후에 가족들이 그녀를 데려왔는데 본명이 마리아였다. 피부는 까만 편이고 매우 거칠어져 있었으며 날카로운 눈매며 매우 염려스러웠으나 해군 장교인 그녀의 오빠도 함께 와서 부탁하는 등 가족들의 정성이 너무 열성적이라 그냥 1주일을 지내보니 다행히 얌전하고 잘 따랐다. 그 후 지내는 동안 공동으로 하는 아침 저녁 기도도 잘 따라했으며 개인적으로도 성당에서 자주 기도하고 마음이 안정되는 것 같았고 나중에는 표정에 밝음이 나타나고 누구보다 감사하며 기쁘게 살게 되었다. 그러나 검진 결과 성병도 있었고 심각한 상태여서 치료를 해 주면서도 아기는 제왕절개를 해서 낳아야 하지 않을까 염려했다. 그러나 시집도 안 간 사람이 배에 자국을 내는 것이 안된 일이라 열심히 치료를 받아 거의 완치된 상태였지만 조금은 걱정하고 있었다. 임신 4개월 쯤에 입소해서 봄, 여름, 가을이 지나고 이른 겨울이 시작되던 어느 날 토요일 밤에 진통이 와서 병원에 데리고 갔는데 조산원 선생이 산모가 이미 진통이 많이 와 있었고 아기는 작은 것 같으니 시도해 보겠다고 했다. 사전에 의사와 통화는 된 상태였다. 그런데 정말 별일 없이 무사히 분만을 했으며 아기도 탈이 없었다. 얼마나 고마운 일이었는지… 그 엄마와 나는 손을 꼭 잡고 마음으로 하느님께 감사드렸다. 그리고 얼마 후 몸조리를 하고 집으로 돌아갔는데 할머니가 다 된 그의 어머님은 매번 고맙다고 하였다. 얼마 후 그녀는 남포동의 어느 백화점에 나간다고 전화가 왔다. 이제 자신있게 잘 살게 된 것이다. 이것은 내가 겪은 미혼모 사례 중 제일 기억에 남는 사례이다. 여기서 한마디 덧붙인다면 오늘날 얼마나 많은 낙태가 알게 모르게 자행되는지, 또 그 해악은 심리적으로 육체적으로 사회적으로 이루 말 할 수 없다. 가난 때문에 5남매의 형제간에 뒤이어 임신한 기혼자가 절대로 낳을 수 없다는 것이, 또 미혼모의 난처한 입장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이라든가, 낙태가 과연 그 해결이 될 수 있는가? 라는 문제다. 오늘의 사례 발표는 그 좋은 보기라고 하겠다. "아가야, 지금 뭐하노?" 도 세실리아 남편의 출근과 두 유치원생의 등원 준비로 바쁘고 분주한 새 아침을 집을 나서는 세 사람과 나누는 인사로 저만치 배웅합니다. 마치 아가 대신 제가 [아빠, 안녕히 다녀오세요.]하면 남편은 이제 만삭으로 접어든 불룩한 제 배에 손을 얹고 [우리 아가, 오늘도 건강히 잘 자라라.]하시고, 두 아이에게 또 제가 [대건이 대현이 언니야, 유치원에서 많이 배우고 와서 얘기해 줘.] 하면 두 아이는 [음, 이따가 만나자 아가야, 엄마하고 기다려.]하며 계단을 내려섭니다. 그러면서 두 아이는 [아가야, 빠이빠이. 엄마도 안녕.]하며 손을 흔들고 저도 두 손을 흔들어 [언니야들 안녕. 대건이 대현이 잘 다녀와라.]하며 답해 줍니다. 남자 셋이 나간(?) 조용한 집에는 이제 뱃속의 아가와 저, 둘이서 함께 하는 따스하고 여유있는 하루의 시간이 주어집니다. 창문을 활짝 열어 크게 심호흡과 함께 가을을 마십니다. 숲 속에 그득한 10월의 가을을 봅니다. 알락달락한 산나무 열매에 날아드는 무슨 새인지도 알 수 없는 새들이 무수히 날아와 숲은 새들의 놀이터가 되고, 새들은 숲속에 합창을 뿌립니다.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날아다니며 지저귀는 새들을 보느라 탄성을 지를 사이도 없이 입가에는 웃음부터 먼저 나옵니다. 그 작은 날개짓이 너무도 귀엽고 사랑스럽습니다. 우리 아가도 태어나면 저렇게 귀엽고 사랑스럽겠지… 이제 두 달 남짓 남은 아가와의 만남이 자못 기다려지고 어떻게 생겼을까 하는 설레임 으로 가슴이 출렁입니다.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의 기도가 절로 바쳐집니다. 혼인성사와 함께 시작된 우리 부부의 가족계획은 선택의 여지가 없이 자연가족계획이었 습니다. 하지만, 남몰래 당황하고 어찌할 바 몰랐던 순간들은 있었음은 우리 부부에게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큰아들 대건[안드레아]를 낳고 곧바로 가졌던 둘째딸 [안젤라]를 낳은지 두 시간만에 하느님께로 보내며 자연가족계획은 실천하기 힘든 짐이 되어 무겁게만 느껴졌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 때는 자연가족계획에의 지식이 부족했음을 절실히 깨달았던 때이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고마우신 바오로씨의 협조와 관심으로 조금씩 이에 대한 지식을 쌓아갔고 무엇보다도 열심히 상담과 지도를 아끼지 않은 메리놀 병원 행복한 가정 운동 협의회의 도움이 컸습니다. 다시 둘째 아들 대현[프란치스코]를 낳은 후 우리 부부는 본격적으로(?) 자연가족계획의 선두 주자에 들어섰습니다. 실패(?)를 거울삼아 계속 자연가족계획을 하겠다고 하였을 때 유난히도 시어머님의 반대가 컸습니다. 또다시 아이를 가지면 호적에서 제명시키겠다고 까지 하시며 으름장을 놓으시는 시어머님께 우리 부부는 "예, 그렇게 하십시오." 하고 고개를 숙였습니다. 어느덧 햇수로 5년이 지났습니다. 이제는 누구에게도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고 슬그머니 교만과 더불어 관심도의 게으름이 고개를 들 무렵, 하느님은 우리 부부의 사랑에 또 무언가 계획이 있으셨나 봅니다. ’어? 이상하다.’ 했을 때 정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습니다. 그 순간 시어머님의 호령하시는 얼굴이 겹쳐지면서 두려움이 엄습했습니다. ’큰일났다’ 싶었습니다. 아이를 가진 지 3주일 만에 병원에 가서 임신을 확인하였고 그와 동시에 주위에서는[임신중절수술]의 유혹이 수도 없이 뻗쳐왔습니다. 남편에게 이 사실을 얘기하며 제 마음은 그야말로 혼란으로 뒤흔들리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때 남편은 정말 힘있게 저를 붙들어 주었습니다. "세실리아, 우리가 사랑할 때 하느님은 우리를 보셨고 그 때 이미 아기는 우리 사랑에 전제되어 있었던 생명이야. 다시 아기를 가졌다는 것은 걱정과 혼란의 대상이 아니라 바로 우리 아기라는 것을 깨달아야지." 하는 것이었습니다. 비로소 잠시 동안의 어둠이 걷히는 것이었습니다. 심한 입덧과 함께 아가를 위한 9일 기도가 시작되었습니다. 대건이 대현이를 마주보며 엄마 뱃속에 아기가 생겼음을 이야기했습니다. 아이들은 신기하리만큼 좋아했습니다. 귀여운 아기가 우리 집에 태어난다는 것에 대해 너무나 기뻐했습니다. 이제 7살, 5살인데 말입니다. 뒤늦게 시작한 학교 공부도 계속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시어머님이 정말 걱정이었습니다. 축복은 못해주실망정 아이를 지우라고 하실까 하는 것이 었습니다. ’주님, 우리 어머님 마음을 맡깁니다.’라는 기도를 바치며 드디어 3개월 되던 날 우리 부부는 어머님을 찾아뵙고 이실직고를 했습니다. 남편이 "어머니, 집사람 뱃속에 손녀가 하나 들어 있습니다."하고 말씀드릴 때 저는 어머님의 얼굴이 어떻게 변하실까 하는 생각을 하며 고개도 들지 못하고 완전히 죄인처럼(?) 쪼그라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어머님께서는 "자식은 많을수록 좋지. 셋까지는 괜찮아. 팔자에 있는 자식을 놓지 않으면 집안 망하는기라." 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저는 재빨리 목욕탕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리고 두 손을 움켜 안으며 ’아이구 주님 감사합니다. 성모 어머님 감사합니다.’하며 몇 번이고 감사를 드렸습니다. ’아가야, 너도 들었지? 할머니가 너를 받아주시는구나. 우리 주님께 감사드리자꾸나, 오! 나의 아가야.’ 이렇게 되기까지 함께 기도로 도움이 되어주신 메리놀 병원 행가운 협회와 여러 은인들께 저는 다시 기도로 보답하며 정말 하느님께 감사를 바칩니다. 아가가 태중에서 힘차게 손과 발을 놀리며 놀 때 우리 아이들은 신기해서 어쩔 줄을 모릅니다. "엄마, 나도 이랬어요?" "그∼럼" "아가야 지금 뭐하노?" 하면 저는 그러죠. "음, 손가락 꼽으며 놀지. 손가락을 빨기도 하고, 쉬도 하고, 발가락도 까딱까딱 하지." 하면 "아가야∼" 하며 두 아들은 엄마 배를 꼬옥 안습니다. 제가 밥을 먹거나 쥬스를 마시거나 하면 아이들은 "아가야, 많이 먹어." 하며 꼭 아가를 챙깁니다. 특히 둘째 아들 대현이는 조그마한 얘기거리도 꼭 아가에게 들려주곤 한답니다. 유치원에서 있었던 일이랑, 그림책을 보면서도, 동물원에 갔을 때 도 "아가야, 사자 보이니? 무섭지? 그렇지만 안문다. 사자는 우리 안에 있거든. 무서우면 아빠 뒤에 숨어라." 하는 것이었습니다. 한 번은 아빠가 종이학을 접어서 두 아들에게 나누어 주었을 때 제가 "우리 아가도 한 마리 접어주세요." 했더니 아빠는 노란 색종이로 학을 접어 제 배 위에 올려놓았습니 다. 아기의 움직임으로 종이학이 뱅글 돌아 제 배 위에서 까딱거릴 때마다 우리 가족은 얼마나 웃었는지 모릅니다. 마치 아기가 손으로 톡톡 건드리듯 하는 모양새를 보며 두 아들은 "엄마, 아가야가 정말 가지고 놀아요." 하며 신기해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즈음에는 이렇듯 아기가 생기지 않았으면 없었을 온갖 행복을 맛보며 이렇듯 행복합니다. 모두 다 하느님의 덕분이지요. 머지않아 아기가 태어날 때를 준비하며 두 아들에게 얘기합니다. 아기를 낳을 때 엄마와 잠시 떨어져 있어야 함을. 방학 중이 될 것 같아서 여간 다행스런 일이 아니지만 제가 병원에 있을 때, 조리를 위해 잠시나마 두 아들을 볼 수 없음을 생각하니 보고싶어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아빠와 할머니가 계심을 믿습니다. ’응아∼’ 하는 아기 울음이 우리 집에 함께 할 때 우리 집에는 또 얼마나 신기한 행복이 찾아와 줄까요? 그 때를 생각하며 다시금 기대로 손을 꼽습니다. 인간적인 온갖 사소한 걱정과 우리의 모든 염려들을 하느님께 모두 맡기며 이만 펜을 놓습니다. 보잘 것 없는 가난한 저희 집을 찾아주시고 늘 함께 해 주시는 오! 나의 하느님, 사랑 받으소서. 아멘. 어느 미혼모의 수기 나는 주님을 잊었었습니다. "†주께서 집을 아니 지어 주시면 집짓는 자들의 수고가 헛되리로다"고 하신 성경의 말씀은 진리였습니다. 그 날도 늦은 시간 퇴근길에 어떤 남자에게 짓밟혀 제 인생이 구겨져 버렸습니다. 그 사건이 한 바탕의 악몽이어서 깨어나면 깨끗이 지워지기를 몇 번이고 바랬지만 현실은 버릴 수도 피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절망과 슬픔으로 고통 속에 살아가는 중에 원수 같은 그 사람의 씨는 뱃속에서 자꾸 자라고 있었습니다. 저는 절망과 슬픔 속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몸과 마음의 상처나 후유증 같은 것을 생각할 것 없이 낙태를 하고 싶었습니다. 너무나 엄청난 일이었기에 친구나 가족에게 상의하고 싶었지만 부끄러움과 자존심이 이를 허락치 않았고 그들에게 부정한 미혼모로 비춰지는 것이 싫었습니다. 그런데, 당장 낙태를 하지 않으면 눈앞에 닥치게 될 결혼 문제, 직장문제, 그리고 가문의 체면문제들이 저를 불안과 공포를 몰아 저로 하여금 낙태를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푼푼이 모았던 적금을 해약하여 이 병원, 저 병원을 기웃거렸습니다. 그러나 병원의 문턱에서 용기가 나지 않아 힘없는 발걸음을 되돌리곤 했습니다. "네가 살려고 어린 생명을 죽이려느냐?" 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에 마음이 죄어 왔지만 그 말씀을 외면하고 싶었습니다. 하느님을 알고 있다는 것이 짐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제가 멀리했던 하느님께서 제 양심을 일깨우시는 안타까운 호소였습니다. 그럴 즈음에 산부인과에 근무하시는 상담원 선생님을 만나 낙태의 후유증과 생명의 존귀함에 대해 알게 되어 모든 것을 주님께 의탁하기로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새 생명이 태어나는 대신 직장을 포기해야 했고, 또한 약혼자의 품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날을 고통과 갈등으로 보낸 세월이었지만 하느님께 의탁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습니다. 그리고 자모원의 생활을 통하여 점차 마음의 평화를 찾게 되었고 아기가 태동할 때마다 한 생명의 절규를 듣게 되었습니다. 가족 모두에게 고통과 슬픔을 주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해결이 되었습니다. 고통을 통해서 무엇보다도 생명의 귀중함을 깨달았고, 한 생명을 살렸다는 자부심도 갖게 되었습니다. 순결을 잃었어도 마음만은 빼앗기지 말고 과거를 접어두고 늘 새롭게 마음의 중심을 찾으라는 김 신부님의 말씀을 자주 상기합니다. 이제 상대를 용서하는 마음도 생겼습니다. 산고를 겪으면서 폭풍우 속의 칠흙밤의 단말마 같은 고통을 통하여 저는 영혼의 신선함을 되찾았고, 아기는 생명을 얻었습니다. 저는 아기를 위해 기도합니다. 훌륭한 부모님 밑에서 잘 자랄 수 있기를…. 또한 미혼모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잃지 않도록 기도드립니다. 그리고 따뜻한 손길로 우리를 도와주시는 수녀님과 후원회님들을 늘 기억하겠습니다. † 생명의 찬가 박경희 과장(노원 을지병원 소아과) 최근에 적잖이 마음이 쓰였던 고민거리가 하나 있었다. 아직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지만 아마 내가 직장생활을 계속하는 한 그 문제도 숙제를 따라다닐 것 같다. 의과대학 임상실습과 수련의 시절에 산부인과를 돌면서 겪었던 신생아의 출생과정이 너무도 경이롭고 극적인 광경이어서 한 때 전공을 산부인과로 택하기로 마음 먹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 꿈은 곧 무산되고 말았다. 그 이유는 생명의 탄생에 대한 신비로운 체험과는 정반대의 느낌을 주었던 인공 임신 중절술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산산조각 잘려 나온 태아의 신체를 바라보면서 ’나는 살인 방조자’라는 자책감에 휩싸이게 되었다. 어떻게 태어나지 않은 생명이라고 이렇게 무참히 저버릴 수 있단 말인가? 산부인과 전문의가 되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겪어야 할 끔직한 과정이 나는 도저히 자신이 없어서 산부인과 의사가 되겠다는 꿈은 포기하고 말았다. 물론 본인이 의도적으로 그러한 시술을 피할 수 있다 하더라도, 낙태 목적이 아닌 치료 목적의 인공 임신중절술도 필요한 때가 많으므로 온전한 산부인과 전문의가 되기 위해서는 꼭 익혀야 할 기술이기도 했다. 나중에야 느낀 것이지만 내가 너무 소극적인 자세를 결정을 내리지는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가장 존경하는 후배인 한 자매는 그러한 문제를 적극적으로 대처해서 산부인과 전공의 과정도 훌륭하게 마쳤고, 이제는 일선에서 낙태를 반대하는 산부인과 전문의로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어쨌든 그러한 이유로 소아과 의사가 된 나는 적어도 낙태에 관한 문제로 마음을 쓰게 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런데 의학의 발전과 더불어 날로 개방되는 진단기술로, 최근에는 임신 16주정도 되는 태아의 심장 초음파 검사가 종합병원에서 많이 시행되고 있다. 내가 속해 있는 병원에서도 이 분야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서 결국 소아과의 심장부문을 맡고 있는 나에게 그 일에 맡겨지게 되고 말았다. 그 일로 인해 내심 신경이 쓰여졌던 이유는, 검사 자체에는 별 문제될 것이 없으나 그 검사 결과에 따른 책임은 너무나 막중하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오진이 생기게 되면 자칫 건강하게 태어날 수 있는 생명이 낙태의 위협을 받게 되고 말 것이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본래 이 산전 태아 심장 검사가 시도된 목적은 비교적 복잡한 심장기형이 있는 태아를 조기에 발견해서, 심장센터가 있는 안전한 의료기관에서 분만하도록 하여 출산 후 여러 병원을 전전하다 아까운 생명을 놓치게 될 위험성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의술이 고도로 발달된 일부 선진국에서는 태아를 꺼내어 심장 수술을 한 후에 다시 모태에 넣어 만삭까지 키운 후 분만토록 하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한 생명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시작된 검사가 우리 나라에서는 오히려 심장기형이 있는 아이를 조기에 발견하여 일찍 낙태를 시키는 쪽으로 결론을 맺게 되니 검사를 시행하는 나로서는 마음이 편할 리가 없다. 물론 나를 비롯하여 산모를 담당하는 산부인과 의사가 대부분의 심장기형이 출생 후에 수술로 완전히 치료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며 임신을 지속시킬 것을 권하지만, 우리 병원이 아니더라도 본인이 원할 경우 낙태 시술을 받을 의료기관은 얼마든지 있다. 이러한 이유로 가급적 이 검사를 안하게 되기를 바라지만 요즘의 의료현실에서는 사소한 기형이 있는 아기가 출생하더라도 산전 진찰한 산부인과 의사를 고소하는 사례가 늘고 있기 때문에 산부인과 의사들 입장에서는 오히려 검사의 필요성이 더욱 강조되고 있는 실정이다. 무고하게 희생되는 태아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는 의사들만의 힘으로는 큰 도움이 되질 못한다. 낙태 시술을 하지 말 것을 권유받은 한 산부인과 의사는 항변하듯 나에게 따졌다. "우리는 드러나지 않는 성과이지만 사회 안정과 인구 조절에 많은 기여를 했다고 생각해요. 그 많은 미혼모 아이들, 태어나면 버려질 기형아들, 양육 능력이 없는 부모에게서 대책없이 잉태되는 그 아이들이 해마다 계속 태어났더라면 이 세상이 어떻게 돼 있겠소! 누가 그 아이들을 책임질거요? 선생님이 다 책임질 수 있어요?" 솔직히 이러한 항변에 나는 당당하게 나설 수가 없었다. 그 의사의 말이 일부 맞는 부분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 모두의 숙제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끝까지 힘주어 말하고 싶은 것은 태아도 고귀한 한 생명이라는 것이다. 성경에서도 세례자 요한이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다고 하고, 그의 모친 엘리사벳은 마리아의 태중의 아기에게 복을 빌었으며, 엘리사벳의 복중의 아기가 마리아의 문안 소리에 기쁨으로 뛰놀았다고 전한다. 이러한 사실은 태아도 지각과 감성을 지닌 엄연한 인격체임을 증거해 주는 것이다. 어떠한 형편과 이유로도 태아의 생명을 짓밟는 것은 결코 정당화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여러 가지 악조건을 헤치고 이 땅에 태어나게 된 성가정 입양원의 모든 아기들에게 한 없는 축복을 빌고 싶다. 그리고 그들을 돌보느라 애쓰시는 수녀님들, 많은 숨은 자원봉사자들께 지면을 빌어 감사드리며 좀 더 많은 사람들이 무고하게 희생되는 태아의 생명에 관심을 갖고 그들을 보호해 주기를 두 손 모아 기도드린다. 주님의 도구가 되게 하소서! 이 아가다 베란다에 널어놓은 빠알간 고추와 노란 은행잎 어우러져 바람에 살랑입니다. 볼에 단풍숲이 곱게 드리운 아가가 팔베게에서 평온히 잠든 오후입니다. 이제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로 자장가를 부르며 기저귀를 개키는 나의 모습을 보는 사람들은 더러 동정의 눈빛일 것입니다. 순간의 결정들이 이어져 우리 인생의 행로를 만드는가 봅니다. 끊임없는 선택의 기로에 서 삶의 경험과 지식들을 토대로 후회없는 내일을 맞고자 재고해 보며 선택하고 결정하지만 때때로 돌이키고 싶지 않은 추억들이 스쳐 지나갈 때 가만히 고개를 흔들어보곤 합니다. 그날은 몹시 추웠습니다. 뼈 속까지 파고 드는 추위는 날씨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받아들여야만 하는 숙명, 기쁨보다 아픔을 수반한 임신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위로 딸만 셋인 제게 아들이었으면 하는 바람도 다소 없지 않았지만 나이도 그렇고 또 딸을 낳을지도 모른다는 불한감, 아이들을 많이 둔 나를 미개인처럼 바라볼 이웃사람들 의 눈초리와 특히 남편의 반대가 제일 서글펐습니다. 지난 여름, 등을 타고 내려오는 땀도 아랑곳하지 않고 터미널과 시내 한복판에서 낙태 반대 서명운동을 하던 내가 현실 앞에서는 이렇게 초라하고 비굴해지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평상시에 신부님이 들려주시던 말씀, 또 서명운동을 하면서 한 사람이라도 설득시키려 온 힘을 다했던 나의 말들을 주워담아 곱씹어 보아야 하는 현실이었습니다. 그러나 마음 깊은 곳에서 흩어진 분분한 생각들을 빨리 정리하고 우리 태아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여야겠다는 생각이 마구 용솟음쳤습니다. "주님, 이 아이는 당신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당신께 필요한 일꾼으로 써주십시오." 그간 남편은 수없이 낙태를 권유하고, 심지어는 말을 듣지 않는다고 술주정을 하며 십자고상까지 집어던지기도 하였습니다. 마음이 몹시 아팠지만 어려움 뒤에는 반드시 기쁨이 따른다는 믿음의 정신으로 지냈습니다. 이제 우리 사랑스런 효정이가 태어난 지 한 달 십오 일이 되었습니다. 그 동안 낙태를 강요했던 남편도 완전히 뒤바뀌어 효정이를 얼마나 좋아하고 귀여워하는지 모른답니다. 옹알이를 하며 벙긋벙긋 웃는 우리 효정이를 바라보면서, 문득 ’이 아이를 나의 어려움과 고통스러움으로 낙태를 했더라면’하고 생각하면 정말 소름 끼치는 무서운 일입니다. 효정이를 꼬옥 안아 봅니다. 효정이 언니들도 아이가 많다고 처음에는 싫어들 했지만 지금은 서로들 예쁜 싸움꾼들이 되기도 합니다. 죄는 지을수록 죄가 따르는 것 같습니다. 어려움이 따를수록, 불가능한 일일수록 참아야 할 지혜와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이번 일로 절실히 느끼면서, 주님의 사랑과 은혜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죽음의 수렁을 헤치고 나온 아이 마리아 수녀회 화창한 아침이다. 가을 하늘은 점점 높아만 간다. 가을 언덕에 소담스레 피어 있는 한 무더기의 코스모스 꽃들이 바람에 한들거린다. 마치 자신이 피어 있음을, 생명이 살아 있음을 예찬하는 것 같다. 재잘재잘 유치원 쪽에서 수십 명의 꼬마들이 줄 징 내려온다. 자그마한 배낭을 어깨에 메고 조그마한 모자를 쓰고 엄마 수녀님과 앞산으로 나들이 가나 보다. “ 안녕하세요? 우리 소풍가요. 여기 간식도 있어요.” 아이들은 나를 보자 저마다 인사를 한다. 아이들 한 명 한 명을 주시하던 나의 눈에 태양처럼 비쳐오는 아이, 그러나 지혜는 아니었다. 지혜는 행복한 가정에 양녀로 보냈다. 아마 지혜가 있다면 저 아이들과 함께 소풍을 가겠지. 지혜는 죽음의 골짜기, 죽음의 수렁을 헤치고 나온 아이였다. 지금 고인이 되신 창설자 소 알로이시오 신부님께서는 1984년부터 태아 보호 생명 운동을 하셨다. 소 신부님께는 ’침묵의 절규’와 ’이성의 소멸’이라는 낙태의 과정을 담은 비디오 테이프를 미국에서 매입, 한국어판으로 만들어 전국에 무료로 배포하셨다. 가톨릭, 개신교, 불교, 각 학교, 공장, 시내의 산부인과 등 우선 2만 개를 보냈다. 1988년에는 빌링스 박사가 연구한 자연 점액 관찰법과 또 2개의 비디오를 더 제작하셨다. 비디오나 책자, 영사기로 생명 운동에 대한 계몽을 시키던 회원들은 신부님의 지시에 따라 서울과 부산의 400군데 이상의 산부인과를 방문하여 의사, 간호사, 환자들을 만나 태아를 경시하는 현 세대 풍조에서 좀 더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의료인과 모성을 지닌 어머니가 될 것을 촉구했다. 그리고 낙태에 대한 사회 의식 구조와 변화를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여성의 고귀한 모체가 살인 장소가 되어 죄악의 피로 더럽혀지고 가장 신성해야 할 어머니의 모성애가 갈갈이 찢겨나감을 우리는 목격하였다. 그러나 의사 선생님께 또는 간호사에게 낙태하러 오는 사람들을 우리 병원에 보내 주시면 우리가 설득하겠노라고 그들 입장에서는 말도 안되는 부탁을 했으며 혹 부지시킨 아이들 중 생명이 붙어있는 아기는 우리 병원으로 보내주실 것을 간절히 부탁드렸다. 다행히 몇 명의 의사 선생님들께 협조해 주셨음을 감사드린다. 1989년 5월이었다. 모 병원에서 우리 수녀회로 전화가 왔다. 그 병원의 간호사가 전화를 한 것이었다. “수녀님, 급해요. 여기 살아있는 아기가 있어요. 빨리 오세요.” 수녀님은 병원위치를 메모한 후 간호사 선생님을 한 명 모시고 급히 떠났다. 아기를 포기한 엄마가 7개월 반 짜리의 아기를 낙태시켰는데 생생하게 살아있는 아기를 양심적으로 도저히 적출물에 넣을 수가 없었다고 했다. 간호사님은 의사 몰래 아기를 인큐베이터에 넣었으며 초조하게 수녀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수녀님은 무슨 큰 도둑질이라도 하는 냥 앞문으로도 못 나오고 뒷문으로 급히 나왔다. 그러나 그때부터가 문제였다. 미처 이동 산소도 준비 못했으며 다른 장비 또한 가동이 안 되는 등 악조건 속에서 2시간이나 허비하게 되니 아기는 숨이 넘어갈 듯 새파랗게 보였다. 우리 수녀님은 안절부절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랐다. “기사님 빨리 달리세요! 사고만 내지 않을 정도로 속력을 내세요.”평소에 차분한 기사님이었으나 얼마나 달렸는 지 3번이나 경찰에게 제지를 당했다. “하느님, 살려주세요.”수녀님은 계속 화살기도를 올리셨다. 아이는 숨쉬는 것 이 힘들어 보였으며 간호사님은 계속 인공호흡을 시켰다고 한다. 차마 아기가 죽는 것을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집에 도착한 수녀님과 간호사님은 땀에 흠뻑 젖은 모습으로 아기를 안고 신생아실로 뛰어 올라갔다. 대기하고 게시던 소아과 과장님과 간호사님들은 그 때부터 단 몇 초도 아기에게서 눈길을 떼지 않고 온갖 정성을 다하여 아기를 보살피셨다. 인큐베이터에 넣어진 아기는 매일 달라져 갔다. 손가락을 빨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손발을 오무렸다 폈다 온갖 재롱을 다 부렸다. 그 후에도 몇 명의 아이들이 더 왔으며 더러는 하늘나라에 가고 몇 명은 살기도 했다. 어떤 아이는 적출물에 넣으려니 살아 있어서 홑이불에 싸서 옆방에 두었는 데 추운 겨울인데도 불구하고 아침까지 냉방에 살아 있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은 간호사가 울면서 우리 집으로 전화를 주기도 했다. 우리는 보았다. 처참하게 살해되는 아기들의 모습을… 지혜를 살리기 위해 온갖 심혈을 기울였던 간호사님은 결국 의사가 그 사실을 아는 바람에 직장까지 버리고 다른 일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양심법에 따라 한 생명을 구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생애 중 가장 큰 기쁨이며 보람이라고 했다.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 모든 사람들이 생명의 고귀함을 깨달아 생명을 죽이기보다는 양심법에 따라 행동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긴 길이라 준비하는데 시간이 걸렸지만 낙태 천국이라는 말처럼 주변에 낙태로 인해 마음이 아픈 분들이 많아 이 글을 정리해 봤습니다. 낙태가 있어서는 안되겠지만 이미 낙태된 생명을 위해 신자인 우리들이 낙태된 아기를 위해 연미사를 드리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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