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Lord/† 聖人들의 삶을 통해서

성 가브리엘 포센티 (2월 27일) 신학생

ohjulia 2006. 2. 27. 00:19
고향으로 , 성 가브리엘 포센티
 

    성 가브리엘 포센티 (Saint Gabriel Possenti) 신학생

    성인의 활동연도 :1838-1861년 성인과 같은이름 : 가별, 뽀센띠, 뽀센티 산떼 뽀센티 집안의 13남매 중에서 11번째로 태어난 그는 프란치스꼬로 세례를 받았고, 부친이 스뽈레또의 사정관이었기에 고난회에 입회할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4살 때에 어머니를 잃고 큰누나 밑에서 자랐으나, 그 누나가 콜레라로 사망하자 그는 큰 충격을 받았고, 그곳의 예수회 대학교에서 공부하였다. 그는 매우 지성적이며 능력이 뛰어났고, 문학과 예술에도 놀라운 재능을 보였으나, 그 이면에는 깊은 신앙심과 성모님에 대한 신심,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높은 애정이 있었다. 1856년 9월, 그는 모로발레에서 고난회의 수련자가 되었다. 이때 그에게는 "통고의 모후의 가브리엘" 수사라는 이름이 내렸다. 그는 이때부터 사소한 일에서는 완덕을 얻으려는 특별한 노력으로 일생을 살았다. 그의 밝은 성품, 기도 정신, 다른 이들에 대한 배려, 규칙 엄수, 육체적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을 닮으려는 열망은 그의 모든 생활에서 빛을 발하였다. 이리하여 그는 불과 4년 동안의 수도생활로 높은 완덕을 닦았던 것이다. 그는 1862년 2월 27일 이른 아침에 이솔라디 그란 사쏘에서 운명하고, 1920년에 시성되었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 아시시가 전세계에 유명해진 이유는 말할 필요조차 없이 13세기에 청빈(淸貧)의 사도, 수도회의 창립자로서 유명한 성 프란치스코가 그 읍내에서 출생했기 때문이지만, 19세기에 와서 아시시 시(市)는 다시 종교적인 한 위인을 냄으로써 더욱 유명해졌다. 그는 통고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성 가브리엘인데 많은 점, 특히 쾌활한 성격, 완덕에의 열심, 돌연한 회개 등으로 그가 그 고향의 선배 성 프란치스코와 흡사하다는 것을 대단해 흥미 있는 점이라 할 수 있다. 통고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성 가브리엘은 1838년 3월 1일 전술한 바와 같이 아시시에서 출생하여 속명을 프란치스코라고 했다. 그는 열세 아들 중 열한째로 아버지는 아시시의 시장이었고,어머니도 경건하고 교양 있는 사람이라 아이들의 교육에 부족한 점이 없었지만 불행이라고 할 것은 프란치스코가 아직 4세밖에 안 되었을 때 훌륭한 어머니를 여읜 일이다. 어렸을 때의 프란치스코는 극히 활발하면서 성격이 드세고 거칠어 화를 잘 내는 점이 있고 해서 나중에 그가 성인이 되리라고는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교육을 맡아 본 어느 한 교사의 지도로 그는 점차 자기의 결점을 고치고 장점을 발휘하여 예수회의 학교에 들어간 후부터는 성격이 완전히 달라졌다. 본래 수재였던 그는 학교 성적도 대단히 좋아 가끔 수석을 차지하고 친구들 사이에서도 인망이 두터웠으므로 자연히 이 세상의 명예나 교제의 오락에 애착을 갖게 되었다. 또한 음악에 대한 재주나 광대한 지식 등이 상류 사교계(社交界)에도 출입하는 기회를 주었으므로 점점 사치함과 관극(觀劇)기타 쾌락에 취미를 갖게 되었다. 이와 같이 세속적인 사물에 몰두하면서도 타락의 길에는 떨어지지 않고 그의 영혼을 정결하게 보존할 수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으로 생각한다. 그는 종교상의 책임에도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았다. 하느님께서 그를 깨우쳐 주실 때가 다가왔다. 그가 세속적 쾌락에 빠져 있을 때 갑자기 병에 걸려 중태에 빠진 일이다. 그는 그때 비로소 이 세상의 허무함과 현세 사물의 허망함을 깨달아 만일 자기 병이 낫는다면 반드시 수도원에 들어가 일생을 하느님께 봉헌하겠다고 굳게 약속했다. 기적과도 같이 그의 중병은 낫게 되어 전과 같은 건강한 상태로 돌아갔다. 그러나 인간은 연약하여 전과같이 건강하게 되니 전에 누리던 쾌락에 다시 마음이 기울어져 약속한 것도 잊어버린 듯 돌보지 않았다. 이것도 하느님의 섭리였다. 그는 오래지 않아 다시 병을 얻어 이번에는 생명이 대단히 위험했다. 목이 부어 올라 숨이 막혔기 때문이다. 어느 날 밤, 고통이 아주 심해 견딜 수 없었을 때 그는 예수회의 순교자 성 안드레아 보볼라(축일:5월21일)의 상본을 들어 자기 목에 대고 그분의 전구로 이 병이 낫기만 하면 이번에는 틀림없이 수도원에 들어갈 것이라고 약속했다. 다행히 그의 원의는 허락되어 이번에도 기적적으로 회복되었다. 프란치스코는 다음날 즉시 예수외 수도원장을 방문하고 입회 허락을 청했지만, 지금까지 너무 세속적인 생활을 했기에 원장도 그의 진의(眞意)를 의심하여 고려해 보겠다고 약속하고 일단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동안 프란치스코도 생각을 달리해 예수회보다 더 엄격한 십자가의 성 바오로가 창립한 예수 고난회에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성모 승천 대축일에 있었던 일이다. 과거 스보레도에 한창 유행했던 콜레라가 성모님의 전구로 소멸되었다는 이유로 이날 많은 시민들의 사은 행렬(謝恩行列)이 대대적으로 거행될 때 프란치스코는 행열중 대주교께서 모셔들고 있는 성모상을 쳐다보니 그의 입이 움직이며 동시에 "프란치스코야, 어찌하여 세속을 버리기를 주저하고 있느냐?" 하는 말씀이 들리는 것 같았다. 그는 극히 감동되어 즉시 아버지께 자기의 결심을 말했다. 아버지는 장차 자기 직업의 후계자로 삼을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의외의 아들의 말을 듣고 매우 놀랐지만 하루종일 열심히 기도하며 생각한 결과 그것이 하느님의 성의라는 것을 깨닫고 마침내 허락했다. 2, 3주간후 프란치스코는 예수회 학교를 졸업했다. 여느 때와 같이 좋은 성적을 올린 그는 졸업생을 대표해 재주 있는 웅변으로 영광된 답사를 하여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지만 이튿날 즉시 스보레도를 떠나 모로발레에 가서 거기에 있는 예수 고난회에 들어갔다. 그때까지 아무에게도 수도회 입회 사실을 말하지 않았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놀라며 "일시적인 마음으로 수도원에 들어간 것 같으니 오래가지 못하리라. 곧 염증이 나서 도망쳐 나올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그 예상은 맞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참된 열심을 가졌으므로 입회 11일째 되는 날 수련자가 되는 허락을 받아 미사중에 예수 고난회 수도복을 입고 수도명으로 통고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가브리엘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그는 자기 자신을 수사들 중에서 제일 낮은 사람이라는 생각으로 형제들에게 봉사하고, 어려운 일이라도 자진해 맡아서 하고, 종종 있는 엄한 질책, 주의, 훈계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들으며 수도 생활에 최선을 다했다. 이런 일들은 지금까지 세속에 있으면서 늘 남보다 나았던 안락한 생활과 모든 칭찬과 명예와 인망을 한몸에 지니고 있던 그에게는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일단 수도 생활을 겸심한 이상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완덕에까지 도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굳은 의지를 갖고 있었다. 예수 고난회의 목적은 주님의 수난에 대한 특별한 신심을 갖고 주님께 대한 사랑과 존경을 드린것은 물론 통고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 대한 신심도 뛰어났다. 그가 성모 마리아를 얼마나 사랑했는가는 "성모 마리아는 내 마음의 마음, 내 혼의 혼, 이 세상에서의 내 천국"이라고 한 말로써도 가히 할 수 있다. 실제로 그가 덕행의 길을 꾸준히 걸어갈 수 있었던 것은 성모님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매일을 하느님과 함께, 회칙을 세밀한 점에까지 충실히 지키며 6년의 세월을 보낸다. 그때 신학, 철학 공부도 거의 마치고 다음해 성탄절에 성품 성사의 하품인 4품까지 받기로 되어 있었지만 주님의 섭리로 폐렴에 걸려 병고를 잘 참아내다가 1862년 2월 27일 마침내 영원한 행복의 나라로 떠났다. 그때 그의 나이는 24세였고, 세상을 떠난 후 많은 기적이 그의 전구로 일어났으므로 1908년에는 복자품에, 1920년에는 성인품에 올랐다. (대구대교구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