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Lord/† 聖人들의 삶을 통해서

성 투리비오 데 모그로베호 (3월 23일) 주교

ohjulia 2006. 3. 23. 06:40
고향으로 , 성 투리비오 데 모그로베호
 

    성 투리비오 데 모그로베호(St. Turibio de Mogrovejo) 주교

    성인의 활동지역 : 리마(Lima) 성인의 활동연도 : 1538-1605년 성인과 같은이름 : 뚜리비오, 뚜리비우스, 투리비우스 에스파냐의 마요르카(Mallorca) 섬 출신인 성 투리비우스 알폰수스 데 모그로베호(Turibius Alfonsus de Mogroveio, 또는 투리비오)는 법률을 공부하여 변호사 겸 살라망카(Salamanca) 대학교의 법학교수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라나다(Granada)의 종교 재판소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의 뜻과는 관계없이 평신도인 그가 페루 리마의 대주교로 임명되었다(1580년). 이 때문에 그는 먼저 사제 서품을 받고 주교 축성식을 거쳐 1581년에 페루에 당도하였다. 그는 착좌한 직후부터 인디언들의 권익 옹호 때문에 정부 당국과의 분쟁에 휘말렸고, 교구 내의 교회 규율 정립을 위하여 피나는 아픔을 감수해야 했으며,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교회의 따뜻한 손길을 뻗치기 시작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여러 교회와 학교 및 병원들을 세웠고 1591년에는 신세계 최초의 신학교를 세웠다. 그는 인디언 언어로 설교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교구 내의 각 지역을 거의 모두 방문하는 열성을 보였고, 교육과 설교에서 매우 뛰어났다. 그는 교구 내의 방문을 마치고 페루로 돌아오던 길에 산타에서 운명하였다. 그는 1679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11세(Innocentius XI)에 의해 시복되고 1726년 교황 베네딕투스 13세(Benedictus XII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그는 1538년 스페인의 마요르카에서 태어났다. 살라만카에서 법률을 공부했고, 그 후에는 변호사 겸 살라만카 대학교의 법학 교수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라나다의 종교 재판소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의 뜻과는 관계없이 1580년 페루의 리마 대주교로 임명되었으나 사실 그는 평신도였다. 이 때문에 그는 먼저 사제 서품을 받고 주교 축성식을 거쳐 1581년에 페루에 도착했다. 그는 착좌한 직후부터 인디언들의 권익 옹호 때문에 정부 당국과의 분쟁에 휘말렸고, 교구 내의 교회 규율 정립을 위해 피나는 아픔을 감수해야 했으며, 가난한 이를 위해 교회의 따뜻한 손길을 뻗치는 등 사도적 열성에 불타, 전국적으로 신앙의 개혁을 단행하고자 수많은 공의회를 소집했었다. 교회의 권리를 꾸준히 용호했을 뿐만 아니라 여러 교회와 학교 및 병원들을 세웠다. 1591년에는 신세계 최초의 신학교를 세웠다. 본토 인디언들의 복지를 위해 많은 시간을 들여 일했다. 그는 인디언 언어로 설교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교구 내의 각 지역을 거의 모두 방문하여 자신의 책임에 맡겨진 양떼들을 돌보았고 교육과 설교에서 매우 뛰어났다. 그는 교구 내의 방문을 마치고 페루로 돌아오던 길에 산타에서 1606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1726년 교황 베네딕토 13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대구대교구홈에서) 리마의 성녀 로사와 더불어 투리비오는 신대륙의 첫 성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26년 동안 남아케리카의 페루에서 주님을 섬겼다. 스페인에서 태어나 법률을 공부한 그는 매우 뛰어난 학자로서 살라망카 대학의 법학 교수가 되었으며, 또한 그라나다에 있는 종교 재판소의 재판장이 되는 등 매우 쉽게 출세했다. 그러나 그는 계속 일어나는 놀라운 사건들을 충분히 막을 수 있을 만큼 명석한 법률가는 아니었다. 즉 스페인의 식민지인 페루에 있는 리마 대주교 자리가 비게 되자 투리비오가 그 자리를 맡을 적임자로 지명되었다. 그는 그 지역을 오염시키고 있던 추문에서 교회를 구제할 수 있을 만큼 강한 성격과 거룩한 정신을 지닌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평신도에게 교회 직무 수여를 금하는 모든 교회법 조항을 열거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는 사제품과 주교품을 받고 식민 정책으로 최악의 상태에 있는 페루로 파견되었다. 스페인의 정복자들은 원주민을 갖가지로 억압하는 죄를 범했다. 더욱이 성직자들의 타락은 악명 높아서 그는 우선 이 분야에 모든 힘을 쏟았다. 그는 오랜 기간에 걸쳐 광활한 대교구를 열심히 방문하였으며, 한 장소에서 이삼 일씩 머물며 때로는 잠자리나 음식도 없이 돌아다니면서도 언어를 공부했다. 그는 매일 아침 자기 지도 신부에게 고해 성사를 받고 진실한 열성으로 미사를 봉헌했다. 그가 견진 성사를 준 사람들 가운데에는 리마의 성녀 로사가 있고 아마도 성 마르티노 데 포레스도 그 중의 한사람일 것이다. 1590년 이후에는 또 다른 위대한 선교사인 성 프란치스코 솔라노의 도움을 받았다. 그의 신자들은 가난했지만 매우 민감해서 다른 사람들의 공적인 동정을 받는 것을 두려워했다. 투리비오는 드러나지 않게 그들을 도와 줌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했다. 하느님은 굽어진 곡선을 곧게 쓰시는 분이시다. 종교 재판소의 어울리지않는 무대에서 빠져 나와 투리비오는 자신의 의지를 거슬러 가난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와 같은 착한 목자가 되었다.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가난한 사람들이 필요로하는 만큼 이웃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선물을 주셨다. 투리비오가 성직자들의 쇄신 운동을 시작했을 때 불의한 관리들이 있었던 만큼 자연히 많은 반대에 부딪혀 고생했다. 어떤 사람들은 인간적인 방법으로 그들의 습관화된 좋지 않은 생활 방식까지도 허용할 수 있다고 말하며 하느님의 계명을 ’설명’하고자 애썼다. 이에 투리비오는 테르툴리아노의 말로 그들에게 대답했다. "그리스도께서는 ’나는 진리이다’라고 말씀하셨지 ’나는 관습이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