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올라의 성 프란치스코 (St. Francis) 은수자 , 설립자
성인의 활동지역 : 파올라(Paola)
성인의 활동연도 : 1416-1507년
성인과 같은이름 : 프란체스꼬, 프란체스꾸스, 프란체스코, 프란체스쿠스, 프란치스꼬,
프란치스꾸스, 프란치스쿠스, 프랜시스
이탈리아 남부 칼라브리아(Calabria)의 파올라에서 태어난 성 프란치스코
(Franciscus, 또는 프란체스코)는 산마르코(San Marco)에서 프란치스코 회원들로부터
교육을 받았고, 15세가 되었을 때 파올라 교외에서 은수자가 되었다.
그 후 세월이 흐름에 따라 동료들이 불어나서 그들은 공동체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 공동체가 ‘미니미 프라트레스회’(Minimi Fratres, least brothers)의 시작이었다.
그는 자신이 은수생활을 하던 곳에 수도원을 세우고 회개와 애덕 그리고 겸손을 특히
강조하는 회칙을 확정하였으며, 세 가지 서원 외에 단식과 음식의 절제 서원을 덧붙였다.
또한 그는 3회원과 수녀회를 위한 회칙을 만들었다.
그의 생활이 거룩하고도 엄격하였던 만큼 그의 영적 영향 또한 커졌고 특히 상대방의
마음을 읽는 능력이 뛰어났다고 한다. 그의 명성은 곧 프랑스로 번졌다.
그가 지닌 예언의 은혜 역시 뛰어났고 수많은 기적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의 수도회는 교황 식스투스 9세(Sixtus IX)로부터 승인을 받았는데,
이때 이 수도회의 이름은 아시시(Assisi)의 성 프란치스코의 은수자회였다.
그의 명성이 죽어가는 프랑스 국왕 루이 11세의 귀에까지 전해져서 국왕이 그를 보기를
원하자 교황은 그가 프랑스로 가도록 명하였다.
왕은 프란치스코만이 자신을 치료할 수 있다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비록 치유되지는 못하였지만 큰 위로를 받고 만족했으며, 이 때문에 루이의 아들인
샤를 8세가 프란치스코의 친구가 되어 프랑스 내의 여러 곳에 미니미 프라트레스회
수도원을 지어주었다.
그는 프랑스의 플레시즈레투르(Plessis-les-Tours) 수도원에서 여생을 지내다가 사망하였다.
그는 1519년 교황 레오 10세(Leo X)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이탈리아의 파올라에 사는 경건한 야고보 말도리라 부부는 자녀가 없음을 자못 비관하면서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에게 전구를 청하며 자녀를 주실 것을 하느님께 간청했다.
그 결과 1416년 드디어 한 남자아이를 낳게 되었는데, 전구해 주신 성인에게 감사의 정을
표시하기 위해 그의 이름도 프란치스코라고 이름지었다.
그런데 그 아이가 눈병에 걸렸으므로 양친은 재차 성 프란치스코의 전구를 청하했다.
만일 낫게 해주신다면 장차 아이를 반드시 당신의 수도원에 보내어 하느님께 봉헌할 것을
맹세했다.
그러자 그 눈병도 즉시 완치되었다.
아버지는 자신도 엄격한 생활을 하는 사람으로서 아들에게도 똑같이 엄한 교육을 받게
했다. 그리고 그가 목적한 것은 다만 종교 교육뿐이었다.
프란치스코가 13세에 달했을 때 양친은 맹세대로 그를 어느 수도원에 들여보냈다.
그는 온갖 규칙을 충실히 지키며 순명하고 겸손하며 엄한 고행도 알뜰히 해 나갔다.
그러나 하느님의 계시로 자신도 사명이 다른 곳에 있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1년이
지나서도 서원을 발하지 않고 수도원을 떠나 자신의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 뒤 그는 양친과 더불어 아시시나 로마나 몬테카시 등에 순례의 여행을 떠났으나
돌아와서는 부모의 승낙을 얻어 자기 스스로 하나의 조그마한 바위굴을 만들고
자기 집의 고요한 방과 또다른 두 군데서 여유 있게 은수자와 같은 생활을 했다.
그는 끊임없이 기도하고 묵상하며 가끔 단식하고 또 밤새우며 매질하고 고신극기를
해 음식물로는 산에 서 뜯는 잡초 외에 아무것도 안 먹었다.
프란치스코는 되도록 남몰래 살려고 했으나, 이 같은 생활이 오래 세상에 알려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1435년 그가 겨우 19세때 이미 청년 수명이 그의 덕을 사모하여 제자가 되어 함께
같은 생활을 하겠다고 간청했다.
그러므로 신심이 깊은 그의 양친은 자기 아들과 그의 동료를 위해 하나의 작은 성당과
몇개의 조그마한 방을 지어 주었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이런 생활을 갈망하며 모여오는 이가 많아졌다.
그러므로 그 지방의 주교는그에게 다시 큰 수도원과 부속 성당의 건축을 허가했다.
그 공사가 시작되고 보니 그에 대한 세인의 존경이 얼마나 컸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그 이유는 그를 사모하는 이들이 부탁도 안했어도 사방에서 너도나도 서로
경쟁하며 기꺼이 그 공사에 협력해 주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뒤 몇 가지 기적이 일어났으므로 그에 대한 존경은 삽시간에 더 증가했다.
한 예를 들어보면, 그의 조카(여동생의 아들)는 평소 백부인 프란치스코를 사모하던
끝에 그의 수도원에 들어가서 같이 완덕의 길을 걸으려고 했지만, 그의 어머니는
좀체 승낙하지 않았다. 그러자 아들은 뜻밖에도 병에 걸려 죽고 말았다.
어머니는 이를 자기에게 대한 천벌로 생각하고 후회의 눈물을 머금으며 유해를 수도원의
성당에 운반하고 미사 성제 후 즉시 매장하려고 했다.
그러나 프란치스코는 이를 만류하고 조카의 시체를 자기 방으로 옮기게 하고 밤새도록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다. 그의 성심에서 우러나온 기도는 드디어 성공했다.
조카는 과연 죽음에서 소생했던 것이다.
그리고 나서 프란치스코는 그의 어머니한테 가 지금은 아들을 수도원에 들여보낼 마음이
없느냐고 물었더니, 어머니는 아직 아들의 소생을 모르는 상태였으므로 "그것은 물론
살아 있다면 수도원이든 어디든 제 가고 싶은 데로 맡길 겁니다. 그러나 그것도 지금에
와서 늦어 버렸습니다."하고 탄식하며 대답했다.
이에 프란치스코는 "아니 승낙만 하면 그만입니다"하고 말하여 되돌아 와서 아들에게
수도복을 입히고 즉시 어머니에게 면회시켰다고 한다.
프란치스코가 뭇사람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은 것은 이 같은 기적을 행한 이유만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누구에게든지 선량하고 동정이 깊고 친절했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이 적당할 것이다.
따라서 그에게는 형제들을 지도하고 인도하는 것이 조금도 어렵지 않았다.
훈계하거나 결점을 고쳐주고 하는 것은 어찌되었든 상대에게 불쾌한 감으 주기 쉬운 것인데,
그가 사랑에 넘치는 태도로 차근차근 설명해 주면 누구나 기꺼이 그의 훈계를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사랑을 위해 이것을 하십시오. 사랑을 위해서는 이것을 해서는 안됩니다." 그의 명령
방법은 늘 이와 같았다.
그리하여 그의 수도원은 나날이 번성해 갔으므로 딴 곳에도 같은 수도원을 세우려고
1473년 회의 규칙에 대해,정식으로 교황 식스토 4세의 허가를 얻어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의 산수사(山修士)회라고 부르게 했다.
이는 그 회의 규칙이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것을 기초로 하고 다시 준엄한 생활을
행하게끔 고친 데 기인한 것이다.
그러나 그 후 교황 알렉산데르 6세는 "가장 작은 자의 회"라고 그의 이름을 변경했다.
교황의 인가를 얻은 그 수도회는 이탈리아 뿐 아니라 프랑스, 스페인, 독일 등에도
설립했다.
특히 프랑스에 있어서 프란치스코회는 영국 왕에게 존대를 받고 성인의 기적을 전해
들은 루도비코 11세가 중병에 걸렸을 때 사신을 보내어 성인의 방문을 간청했다.
프란치스코는 교황의 명령도 있고 해서 1482년 4월 24일 그의 궁전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그때의 환영은 마치 교황을 맞아들이는 것처럼 성대했다.
국왕은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그의 손에 친구하며 자신의 병을 낫게 해 줄 것을 간구했다.
이에 대하여 프란치스코는 영원한 생명만이 중요하다는 것을 설명하고 천국을 위해 공로를
쌓을 것과 병자 성사를 받고 고요히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때는 1483년 8월 4일이었다.
그 뒤 계속 가롤로 8세와 루도비코 12세도 성인을 대단히 존경했으므로,
그는 그들의 원조로 몇 군데에 수도원을 더 세울 수가 있었다.
그러던 중 그가 이 세상을 작별할 날이 다가왔다.
일찍이 그것을 예감한 프란치스코는 형제들에게 하느님을 사랑하고 또한 서로 사랑해야
된다는 것을 훈계한 뒤 성인으로서 적합한 선종을 했다.
때는 1507년 4월 2일이었고, 나이는 93세였다.
시성식은 1519년 레오 10세 교황 시대에 행해졌다.
(대구대교구홈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