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빈첸시오 페레리오 (St. Vincent Ferrer) 신부
성인의 활동지역 : 프랑스, 에스파냐(Espana)
성인의 활동연도 : 1350-1419년
성인과 같은이름 : 빈센트, 빈첸시우스, 빈첸티오, 빈첸티우스, 빈켄티오, 빈켄티우스,
페레르,
에스파냐의 발렌시아(Valencia) 태생인 성 빈첸시오 페레리우스(Vincentius Ferrerius,
또는 빈첸시오 페레리오)는 귀족인 빌리암 페레리우스와 콘스탄스 미구엘의 아들로
태어났고, 1367년에 도미니코 회원이 되었다.
그는 학업을 계속하기 위하여 바르셀로나(Barcelona)로 갔으며, 불과 20세의 나이로
레리다에서 철학을 가르쳤다. 특히 그의 설교가 뛰어났는데, 유대인과 모슬렘 사이에서도
좋은 평판을 들었다.
1378년부터 서방교회를 진동시킨 교황 논쟁에서 성 빈첸시오는 아비뇽(Avignon)으로 가서
루나의 베드로(Petrus, 베네딕투스 13세) 추기경을 적극 지원하고 그의 고문 겸 고해신부가
되었다.
1399년 빈첸시오는 아비뇽을 떠나 10여 년 동안이나 프랑스, 에스파냐 등 여러 나라를
순회하며 설교하였다. 그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큰 감명을 받았고 개종자의 무리가
마치 군대의 행진처럼 무리지어 나왔다고 한다.
이즈음에 그는 성 도미니코(Dominicus)와 성 프란치스코를 대동하신 그리스도의 환시를
보았는데, 이것은 자신이 더욱 설교에 열심하라는 뜻이라고 해석하였다.
그의 개종자 가운데에는 시에나(Siena)의 베르나디네와 사보이아(Savoia)의 마르가리타
(Margarita)가 매우 유명하다.
그는 그 나라말을 모르는 지역에서도 설교하여 큰 성공을 거둠으로써 ‘말씀의 은혜’를
받았다고 많은 사람들이 믿었다.
또 이에 따르는 수많은 기적들 때문에 ‘기적을 행하는 사람’이란 별명도 얻었다.
1416년 그는 아라곤(Aragun)의 페르디난도 왕처럼 ‘베네딕투스 13세’(Benedictus XIII)에
대한 지지를 철회함으로써 교황 논쟁의 종지부를 찍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성 빈첸시오는 사망하기 3년 전부터 프랑스 여러 지방을 순회하며 설교하던 중 브르타뉴
(Bretagne)의 반(Vannes)에서 운명하였다.
그는 1455년에 시성되었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성 빈첸시오 페레르는 중세기에 있어서 가장 유명한 설교가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거의 전 유럽을 순방하면서 강론하고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그의 성공은 그의 언변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성덕 때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성 빈첸시오는 1357년 1월 23일 스페인의 발렌시아에서 태어났다.
귀족인 아버지는 윌리암 페레르로 발렌시아의 공증인(公證人)이었고, 어머니는 콘스탄시아
였다.
콘스탄시아라 함은 인내라는 뜻인데 사실 어머니는 그 이름대로 꾸준한 인내심으로 남편과
더불어 자녀 교육을 담당했고, 빈첸시오도 양친이나 스스의 말씀을 잘 들으며 부지런히
공부하고 기도했으므로 그의 뛰어난 재주는 충분히 발휘되어 학업의 진보는 놀랄 만큼
빨랐고 그의 덕행면에도 감탄할 바가 있었다.
그는 유난히 성모 마리아를 공경하고 어려서부터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양 이틀은 단식재를
지켰다.
빈첸시오는 18세때 도미니코 수도원에 들어갔다.
서원을 한 후는 바르셀로나, 발렌시아, 파리 등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고 1384년에
신학박사가 되었다.
그는 아무리 연구에 몰두해도 기도를 소홀히 하는 적은 없었다.
그의 학문으로서의 성공은 끊임없는 기도의 선물로 간주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 뿐 아니라 하느님께서는 그의 기도를 들어주시며 종종 기적도 일어나게 해 주시곤 했다.
그가 바르셀로나에 유학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심한 흉년으로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을때,
빈첸시오는 설교 중에 "곧 밀을 잔뜩 실은 두 척의 배가 들어와서 사람들을 구하여 주리라"
고 예언했다. 그러나 그 예언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게다가 예언한 당일은 심한 폭풍우가 닥쳐와서 배가 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게
되어 수도원장은 경솔히 예언한 그의 무모함을 비난했다.
그런데 막 그 시각이 되자 정말로 밀을 잔뜩 실은 두 척의 배가 항구에 들어 와서 사람들은
굶주림에서 면할 수가 있었다.
그가 발렌시아에 머물고 있을 때에 프랑스 왕 가롤로 6세를 방문하는 교황 사절 베드로
데 루나 추기경이 여행 도중 그 도시에 들른 일이 있었는데,추기경은 그의 학식과 사람됨에
감탄하며 일행중에 참가케 하고, 그 후 다시 그를 로마 교황청으로 불렀다.
당신 교회 내부에 어려운 문제가 생겨서 빈첸시오는 그 해결에 온힘을 다했지만
불행히 성공하지 못했다.
그는 이 일로 인한 과로로 병상에 눕게 되어 임종이 가까이 온 것처럼 생각되었을 때,
어느날 밤 예수께서 성 도미니코와 성 프란치스코를 데리고 그에게 발현하시어
"빈첸시오야, 일어나라. 나는 네가 나의 이름으로 프랑스와 스페인 양국에서 설교하기를
원한다. 너는 훗날 타향에서 죽으리라. 이제는 가서 사람들의 죄를 경고하며 심판 당할
날이 가까웠다고 전하라"하고 분부하셨다.
그리고 나서 그의 뺨에 손을 대시자 그의 병은 완전히 완치되었다.
그가 예수께 의탁 받은 사명을 완수하기 위한 허가를 교황께 받은 것은 2년 후의 일이었다.
그는 1398년부터 1419년 죽기까지 각지를 다니며 강론했다.
그는 항상 걸어서 다녔고, 연로한 뒤에는 당나귀를 타고 다닌 때도 있었다.
그리고 그 동안에도 엄한 단식재를 지키고 여가만 있으면 늘 열심히 기도했다.
그에게는 언제나 수도원의 형제가 수 명 따라다녔다.
그것은 고해성사를 주던가 혹은 예절을 행할 때에 돕기 위함이었다.
회개한 사람이나 그에게 교훈을 받고자 하는 사람은 늘 그의 곁에서 함께 했다.
빈첸시오는 하느님께 신기한 힘을 받고있었다.
그 중의 하나는 성령 강림때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사건처럼 그가 모국어인 스페인어로
강론을 해도 프랑스인들이 들으면 프랑스어로, 독일인이 들으면 독일어로 들리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
그의 강론을 듣는 청중은 종종 수천 명에 달했고 구전에 의하면 어떤 때에는 8만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는 대개 옥외(屋外)광장에서 강론을 했지만 그의 목소리는 구석구석까지 들렸다고 한다.
1417년 그는 브르다뉴 후착의 청에 의해 연로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토로 가게 되었다.
그곳은 매우 풍기 문란한 곳이었지만 그의 훈계로 말미암아 일변하여 오래지 않아
나쁜 풍속도 거의 개량되었다.
그 후 성인은 영국에 가려고 했으나 이미 노쇠한 몸이고 해서 부축하는 사람들은 그를
고국인 스페인을 모시고 가 거기서 돌아가시게 하고자 저녁 때 프랑스 브리타니의 반느를
출발했다.
밤새도록 걸었음에도 어찌된 일이지 다시 반느 마을 앞이라 그는 이곳에서 죽는 것이
하느님의 성의 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얼마 후 그는 갑자기 위독해져 병자 성사를 받고, 형제들에게 주님의 수난기를 읽도록
부탁하고 그는 합장하고 시편을 외우면서 하늘을 쳐다보며 편안히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때는 1419년 4월 5일이었다.
그는 1455년에 시성되었다.
(대구대교구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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