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Lord/† 聖人들의 삶을 통해서

성 안셀모 (4월 21일) 주교 , 교회학자

ohjulia 2006. 4. 21. 00:30
고향으로 , 성 안셀모
 

    성 안셀모 (St. Anselm) 주교 , 교회학자

    성인의 활동지역 : 캔터베리(Canterbury) 성인의 활동연도 : 1033-1109년 성인과 같은이름 : 안셀무스, 안쎌모, 안쎌무스 안셀모는 ’하느님이 헬멧으로 쓰시는 남자’란 뜻이다. 젊은 시절에 종교에 무관심하던 안셀모는 교회의 가장 위대한 신학자이며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이성의 도움을 빌어 신앙의 진리를 분석하고 밝히려는 시도를 했기 때문에 ’스콜라 철학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받았다. 안셀모는 15세에 수도원에 들어가기를 원했지만 아버지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나 12년 후에 종교에 무관심하고 방종하며 여러 해 동안 세속 생활에 젖어 있던 그는 결국 수사가 되고 싶었던 소원을 이루었다. 그는 노르망디에 있는 베크 수도원에 들어간 다음 3년 뒤에는 부원장으로 선출되었으며, 15년 뒤에는 만장 일치로 대원장이 되었다. 독창적이고 자유로운 사상가로 알려진 안셀모는 인내심이 많았으며 교양과 타인을 가르치는 기술 또한 뛰어났다. 그의 영도력하에 베크 수도원은 철학과 신학 연구에 있어 큰 영향을 발휘한 수도원 학교가 되었다. 한편 안셀모는 공동체의 요청에 따라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술에 비교할 만한 그 자신의 신학 저술을 출간하기 시작했다. 안셀모의 가장 유명한 저서는 ’쿠르 데우스 호모’(Cur Deus Homo:왜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셨는가?)이다. 1093년, 안셀모가 60세가 되었을 때 그가 원하지 않았는데도 캔테베리의 대주교가 되었다. 처음에 영국의 왕 윌리엄 로베르는 그의 대주교 임명을 반대하다가 나중에 승인하였지만, 교회 개혁을 위한 안셀모의 노력에는 협력하기를 계속 거부하였다. 결국 안셀모는 1100년 로베르가 죽을 때까지 자청하여 귀양살이를 하다가 로베르의 형제이며 후계자인 헨리 1세의 부름을 받고 영국으로 돌아왔다. 영국의 주교들을 서품하는 왕의 권한에 대하여 헨리 왕과 강경하게 대립하던 안셀모는 또다시 로마에서 3년 간의 귀양살이를 하였다. 그의 관심과 염려는 가장 가난한 사람들에게까지 미쳤으며, 교회 안에서 노예 매매를 반대한 첫 인물이 되었다. 안셀모는 국회로부터 인신매매를 금지하는 결의안 하나를 얻어 냈다. 안셀모는 그리스도의 진정한 추종자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가야만 했다. 그는 특히 정치 지배자들과의 갈등과 대립의 십자가를 졌다. 개인적으로는 온화하고 점잖은 사람으로서 평화를 사랑했지만 정의가 문제로 제기될 때에는 박해와 투쟁에서 물러서지 않았다. "아무도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과 다른 소망을 하늘에서 가질 수 없다. 한 사람의 바람은 모든 사람의 바람이 될 것이며, 모든 사람의 바람과 각 사람의 바람은 또한 하느님의 바람이 될 것이다." (성안셀모,’Opera Omnis’ 편지 112)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중세기의 대학자이며 큰 인물이라고 칭찬 받은 성 안셀모는 1034년 이탈리아의 비에몬든 주 아오스타 시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신심행사를 좋아하며 수도원에 들어가서 일생을 하느님께 봉헌하려고 결심했다. 그러나 혈기왕성한 청년기에 이르자 어느덧 그런 훌륭한 결심을 버리고 경솔하게도 방탕한 생활로 흐르게 되었다. 아버지도 가끔 권면했으나 아무 효험이 없었으므로 벼러고 벼르던 끝에 엄벌을 주려고 하니 안셀모는 집을 뛰쳐나와 프랑스에 가서 3년이란 기간을 정처 없는 방탕생활로 보냈다. 그러나 그러한 그의 양심도 마침내 각성할 때가 돌아왔다. 그는 과거의 실수를 후회하고, 그 보속으로 그 후부터는 성심껏 학문의 연구를 시작해 목적 달성을 위해 당시 박학하고도 유명한 랑프랑크 신부가 수도원장으로 있던 노르만디 주 베크의 수도원을 방문했다. 랑프랑크는 통회의 정이 비상한 청년 안셀모의 입회를 허락했는데, 곧 그 정신적 재능의 뛰어남을 인정하고 학문 뿐 아니라 영적 방면에도 적절한 지도를 아끼지 않았다. 이리하여 안셀모는 오랜 시련과 많은 역경을 겪고 난 후 겨우 1060년 베네딕토회의 수도복을 입게 되었다. 때는 그가 26세 되는 해였다. 그 뒤부터의 안셀모는 전보다 배로 열심히 분발해 곧 모든 수사들의 거울로 공경을 받게 되어 3년후에는 일찍이 원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연소한 몸이었으나 비상한 총명과 수단으로써 전 수도원을 다스리며 훌륭한 성적을 올렸고, 아울러 동료에게는 극히 관대하고 자신에 대해서는 엄격했다. 그리고 주간에는 많은 학생들에게 신학을 가르치고, 야간에는 거의 기도와 묵상으로 시간을 보냈다. 또한 그는 거의 매일처럼 단식재를 지내고 십자가를 쳐다보고서는 늘 자신의 죄를 눈물을 흘리며 통회하고 주님의 뜻에 맞지 않는 것은 힘을 다해 피했다. 그의 박학과 성덕에 대한 소문이 점차로 세상에 퍼지자 수많은 학생의 무리가 그 수도원으로 몰려들었다. 1093년에는 영국 왕 윌리암으로부터 그를 영국 제1의 대성전 켄터베리의 대주교로 임명한다는 통지가 내려 국민들도 환영하며 그를 맞이했으나 안셀모는 노쇠해 그 임무를 맡을 수 없다고 이를 사퇴했다. 그래도 사람들은 그를 무리하게 병석에 있는 왕의 자리에까지 모시고 가서 그의 손에서 주교 임명의 표지인 주교 목장(牧杖)을 받게끔 했다. 그러므로 안셀모도 왕이 몰수한 교회의 재산을 반환해 줄것과 정당한 교황 우르바노 2세를 인정한다는 서약을 듣고 나서 마침내 주교 취임을 수락했다. 그러나 이 주교직은 그에게 얼마나 많은 심적 고통을 주었는지 모른다. 왕은 병이 낫자마자 전의 약속을 잊은 듯이 매사에 교회를 압박하고 간섭했다. 안셀모는 이러한 왕의 비위를 거슬리게 되어 신변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두 번이나 영국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그의 예지와 아버지와 같은 사랑은 결국 교회와 왕의 사이에 평화가 깃들게 하는데 성공했다. 대주교는 여러 가지의 심로와 노력으로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졌으나 마침내 승리를 거두고 영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그 후 곧 중병에 걸려 최후의 한 달 동안은 음식조차 취하지 못하고 1109년 성주간 수요일 마침내 한많은 세상을 떠나 주님의 품으로 달려갔다. 그 뒤 켄터베리 주교좌 성당에 있는 그의 묘에서는 많은 기적이 일어났다. 그와 같은 시대의 사람이고 독실하던 도리데니오 수도원장은 안셀모를 "그의 신앙은 극히 깊었고 예지는 뛰어나고 그의 행위는 거룩하고 마음은 경건했으며,그의 웅변은 유창했고 생활은 타인의 모범으로서 충분했다. 그는 전력을 기울여 사업을 행하고 끊임없이 성서를 묵상하고 모든 덕에 있어서 출중했다."하고 말했으니,이는 당연한 칭찬이라 할 수 있다. 그는 1720년 교회의 박사로 선언되었다. 단테는 신곡의 천국편((Canto ⅩⅡ)에서 태양권 안에 있는 빛과 힘의 영들 가운데 안셀모를 언급할 정도였다. (대구대교구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