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ily/★ 빠다킹 신부님과 새벽을..

평화의 기도를 정성껏 바칩시다.

ohjulia 2006. 5. 16. 11:43
2006년 5월 16일 부활 제5주간 화요일

제1독서
사도행전 14,19-28
그 무렵 19 안티오키아와 이코니온에서 유다인들이 몰려와 군중을 설득하고 바오로에게 돌을 던졌다. 그리고 그가 죽은 줄로 생각하고 도시 밖으로 끌어내다 버렸다. 20 그러나 제자들이 둘러싸자 그는 일어나 도시 안으로 들어갔다. 이튿날 그는 바르나바와 함께 데르베로 떠나갔다.
21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그 도시에서 복음을 전하고 수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은 다음, 리스트라와 이코니온으로 갔다가 이어서 안티오키아로 돌아갔다. 22 그들은 제자들의 마음에 힘을 북돋아 주고 계속 믿음에 충실하라고 격려하면서,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23 그리고 교회마다 제자들을 위하여 원로들을 임명하고, 단식하며 기도한 뒤에, 그들이 믿게 된 주님께 그들을 의탁하였다.
24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피시디아를 가로질러 팜필리아에 다다라, 25 페르게에서 말씀을 전하고서 아탈리아로 내려갔다. 26 거기에서 배를 타고 안티오키아로 갔다. 바로 그곳에서 그들은 선교 활동을 위하여 하느님의 은총에 맡겨졌었는데, 이제 그들이 그 일을 완수한 것이다.
27 그들은 도착하자마자 교회 신자들을 불러, 하느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해 주신 모든 일과 또 다른 민족들에게 믿음의 문을 열어 주신 것을 보고하였다. 28 그리고 제자들과 함께 오래 머물렀다.


복음 요한 14,27-31ㄱ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7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28 ‘나는 갔다가 너희에게 돌아온다.’고 한 내 말을 너희는 들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아버지께 가는 것을 기뻐할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보다 위대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29 나는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다.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가 믿게 하려는 것이다. 30 나는 너희와 더 이상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않겠다.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나에게 아무 권한도 없다. 31 그러나 내가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령하신 대로 내가 한다는 것을 세상이 알아야 한다.”




며칠 전, 어떤 공동체의 신부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자신의 공동체가 성지순례를 오는데 바쁜 일정으로 인해서 11시 미사에 함께 하지 못할 것 같다는 것이지요. 대신 9시 30분쯤 미사를 먼저 하면 안 되겠느냐는 내용의 전화였지요. 저는 흔쾌히 허락했지요. 제가 그 시간에 미사를 집전하는 것도 아니고, 신부님께서 직접 하신다고 하니 제가 반대할 이유가 없지요. 그래서 저는 10시 30분에는 순례객들에게 고백성사를 주기 시작하니 그 전에만 미사를 끝내달라고 부탁을 드렸습니다.

바로 어제가 그 공동체가 성지순례를 하시겠다고 한 날이었지요. 그런데 그분들은 9시 30분이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성지에 도착하지 않는 것입니다. 10시가 조금 넘어서야 그 공동체가 도착을 했고, 10시 10분이 되어야 간신히 미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화가 나기 시작했어요.

‘이렇게 늦게 올 것이면 아예 더 늦게 와서 성지 미사에 함께 하지…….’, ‘지금 미사 시작하니 11시 전에는 끝날 수 있을까?’

이러한 생각들이 떠올려 지면서 제 마음은 평화가 아니라 미움으로 가득 차게 되더군요. 그런데 그 신부님께서는 저와의 약속을 최대한 지키기 위해서 미사를 너무나 빨리 끝내주셨습니다. 더군다나 성지 발전을 위해 써달라고 하시면서 기부금까지 주고 가시는 것이었어요.

제 마음 속으로는 신부님에 대한 안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신부님께서는 성지를 배려하는 마음에서 미사도 빨리 끝내주시고 기부금까지 마련해서 주시더라는 것입니다. 신부님께 너무나 죄송하고 동시에 감사한 마음을 간직하지 않을 수가 없었지요.

많은 분들이, 아니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마음에 평화가 늘 함께 하기를 원하지만, 생각과 달리 그렇게 쉽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그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요? 바로 내 자신의 부족함 때문입니다. 내 안에서 일어나는 다른 이에 대한 섣부른 판단과 미움, 그리고 분노 등의 마음이 평화를 없애고 있는 것이지요.

이렇게 평화를 간직하지 못하는 나약한 우리들에게 주님께서는 힘을 불어 넣어주시면서 말씀해주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당신 자신을 평화의 도구로 써 달라고 기도하셨던 것처럼 부족한 우리 역시 평화의 도구로 써달라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 나를 당신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위로 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 받기보다는 이해하고, 사랑 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해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평화의 기도를 정성껏 바칩시다.



패가망신을 시킨 토끼('좋은 글' 중에서)

송나라 때 어느 시골 농가에서 있었던 일이다.

근면 성실하기로 칭찬이 자자했던 한 농부가 열심히 밭을 갈고 있는데 느닷없이 토끼 한 마리가 숲속에서 뛰어 나오더니 밭 가운데 있던 감나무에 머리를 찧으며 죽었다. 밭을 갈던 농부는 졸지에 토끼 한 마리를 얻고나자 힘든 농사를 죽어라고 짓는니 차라리 죽은 토끼를 줍는 것이 편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들고 있던 호미며 쟁기를 팽개쳐 버리고 나무 옆에 쭈그리고 앉아 어서 토끼가 숲속에서 뛰어나와 죽어주기만을 학수 고대했다. 그러나 3박 4일이 지나고 3년 6개월이 지나도록 토끼는 나타나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농부의 손길이 닿지 않은 농토는 폐허처럼 변해 버려 다시는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땅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농부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뼈저리게 후회했지만 그래봐야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 토끼, 무슨 속상한 일이 있어 자결의 길(?)을 택하였는지는 모르겠지만 하필이면 성실한 농부의 앞에서 죽음을 택해 전도양양한 한 젊은이를 폐인으로 만들었단 말인가, 토끼의 잘못이 너무나 크다?

아니다. 이는 자신에게 갑자기 찾아온 요행에 기대를 걸고 그 동안 기울였던 노력을 포기해 버린 농부에게 잘못이 있다.

요행, 그것은 어쩌다 찾아오는 보너스 같은 행운이다. 이를 믿고 자신의 할바를 다하지 않는 자는 어리석다. 요즘 지하철역 등에서 동전으로 박박 긁어대는 이른바 즉석복권인가를 하는 사람들 중에는 젊은 청소년들이 쉽게 눈에 띈다. 복권을 긁어대는 그들의 눈빛이 이 훈장은 너무나 싫다. 번들거리는, 요행이 찾아와 주기를 기다리는 그들의 눈빛은 어서 토끼가 뛰어나와 감나무에 머리를 박아주기를 기다리는 농부와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부와 재물은 자신이 노력해서 얻은 것만이 가치있고 소중한 것이다. 어쩌다 찾아온 행운으로 인해 얻은 재물은 또 한순간에 날아가 버리고 만다. 어리석은 농부가 되기 싫다면 노력하라. 성실히 노력하는 자에게만이 진정한 앞날이 있을지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