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ily/★ 빠다킹 신부님과 새벽을..

상대방의 듣기 싫은 말에 화를 내지 맙시다. 나를 위한 말일 수 있답니다

ohjulia 2006. 5. 19. 06:26
2006년 5월 19일 부활 제5주간 금요일

제1독서
사도행전 15,22-31
그 무렵 22 사도들과 원로들은 온 교회와 더불어, 자기들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뽑아 바오로와 바르나바와 함께 안티오키아에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뽑힌 사람들은 형제들 가운데 지도자인 바르사빠스라고 하는 유다와 실라스였다. 23 그들 편에 이러한 편지를 보냈다.
“여러분의 형제인 사도들과 원로들이 안티오키아와 시리아와 킬리키아에 있는 다른 민족 출신 형제들에게 인사합니다. 24 우리 가운데 몇 사람이 우리에게서 지시를 받지도 않고 여러분에게 가서, 여러 가지 말로 여러분을 놀라게 하고 정신을 어지럽게 하였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25 그래서 우리는 사람들을 뽑아 우리가 사랑하는 바르나바와 바오로와 함께 여러분에게 보내기로 뜻을 모아 결정하였습니다. 26 바르나바와 바오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은 사람들입니다.
27 우리는 또 유다와 실라스를 보냅니다. 이들이 이 글의 내용을 말로도 전할 것입니다.
28 성령과 우리는 다음의 몇 가지 필수 사항 외에는 여러분에게 다른 짐을 지우지 않기로 결정하였습니다. 29 곧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과 피와 목 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와 불륜을 멀리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것들만 삼가면 올바로 사는 것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30 사람들이 이렇게 그들을 떠나보내자, 그들은 안티오키아로 내려가 공동체를 모아 놓고 편지를 전하였다. 31 공동체는 편지를 읽고 그 격려 말씀에 기뻐하였다.


복음 요한 15,12-17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2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13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14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15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16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게 하려는 것이다. 17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며칠 전 사무실로 전화 한통이 걸려왔고, 사무장님께서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사무장님께서 깜짝 놀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세요.

“그런 일 전혀 없으니까요. 못믿으시겠으면 성지에 와보세요.”

전화를 끊으신 뒤 어떤 전화냐고 여쭤보니, 전화하신 분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더래요.

“이거 물어봐도 되는지 모르겠는데요. 지금 이상한 소문이 돌거든요. 그곳 신부님께서 옷 벗었다고 하던데 정말인가요?”

이 말에 사무장님께서는 깜짝 놀라면서 그런 일이 없다고 말씀하셨던 것이지요.

왜 이렇게 이상한 소문이 났을까 생각해보니, 지난 주 제가 팔을 막 다치고 난 뒤에 미사도 제대로 봉헌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서 “신부님께서 미사도 못하시더라.”라는 소문이 났고 따라서 미사 못한다는 말이 옷 벗어서 미사를 못하는 것처럼 된 것이 아닐까 라는 결론을 맺게 되었지요.

사실 저는 새벽 묵상 글을 통해서 저의 개인적인 이야기까지 모두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많은 분들이 저를 만나지 않아도 너무나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그렇게 저의 개인적인 이야기까지 모두 공개해서 괜찮겠냐는 걱정의 말씀도 하십니다. 하지만 모두에게 떳떳해지기 위해서는 비밀이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으로, 묵상 글을 통해서 저의 모든 것을 내어 놓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황당한 소문이 돌기도 하더군요.

솔직히 많이 서운했습니다. 2001년부터 지금까지 저를 드러내면서 살았건만 그렇게 저를 믿지 못하는가 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러나 아직도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 라는 반성과 함께, 제 자신을 스스로 되돌아보는 계기도 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긴 성지에까지 이렇게 전화하면서 물어보신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관심과 사랑 때문인 것이지요. 관심과 사랑이 없다면 굳이 전화비까지 소요하면서 전화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나를 서운하게 하는 말들, 또한 나를 아프게 하는 말들이 오히려 사랑과 관심의 표현일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과연 어떤 말만을 좋아하나요? 자기가 좋아하는 소리만을 들으려고 하니, 정작 참된 사랑을 실천하지는 못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을 통해서 “서로 사랑하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서로 사랑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서로 상대방이 듣기 좋은 소리만 하라는 말씀일까요? 아니지요. 바로 그 사랑 때문에 상대방이 아파할 수도 있는 말을 할 수 있어야 하며, 그 사랑 때문에 그 아픈 말을 듣고도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랑의 실천이 어렵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어렵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어떻게든 사랑하라.’고 계속해서 힘주어 말씀하셨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자신의 사랑을 다시금 생각해보고, 다른 사람의 사랑을 어떻게 받아들였었는지 반성하는 시간도 가져보았으면 합니다.


상대방의 듣기 싫은 말에 화를 내지 맙시다. 나를 위한 말일 수 있답니다.



에스키모의 늑대 사냥('좋은 글' 중에서)

에스키모인들에겐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늑대 사냥법이 있습니다.
얼음바닥에 가축의 피를 적신 날카로운 칼을 꽂아 놓으면 냄새를 맡은 늑대가 다가와 그 칼을 핥기 시작합니다.
칼날 위에 얼어붙어 있던 피를 모두 핥아 내고, 결국 날카로운 칼날을 핥게 됩니다.
그러면 칼날에 혀가 베입니다.

그러나 피맛에 취한 늑대는 그 피가 자신의 피인 줄 모르고 계속 핥고 또 핥아 댑니다.
자꾸만 어지러워 지는데도 계속..
그렇게 자신의 피를 다 흘리며 서서히 죽어 갑니다

유혹도 이런 것이 아닐까요..
유혹에 빠져 자신도 모르게 서서히 죽어가는 어리석은 늑대가 되지 말아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