켄터베리의 성 아우구스티노(St. Augustine of Canterbury)
선교사, 대주교
성인의 활동지역 : 캔터베리(Canterbury)
성인의 활동연도 : +604년
성인과 같은이름 : 아오스딩, 아우구스띠노, 아우구스띠누스,
아우구스티누스, 어거스틴, 오스틴
성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또는 아우구스티노)는 로마(Rome) 태생으로
로마의 성 안드레아 수도원의 원장으로 일하다가,
596년 교황 성 대 그레고리우스 1세(Gregorius I)가 영국에 복음을 전하도록
40명의 수도자를 파견할 때 그 일원으로 함께 일하였다. 그들은 597년에 켄트에
도착하여, 이미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에텔베르트(Ethelbert) 왕으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그 후 아우구스티누스는 주교품을 받기 위하여 프랑스로 갔다가, 캔터베리의
주교로 부임하여 수많은 개종자를 탄생시켰다. 그는 왕이 하사한 땅 위에 성당과
베네딕토 수도원을 세웠으나, 브리튼의 켈트(Celtic) 전례를 고수하려는 주교들이
로마의 규율과 관습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데에는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는 여생을
켄트에서 보내면서 런던과 로체스터(Rochester) 주교좌를 설정하였다.
그는 캔터베리의 첫 번째 대주교이자 ‘영국의 사도’로 추앙받는다.
오스틴(Austin)으로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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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7년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은 로마의 성 안드레아 수도원에 있는 그로 하여금
복음을 전파하도록 영국에 파견하였다.
켄터베리의 대주교가 된 후 에덜버트왕의 협력을 얻어 많은 사람들을그리스도교
신앙으로 귀의시켰고 특히 켄트 왕국에서는 몇 개의 교구를 설립했다.
605년경 5월 26일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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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7년에 약 40명의 수사들이 조그만 무리를 이루어 영국의 앵글로 색슨족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로마를 떠났다.
이 무리를 이끈 사람은 로마에 있는 그들 수도원의 원장인 아우구스티누스였다.
그들이 겨우 프랑스의 한 지방인 골에 이르렀을 때 그들은 앵글로 색슨족의
포악함과 영국 운하의 믿을 수 없는 물길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아우구스티누그는 로마로 되돌아가서 그들을 파견한 대그레고리오 교황을 만났는데
그것은 그들의 공포가 근거가 없는 것임을 교황에게 확인받고자 했던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와 선교단은 다시 출발하여 이번에는 운하를 건너서 에텔버르트 왕이
통치하는 켄트 지역에 상륙했는데 이 왕은 그리스도인 왕비와 결혼한 이방인이었다.
에텔버르트는 그들을 친절하게 맞이해 주었고 캔터베리에 그들의 거처를 마련해
주었으며 그 해가 다 가기 전인 597년 성령 강림 주일에 그 자신이 세례를 받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프랑스에서 주교로 성성된 후 캔터베리로 돌아와 그곳에 자신의
주교좌를 세웠다.
그는 1070년에 준공되어 오늘날까지 서 있는 현재의 대성당 자리에 교회와 수도원을
세웠다.
신앙이 차츰 전파되어감에 따라 다른 주교좌들이 런던과 로체스터에 설립되었다.
선교 사업은 때때로 지지부진했으며 아우구스티누스도 언제나 성공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앵글로색슨족 그리스도인들과 앵글로 색슨족의 침입에 의하여 서부 잉글랜드로
쫓겨간 브리튼 원주민 그리스도인들을 화해시키려던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브리튼족이 롭마와는 다른 몇 가지 켈트 관습을 포기하게
하는 것도 실패했고 그들의 쓰라림을 참고 자기를 도와서 정복자들인 앵글로색슨족을
복음화하자는 권고도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내심을 가지고 계속 노력하며 대 그레고리오 교황이 제시한
선교 원칙들-당시로서는 상당히 계몽된-을 깊이 유념했다.
그것은 이방인의 성전과 관습을 파괴하기보다는 정화하고, 이교 예식과 축제를
크리스천 축제로 바꾸며, 가능한 한 지방 관습을 지속시키라는 것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604년에 세상을 떠났으나 그가 영국에 도착한지 7년이란 짧은
시일에 이룩한 제한된 성공은 결국 영국의 회개에 있어서 장기적인 결실을 맺게 되었다.
참으로 캔터베리의 아우구스티누스는 ’영국의 사도’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이다.
캔터베리의 아우구스티누스는 오늘날 매우 인간적인 성인으로 부각된다.
그는 우리 가운데 많은 사람들처럼 신경 쇠약으로 고통을 겪어야 했다.
예를 들면 그의 첫번째 영국행은 크게 우회하여 로마로 되돌아가고 말았던 것이다.
그들은 실수를 했으며 브리튼의 그리스도인들과 화평을 맺으려는 시도도 실패했다.
그는 때때로 자기 자신이 판단할 수 있는 문제를 결정하는 데 있어서도 더 큰 자기
확신을 갖기 위하여 로마에 편지를 써 보냈다.
그는 심지어 그레고리오 교황으로부터 자존심에 대한 완곡한 경고를 듣기까지 했다.
교황은 그에게 "최소한으로 두려워하고 주어진 놀라운 일들을 받아들일 것이며,
자신감을 가짐으로써 연약한 마음이 부풀어 오르게 되도록 하라."고 주의를 주었다.
부분적인 성공만이라도 받아들이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인내심은 오늘날의 사도들과
개척자들에게 좌절감에도 불구하고 투쟁하며 점진적인 성취에 만족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우표로 보는 성인전(최익철신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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