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Lord/† 聖人들의 삶을 통해서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6월 13일) 설교가, 교회 학자

ohjulia 2006. 6. 13. 04:44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Saint Anthony of Padua ) 설교가, 교회 학자

    성인의 활동지역 : 파도바(Padova) 성인의 활동연도 : 1195-1231 성인과 같은이름 : 안또니오, 안또니우스, 안토니우스, 앤터니 안토니오(1195 - 1231)는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근위 해군 제독의 아들로 태어났다. 17 세에 코임브라에서 아우구스띠노 참사회에 입회하여 사제 서품을 받았다. 여기서 신학과 성서에 깊은 조예를 쌓았다. 그는 작은형제회의 베라르도와 동료들이 모로코에서 순교했다는 소식을 듣고 순교의 관을 쓰기 위해서 작은형제회로 옮겼다. 그의 원에 따라 모로코로 파견되었으나 병으로 시칠리아에 되돌아왔다. 1221 년 총회에 참석하여 성 프란치스꼬 를 만나게 되고 폴리 근처의 은든소에서 생활할 수 있는 허락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뛰어난 설교 솜씨와 탁월한 학식 때문에 설교 책임자로 임명되고 프란치스코로 부터 작은형제회 첫 신학 교수란 칭호를 받게 되며 볼로냐에서 가르치기도 하였다. 곧 알비파에 대항하여 설교하기 위하여 남불 지방으로 파견되었다. 그는 이름 높은 설교가로 박학한 학자로 또한 뛰어난 덕행가로 일생을 보냈으며 마지막 3 년동안은 관구 봉사자로서 형제들에게 봉사하기도 하였다. 1231년 36 세라는 짧은 나이로 거룩한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의 중재로 생전과 사후에 수많은 기적들이 일어났으며 죽은 지 1 년이 채 못된 1232 년 5월 30일 시성되었고 비오 12 세는 교회학자로 선포하였다. (작은형제회홈."프란치스칸성인들"중에서) 1946년에 교회 박사로 공포된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는 교우들 위에 깊은 영향을 끼쳐 준 초기 프란치스코회 수사들 중의 한 분으로, 1105년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에서 태어났다. 세례 때 이름은 페르디난도였으며, 어렸을 때 대성전 부속학교에 다니다가 열 다섯살에는 리스본에 있는 플로라의 성 빈첸시오회의 수도원 학교로 옮겼다. 그러다가 2년 뒤에는 다시 코임브레의 성 십자가라는 아우구스티노회 수도분원으로 들어갔다. 그는 아마 이곳에서 성직의 교육을 받고 신품도 받은 모양이다. 1220년에 포르투갈의 친왕(親王) 돈 베드로가 모로코에서 프란치스코회 수사 순교자 다섯분의 유해를 모셔 왔는데 젊은 페르디난도는 이 위험하고도 영광스러운 사명을 열광적으로 환영했다. 이것을 계기로 프란치스코회 수사가 되기를 청하여 허락이 내렸고, 수도명으로 안토니오라는 이름을 받았다. 그 뒤 곧 그의 소망대로 회교도인들에게 설교하기 위해 모로코로 떠났으나 병으로 인해 되돌아 와야 했다. 그것은 하느님의 섭리였다. 그는 배를 타고 그 지방을 떠났으나 폭풍을 만나 시칠리아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안토니오가 1221년 아시시에서 열린 프란치스코 수도회 지도자 총회에 가니 루마니아의 포플리 근처에 있는 성 바오로의 조그만 수도원으로 거처를 정해 주었다. 이곳에서 그가 보낸 생활은 지극히 엄격하면서도 몹시 고요한 은수 생활이 었으며, 숨겨놓은 것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마침 포플리에서 서품식이 있게 되었는데, 관례(慣例)로 되어있는 강론을 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원장은 하는 수 없이 이 은수자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것은 뜻하지 않았던 발견이었으니, 이 무명의 수사가 기막힌 웅변의 소질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다 불같이 타오르는 덕을 겸한지라 사람들은 그를 북부 이탈리아에 있는 프로테스탄트들을 반박하려 보냈다. 이 프로테스탄트 교인들은 흔히 성서를 잘 인용해 쓸 줄 아는 능란한 솜씨를 가진 이들이었다. 이 무렵에 성 프란치스코는 안토니오를 신학강사로 임명했다. 1123년에 안토니오 수사는 프랑스 땅에 와서 특히 로와르 강과 가론 강 사이에 있는 지방에서 전교 성직을 봉행했다. 그가 리무쟁 수도원장이 된 것이다. 안토니오는 브리브 라 가이야르드에 수도원을 하나 창설했는데, 지금까지도 그가 살던 굴을 볼 수 있다. 그는 1126년 10월 전에 아를르에서 열린 수도자 회의에 참석했으며 프랑스에서 뿌리 깊은 운동을 일으켜 많은 영혼을 더 나은 그리스도교인의 생활로 회개시켰다. 1227년에 안토니오는 이탈리아로 돌아왔다. 그는 베로나의 포악한 왕에게 퀠프 당원으로 옥에 갇힌 사람들을 위해 감히 청원을 했다. 이 청원은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지만... 1230년부터는 파도바에 가서 자리잡게 되었는데, 이 도시가 그때부터는 안토니오의 도시가 되었고 그곳에서 그는 환유(換喩)로 성인이라 불리어졌다. 1231년에 안토니오는 사순절(四旬節) 강론을 해서 크나큰 성공을 거두었다. 롬바르디아에서 그는 고리대금과 빚 때문에 사람을 옥에 가두는 것을 공격했고, 무산자(無産者)들을 변호했다 그는 마침내 1231년 6월 13일에 36세를 일기로 세상을 하직했는데, 그의 장례식은 개선(凱旋)이나 다름없이 성대한 것이었다. 안토니오의 전기는 1245년 이전에 어떤 동료 수사가 썼는데, 이 책은 가장 좋은 문헌이 된다. 안토니오가 이탈리아 밖에서 한 일에 대해서는 1294년 후에 씌어진 프란치스코회 수사 리무쟁의 요한의 전기를 참작하는 수밖에 없다. 안토니오는 1232년 5월 30일 그레고리오 9세 교황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이날 교황은 "지극히 착하신 박사여"하는 "대송찬미가(對誦讚美歌)"를 읊었는데, 이것은 현재 교회 박사들을 위한 찬미가이다. 이것을 보면 그레고리오 9세 교황은 안토니오를 교회박사로 정한 비오 12세 교황의 공식적인 선언을 미리 시작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산문(散文)으로 된 그의 성무 일도서 경문은 중세기의 가장 훌륭한 예절 중의 하나라 하겠다. 파도바에는 성 안토니오의 무덤 위에 성을 지었는데, 이 건축은 1263년에 시작하여 1424년에 준공되었다. 1263년에는 성 보나벤투라가 그 유해의 확인을 행했는데 이 훌륭한 강사의 혀는 아주 훌륭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1350년과 1745년에는 또다시 비슷한 확인이 행해졌다. 안토니오가 생전에 기적을 행했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중론이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죽은 다음에는 이 "기적을 행하는 자"의 전구로 많은 기적이 나타났다. 당시 사람들은 안토니오를 일컬어 "이단자들의 망치", "살아있는 계약의 궤" 라고 했으며, 기적을 행하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 오늘날에 있어서도 그의 공경은 대단히 성행되는 것이 틀림없는 사실이다. 대중은 그에게 대해 특별한 공경을 한다. 그는 가난한 이들의 수호 성인이고, 잃어버린 물건을 찾을때 안토니오 성인에게 기도하면, 곧 바로 찾는다는 전설이 있다. 그것은 아마 성인의 영성책을 훔쳐 가지고 달아났던 어떤 수련자가 성인의 기도로 인해 그에게 그 귀중한 책을 돌려주게 된 까닭에서일 것이다. 성 안토니오는 1946년 1월 16일에 비오 12세로 부터 교회 박사로 선언되었다. 성상이나 상본에는 성 안토니오가 책을 들고 있는데 이것은 그가 성서의 지식이 해박하다는 비유이다. 중부 이탈리아에서는 거기에다 불꽃을 덧붙였으며, 또 15세기부터는 심장을 그려넣었는데, 이것은 그의 뜨거운 열심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리고 백합을 그의 정결을 표시하는 것이며 포르투갈에서는 백합에 십자가를 덧붙여 넣는다. 17세기부터는 그가 예수 아기를 안고 있는 것을 표시했는데,이것은 그의 탈혼 중에 일어났던 일을 표시하는 것이다. (대구대교구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