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ily/★ 빠다킹 신부님과 새벽을..

사제성화의 날인 오늘, 자신의 본당 신부님을 위해 기도합시다.

ohjulia 2006. 6. 23. 08:25
2006년 6월 23일 예수성심 대축일

제1독서
호세아 11,1.3-4.8ㅁ-9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 “이스라엘이 아이였을 때에 나는 그를 사랑하여, 나의 그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
3 내가 에프라임에게 걸음마를 가르쳐 주고 내 팔로 안아 주었지만, 그들은 내가 자기들의 병을 고쳐 준 줄을 알지 못하였다. 4 나는 인정의 끈으로, 사랑의 줄로 그들을 끌어당겼으며 젖먹이처럼 들어 올려 볼을 비비고 몸을 굽혀 먹여 주었다.
8 내 마음이 미어지고 연민이 북받쳐 오른다. 9 나는 타오르는 내 분노대로 행동하지 않고 에프라임을 다시는 멸망시키지 않으리라. 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이다. 나는 네 가운데에 있는 ‘거룩한 이’, 분노를 터뜨리며 너에게 다가가지 않으리라.”


제2독서
에페소 3,8-12.14-19
형제 여러분, 8 모든 성도들 가운데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나에게 은총을 주시어, 그리스도의 헤아릴 수 없는 풍요를 다른 민족들에게 전하고, 9 과거의 모든 시대에 만물을 창조하신 하느님 안에 감추어져 있던 그 신비의 계획이 어떠한 것인지 모든 사람에게 밝혀 주게 하셨습니다.
10 그리하여 이제는 하늘에 있는 권세와 권력들에게도 교회를 통하여 하느님의 매우 다양한 지혜가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11 이는 하느님께서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신 영원한 계획에 따른 것입니다. 12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에 대한 믿음으로, 확신을 가지고 하느님께 담대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
14 이 때문에, 나는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15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종족이 아버지에게서 이름을 받습니다.
16 아버지께서 당신의 풍성한 영광에 따라 성령을 통하여 여러분의 내적 인간이 당신 힘으로 굳세어지게 하시고, 17 여러분의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마음 안에 사시게 하시며, 여러분이 사랑에 뿌리를 내리고 그것을 기초로 삼게 하시기를 빕니다.
18 그리하여 여러분이 모든 성도와 함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 깨닫는 능력을 지니고, 19 인간의 지각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이렇게 하여 여러분이 하느님의 온갖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빕니다.


복음
요한 9,31-37
31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신 날은 준비일이었고 이튿날 안식일은 큰 축일이었으므로, 유다인들은 안식일에 시신이 십자가에 매달려 있지 않게 하려고, 십자가에 못 박힌 이들의 다리를 부러뜨리고 시신을 치우게 하라고 빌라도에게 요청하였다.
32 그리하여 군사들이 가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다른 사람의 다리를 부러뜨렸다. 33 예수님께 가서는 이미 숨지신 것을 보고 다리를 부러뜨리는 대신, 34 군사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곧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
35 이는 직접 본 사람이 증언하는 것이므로 그의 증언은 참되다. 그리고 그는 여러분이 믿도록 자기가 진실을 말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36 “그의 뼈가 하나도 부러지지 않을 것이다.” 하신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런 일들이 일어난 것이다. 37 또 다른 성경 구절은 “그들은 자기들이 찌른 이를 바라볼 것이다.” 하고 말한다.




저는 6남매 중의 막내로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저에게 식구가 많아서 좋았겠다고 말씀들을 하십니다. 그러나 지금 어렸을 때를 떠올리면 분명히 외로움을 느끼면서 살았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제 위의 형, 누나들과 나이 차이가 좀 있거든요. 그래서 형, 누나들이 학교에 가고 나면 같이 놀 사람이 집에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옆집에 친구가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더군다나 어머니가 많이 편찮으셔서 더욱 더 혼자 지낼 수밖에 없었지요.

그런데 이렇게 혼자서 지내다보니 혼자 노는 방법을 찾게 되더군요. 물론 지금처럼 컴퓨터가 있던 시대도 아니었기 때문에 혼자 지내는 것이 상당히 어려울 것 같지만, 혼자 노는 방법도 상당히 많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지요. 흙장난, 공놀이, 딱지치기, 강아지와 놀기, 책읽기 등등……. 혼자서 놀 수 있는 것들은 생각보다 너무나도 많았습니다.

지금 신부가 되어 이 어렸을 때의 체험이 제 자신에게 얼마나 큰 도움이 되었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왜냐하면 신부이기 때문에 혼자일 때가 많고, 또한 그 혼자 지내는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를 알기에 혼자 있어도 전혀 외롭지가 않거든요.

따라서 저의 체험을 통해서 요즘 놀 거리가 없다고 투덜거리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이런 말을 하고 싶습니다.

“심심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어렸을 때의 심심함은 외로움인 동시에 조그마한 고통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축복의 시간임을 깨닫게 됩니다. 어쩌면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고통과 시련이 이런 것이 아닐까요? 즉, 고통과 위기 그리고 시련의 시간이 오히려 내게 있어 축복의 시간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하긴 예수님의 고통, 수난, 죽음을 통해서 우리들의 구원이 이루어졌음을 기억할 때, 나의 고통과 시련을 가져오는 하나의 희생이 때로는 다른 사람들에게 축복이 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장기나 바둑을 둘 때, 하수와 고수를 결정하는 기준이 있습니다. 그것은 몇 수 앞을 내다보느냐는 것이지요. 그런데 하수가 고수의 그 깊은 뜻을 알 수 있을까요? 그 깊은 뜻을 알 수가 없기에 패배를 하는 것이고, 나중의 결과를 통해서 ‘역시 고수구나’라는 소리를 하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들 삶의 진정한 고수는 우리들이 믿고 따르는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처럼 바로 앞의 일만을 바라보는 하수의 모습을 취하지 않으시고, 대신 몇 수 앞을 내다보시면서 우리들을 가장 좋은 길인 참된 행복의 길로 이끌어 주시고 계십니다.

우리들은 고수이신 주님을 조금이라도 닮기 위해서 열심히 기도하고 행동으로 그 말씀을 따르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데 때로는 마치 내가 고수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주님의 이끄심을 반대하고, 내 뜻을 주님의 뜻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더라는 것입니다.

예수성심대축일을 맞이하는 오늘, 예수님의 마음과 내 마음이 하나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주님처럼 진정한 고수가 되기를 소원하여 봅니다.


사제성화의 날인 오늘, 자신의 본당 신부님을 위해 기도합시다.


불행이 없는 집(루치니, '좋은글' 중에서)

어느 아버지가 애지 중지하는 외아들과 함께 사냥에 나갔습니다. 사냥을 즐기는 아버지는 자신이 짐승을 잡는 모습을 아들에게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숲 속에서 튀어나오는 멧돼지를 발견한 아버지는 방아쇠를 당겼고 그 멧돼지는 피를 흘리고 숲 속으로 도망갔습니다. 아들을 그 자리에 세워두고 재빨리 멧돼지를 쫓아 갔습니다.

한참 후 그 자리로 돌아온 아버지는 아들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아들을 애타게 부르며 밤이 늦도록 숲 속을 뒤졌으나 아들은 이미 사나운 짐승에게 숨이 끊어진 후였습니다.

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쓰러지듯 주저앉아 늦은 나이에 얻은 외동아들을 안고 울고 있을 때 바람처럼 나타난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을로 내려가 불행을 겪지 않은 집의 냄비를 가져다가 그대가 잡은 짐승을 요리하면 슬픔을 잊을 수 있을 것이다." 라는 것이었습니다. 싸늘하게 식은 아들을 안고 마을로 내려온 아버지는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여보! 지금 마을을 돌아 불행을 겪지 않은 집에서 냄비 좀 빌려 오구려 그러면 우리의 슬픔도 사라진다고 하오."

얼마 뒤 돌아온 아내는 빈 손이었습니다. 마을 구석구석을 다 돌아 보아도 불행을 겪지 않은 집은 단 한 곳도 없었습니다.

사냥꾼의 아내가 문을 두드리는 집마다 사별, 이혼, 파산, 해고, 질병.... 등등 불행을 겪지 않은 집은 한 곳도 없었습니다.

나 혼자만 왜 이렇게 힘들까? 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누구나 아픈 시련을 견디며 살고 있는 것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