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Lord/† 聖人들의 삶을 통해서

성 치릴로 (6월 27일) 총대주교, 교회학자

ohjulia 2006. 6. 27. 23:16
고향으로 , 성 치릴로
 

    성 치릴로 (St. Cyril) 총대주교, 교회학자

    성인의 활동지역 : 알렉산드리아(Alexandria) 성인의 활동연도 : 376-444년 성인과 같은이름 : 시릴, 시릴로, 시릴루스, 치릴루스, 키릴로, 키릴로스, 키릴루스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태생인 성 키릴루스(Cyrillus, 또는 치릴로)는 그 도시 총대주교인 테오필루스(Theophilus)의 조카였다. 키릴루스는 알렉산드리아에서 고전과 신학 교육을 받았고, 그의 아저씨에 의하여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는 403년 총대주교를 수행하여 콘스탄티노플로 갔으며, 거기서 오크 시노드 (Synod)에 참석하였다. 이 시노드는 요한 크리소스토무스(Johannes Chrisostomus)를 면직시켰다. 키릴루스는 412년에 테오필루스가 사망하자 그의 아저씨의 후계자로 인정되어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로 승품되었다. 그러나 키릴루스의 지지자와 그의 라이벌인 티모테우스(Timotheus) 지지자 사이의 격렬한 싸움이 있어 큰 상처를 입고 출발하였다. 그런데 키릴루스는 자신이 축출하였던 노바티아누스(Novatianus) 이단을 상대로 일련의 공격을 다시금 재개하였다. 그 결과 그가 그 도시에서 몰아냈던 유대인들과 총독 오레스테스는 그의 이같은 행위를 용납하지 않았다. 430년 키릴루스는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네스토리우스 (Nestorius)와의 분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네스토리우스는 그리스도가 하느님이지 인간은 아니었기 때문에 마리아는 천주의 모친일 수 없다고 가르쳤으며, 따라서 마리아에게 천주의 모친(테오토코스, Theotokos)이란 용어를 사용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키릴루스는 교황 코일레스티누스 1세(Coelestinus I)를 설득하여 로마(Rome)에서 시노드를 개최토록 하고 그를 단죄하였다. 그리고 이에 맞추어 알렉산드리아에서도 시노드를 열고 그를 단죄하여 교회 일치를 도모하였다. 코일레스티누스 교황은 키릴루스로 하여금 네스토리우스를 축출하도록 지시하였고, 키릴루스는 431년 제3차 에페수스 공의회(Council of Ephesus)를 주재하였다. 이때 200명 이상의 주교들이 대거 참여하여 큰 성황을 이루었다. 이 공의회는 네스토리우스가 결백하다고 주장하는 안티오키아(Antiochia)의 총대주교 요한과 42명의 추종자들이 대거 몰려오기 전에 네스토리우스와 그의 추종자 세력을 단죄하여 분쇄하였다. 그러나 네스토리우스 일파는 그들 나름대로 회의를 소집하여 키릴루스를 축출한다고 선언하였다. 테오도시우스 2세 황제는 키릴루스와 네스토리우스를 체포하였으나, 교황대사가 와서 네스토리우스에 대한 공의회의 결정이 올바르다고 전하자 키릴루스는 무혐의로 석방되었다. 2년 후 안티오키아 주교들을 대표하는 요한 총대주교와 키릴루스는 위의 단죄를 인정하는 동의안을 결의하는데 도달하였고, 네스토리우스는 강제로 유배되었다. 그 후 키릴루스는 삼위일체와 강생에 관한 교리 확립과 신학 논문 저술에 여생을 바쳤고, 그리스도교 사회에 깊이 뿌리박고 있던 펠라기우스주의와 네스토리우스주의를 배격하는 일을 하여 교회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그는 알렉산드리아가 낳은 가장 유명한 신학자이다. 그의 저서는 정확한 사고와 명확한 전개 및 그 합당한 근거 제시로 후대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성서에 관한 그의 주석서 가운데에는 요한, 루카 그리고 모세오경이 있으며, 수많은 교의신학 논문을 비롯하여 배교자 율리아누스(Julianus) 황제에 대한 반박문, 편지 그리고 강론들이 전해온다. 키릴루스는 1882년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교회학자로 선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