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ily/★ 빠다킹 신부님과 새벽을..

예수님 말씀을 굳게 믿음으로써, 희망을 잃지 마세요.

ohjulia 2006. 8. 12. 04:42
2006년 8월 12일 연중 제18주간 토요일

제1독서
하바꾹 1,12―2,4
12 주님, 당신은 옛날부터 불멸하시는 저의 하느님, 저의 거룩하신 분이 아니셨습니까? 주님, 당신께서는 심판하시려고 그를 내세우셨습니다. 바위시여, 당신께서는 벌하시려고 그를 세우셨습니다.
13 당신께서는 눈이 맑으시어 악을 보아 넘기지 못하시고 잘못을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시면서, 어찌하여 배신자들을 바라보고만 계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이를 집어삼켜도 잠자코 계십니까?
14 당신께서는 사람을 바다의 물고기처럼 만드시고, 우두머리 없이 기어 다니는 것처럼 만드셨습니다. 15 그는 사람들을 모두 낚시로 낚아 올리고 그물로 끌어 올리며 좽이로 모으고 나서는, 기뻐 날뛰며 16 자기 그물에다 제물을 바치고 좽이에다 분향을 합니다. 그것들 덕분에 그의 몫이 기름지고 음식이 풍성하기 때문입니다.
17 이렇게 그가 줄곧 그물을 비워 대고 민족들을 무자비하게 죽여도 됩니까?
2,1 나는 내 초소에 서서, 성벽 위에 자리 잡고서 살펴보리라. 그분께서 나에게 무어라 말씀하시는지, 내 하소연에 어떻게 대답하시는지 보리라. 2 주님께서 나에게 대답하셨다.
“너는 환시를 기록하여라. 누구나 막힘없이 읽어 갈 수 있도록 판에다 분명하게 써라.” 3 지금 이 환시는 정해진 때를 기다린다. 끝을 향해 치닫는 이 환시는 거짓말하지 않는다. 늦어지는 듯하더라도 너는 기다려라. 그것은 오고야 만다, 지체하지 않는다.
4 보라, 뻔뻔스러운 자를. 그의 정신은 바르지 않다. 그러나 의인은 성실함으로 산다.


복음 마태오 17,14-20
그때에 14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무릎을 꿇고 15 말하였다. “주님, 제 아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간질병에 걸려 몹시 고생하고 있습니다. 자주 불 속으로 떨어지기도 하고 또 자주 물속으로 떨어지기도 합니다. 16 그래서 주님의 제자들에게 데려가 보았지만 그들은 고치지 못하였습니다.”
17 그러자 예수님께서 “아,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야!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함께 있어야 하느냐? 내가 언제까지 너희를 참아 주어야 한다는 말이냐? 아이를 이리 데려오너라.” 하고 이르셨다. 18 그런 다음 예수님께서 호통을 치시자 아이에게서 마귀가 나갔다.
바로 그 시간에 아이가 나았다.
19 그때에 제자들이 따로 예수님께 다가와, “어찌하여 저희는 그 마귀를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 하고 물었다.
20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너희의 믿음이 약한 탓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 가라.’ 하더라도 그대로 옮겨 갈 것이다. 너희가 못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인간이 달걀을 품어서 부화시킬 수 있을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가능할까요? 이 부분의 전문가들은 이러한 이유를 들어서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인간의 체온은 36도 전후이지만, 닭은 40도이기 때문에 인간이 달걀을 품어서 부화시킬 수 있는 확률은 전혀 없습니다.’

이를 실험으로 증명해 보자고 주장한 사람이 실제로 일본에서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네 명의 실험자를 모집한 뒤에 호텔에 투숙시키며 수의사와 기록자를 동반해 지속적으로 관찰했습니다. 그런데 깜짝 놀랄 만한 일이 벌어진 것이에요. 글쎄 20일 만에 한 할머니가 품고 있던 알에서 건강한 병아리가 나온 것이었지요.

고정관념이 깨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이 사실 때문에 일본 전역이 들썩였고, 전 세계로 이 뉴스가 전해졌습니다. 이 실험을 하자고 주장했던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문가의 말만 따랐다면 결코 굳은 머리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어떤 일이든 혁명가가 되는 기분으로 덤벼 보아야 합니다.”

저도 이 글을 보고서야 처음 알았네요. 인간도 달걀을 부화시킬 수 있다고 말입니다. 사실 우리들의 고정관념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잖아요. 더군다나 전문가들도 인간과 닭의 체온 차이를 이야기하면서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하는데, 누가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문득 우리들의 믿음에 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들의 믿음도 나의 잘못된 고정관념으로 인해서 퇴색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사실 주님의 말씀을 모두 믿기란 쉽지 않습니다. 아마 이 점은 이천년 전의 예수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마귀를 쫓는 권한을 받았습니다. 그 권한을 받았다고 해서 갑자기 안 보이던 것이 눈에 보이고, 자신이 몸이 붕붕 공중으로 뜨고 그랬을까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그 권한을 주셨지만, 제자들의 외적인 모습에는 그 어떠한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자 중에서는 ‘내가 무슨 능력은 받은 건가?’라는 생각을 했던 사람도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 들린 사람을 데리고 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고치지 못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분명히 예수님으로부터 마귀를 쫓는 권한을 받았는데 말이지요. 바로 의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과연 쫓아낼 수 있을까? 나는 변한 것이 하나도 없는데…….’라는 생각을 가지고 주님께서 주신 그 능력을 의심했기 때문에 마귀를 쫓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아주 자그마한 믿음만 있어도, 산도 옮길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믿음은 과연 어떠한가요? 눈에 보이는 사실만을,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만을 믿는다고 하면서, 주님의 말씀을 의심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이렇게 어떠한 것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굳어 버린 마음이 가능할 수도 있는 것들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던 것은 아닐까요?

믿음은 불가능한 것도 가능하게 합니다. 그 불가능을 나의 굳쎈 믿음으로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 보면 어떨까요? 멋질 것 같지 않습니까?


예수님 말씀을 굳게 믿음으로써, 희망을 잃지 마세요.



성공을 위한 좋은 글(아놀드 베네트)

'내일부터가 아니라 오늘부터'이다

'다음부터가 아니라 지금부터'이다

'내일은 무엇을 할 것인지'가 아니라
'오늘은 무엇을 했는지'이다

'무엇이 이뤄졌으면'이 아니라
'무엇을 노력하고 있는지'이다

'원하는 것이 왜 안 이뤄지는지'가 아니라
'원하는 것을 위해 왜 행동하지 않는지'이다

'나는 왜 안 되느냐'가 아니라
'나는 왜 행동하지 않느냐'이다

'나는 무엇 무엇을 할 것이다'가 아니라
'나는 무엇 무엇을 하고 있다'이다

'내 소원은 이것이다'가 아니라
'나는 이렇게 된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