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Lord/† 聖人들의 삶을 통해서

헝가리의 성 스테파노 (8월 16일) 왕

ohjulia 2006. 8. 16. 00:56
고향으로 ,  헝가리의 성 스테파노
 

    헝가리의 성 스테파노 (St. Stephen of Hungary) 왕

    성인의 활동지역 : 헝가리(Hungary) 성인의 활동연도 : 970?-1038년 성인과 같은이름 : 스테파누스, 스테판 성인들 중에는 왕후(王侯)출신도 많은데, 그 중에서도 유명한 성인 중의 한 분은 헝가리의 왕 성 스테파노이다. 당시의 헝가리는 아직 그리스도교를 몰랐고, 오스트리아와 독일 원정에만 급급하여 933년 및 955년의 두 번에 걸쳐 대패를 당했다. 헝가리에 그리스도교가 비로소 전래된 것은 바로 이 시기였으며, 우선 국왕 체살 자신도 그리스도교를 믿기는 했으나 완전한 신자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아들 와이에는 매우 경건하고 신앙심이 깊은 신자였으므로 헝가리가 그리스도교국이 된것은 실로 이 분의 힘이라 할 수 있다. 스테파노는 와이에의 영세 이름이다. 아버지 체살은 997년에 서거했는데, 임종때 국내 중신들을 모으고 자기의 계승자로 와이에를 국왕으로 추대하여 이에 충성을 다할 것을 간곡히 유언했다. 일동은 숙연하게 그의 말씀대로 할것을 맹세하고, 그 후 와이에를 국왕으로 받들었다. 스테파노는 어려서부터 그의 성덕의 일면을 보였다. 그의 깊은 신앙은 전국민이 그리스도교를 믿도록 노력한 데서도 엿보이는 것이며, 그의 인내와 유화함과 견인 불발(堅忍不拔)의 모든 덕은 오로지 그 신앙심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더구나 그는 교양이 높은 분이며 성서에 대해서는 특별히 정신을 기울여 연구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성인도 정의의 칼을 들지 않으면 안 될 사건이 일어났다. 즉 왕이 그리스도료를 국교로서 공포함에 반대해 2, 3명의 영주(領主)들이 반란을 기도한 것이다. 스테파노 왕은 우선 하느님께 열심히 기도를 바치고 특히 성모 마리아의 도우심과 성 루치오의 전구를 간구하고 난 후 출정해 대승리를 거두고 돌아왔다. 그는 패군의 장병에게도 대단히 관대한 처분을 내렸다. 그리고 그 후에도 여려 번 칼을 들지 않으면 안 될 경우도 있었지만, 그럴때마다 그는 은인자중(隱忍自重)하며 가능한 한 평화로이 해결하려 했다. 당시 독일의 황제 하인리히 2세의 여동생 지셀라(Gisella)를 왕비로 삼고 서로 격려해 신심과 수덕에 매진했으며,교회와 수도원을 건축하고 빈민에게 많은 자선을 베풀었다. 그의 특별한 주보는 성모 마리아였다. 왕은 전국민이 성모를 공경하도록 장려했으며, 성모 승천 대축일을 국경일로 정했다. ****************************************************************************** 헝가리 게자 대공과 그의 아내 아델라이데의 아들로 태어난 바이크(Vaik)는 10살 때에 세례를 받고 스테파누스(Stephanus, 또는 스테파노)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그는 훗날 하인리히 2세 황제가 된 바이에른(Bayern) 공작의 누이동생인 기셀라와 결혼했고, 997년 그의 아버지가 사망하자 마자르족(Magyars)의 통치자로 군림하였다. 그는 일련의 그리스도교적인 정책을 펼쳐 성공을 거두었고, 1001년에는 헝가리의 왕으로서 대관식을 거행하였다. 성 스테파누스 왕은 성 아달베르투스(Adalbertus)의 지도하에 교계제도를 구성하였고, 교회 재건을 기하였으며, 온 나라를 평화롭고 지혜롭게 다스렸다. 헝가리 국가를 창건하고 그리스도교화 시킨 최초의 헝가리 왕인 그는 1083년에 그레고리우스 7세(Gregorius VII)로부터 시성되었고, 유해는 부다페스트의 성모 성당에 안장되어 공경을 받고 있다. ******************************************************************************* 스테파노는 어려서부터 그의 성덕의 일면을 보였다. 그의 깊은 신앙은 전국민이 그리스도교를 믿도록 노력한 데서도 엿보이는 것이며, 그의 인내와 유화함과 견인 불발(堅忍不拔)의 모든 덕은 오로지 그 신앙심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더구나 그는 교양이 높은 분이며 성서에 대해서는 특별히 정신을 기울여 연구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성인도 정의의 칼을 들지 않으면 안 될 사건이 일어났다. 즉 왕이 그리스도료를 국교로서 공포함에 반대해 2, 3명의 영주(領主)들이 반란을 기도한 것이다. 스테파노 왕은 우선 하느님께 열심히 기도를 바치고 특히 성모 마리아의 도우심과 성 루치오의 전구를 간구하고 난 후 출정해 대승리를 거두고 돌아왔다. 그는 패군의 장병에게도 대단히 관대한 처분을 내렸다. 그리고 그 후에도 여려 번 칼을 들지 않으면 안 될 경우도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그는 은인자중(隱忍自重)하며 가능한 한 평화로이 해결하려 했다. 스테파노는 사실상 그때까지 국왕이라는 정식 칭호는 갖지 못했다. 그래서 교황 실베스테르 2세는 그의 포교상의 공적을 참작해 비로소 정식으로 국왕의 칭호를 수여하고 아름다운 왕관을 선사했다. 그 왕관은 그 후 대관식 때마다 사용되었고, 현재는 유일한 국보로서 보존되어 있다. 왕이 된 그는 더욱 정치에 열심해 그 나라는 나날이 번성해 갔다. 스테파노는 위엄 있는 한 나라의 국왕이면서도 매우 겸손하여, 복장은 소박한 것을 택하며 빈민에게도 손수 선물을 나누어 줄 정도였다. 때로는 불량배에게 붙들려 변을 당한 일도 있었다. 스테파노는 이런 때에도 조금도 분개하지 않고 도리어 무도한 그들에게 사과까지 했다고 한다. 그와 같이 온화한 왕은 누구에게든지 친절했다. 사람, 특히 성인들이 누구나 다 마찬가지로 겪었듯이 스테파노도 시련을 당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전에도 말한 바와 같이 왕은 평화를 사랑했으나, 전쟁을 하지 않으면 안 될 피치 못할 사정이 전후 세 번 있었다. 세 번의 전쟁 중에 왕자는 다 전사하고 남은 것은 다만 에메리코라는 태자 하나 뿐이었다. 에레리코는 덕이 높고 생활이 성스러워 부왕의 계승자로서 부끄럽지 않은 아들이라 하여 스테파노는 대단한 기대를 가지고 있었는데, 어찌 된 셈인지 자기보다 7년이나 앞서 1031년에 사망하고 말았다. 그때 아들이 무덤에서 기적이 계속 일어나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에메리코도 현재 성인으로서 존경받고 있는 분이다. 스테파노는 말년에 이르러 더욱 국정을 정리하는데 힘썼다. 얼마 안 되어 그는 중병에 걸려 병석에 오래 눕게 되었으나, 그 병고를 잘 참아 이겼다. 임종이 가까움을 안 왕은 중신과 주교들을 소집하고 그의 생질인 베드로를 그 계승자로 정한 뒤 여러 번 동정 성 마리아의 성명을 부르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때는 1038년 8월 15일, 마침 성모 승천 대축일이었다. 헝가리에서는 지금도 스테파노 왕께 대한 존경이 대단해, 1938년에는 900주년 기념제가 성대히 거행되었다. 그는 1083년에 그레고리오 7세로 부터 시성되었고, 유해는 부다의 성모 성당에 안장되어 공경을 받고 있다.